글로벌 아트 시장을 둘러싼 변화의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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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 2015

글 신수정(크리스티 코리아 실장) | 일러스트 하선경

최고가 기록을 잇따라 새로 써 내려가고 있는 세계 미술 시장. 신나게 상승 가도를 달리는 미술 시장에서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날 선 지적도 쏟아지지만 긍정적인 변화의 조짐도 엿보인다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그 바탕에는 디지털 시대의 흐름을 자연스레 타는 ‘젊은 피’가 등장하면서 미술 시장의 저변이 확대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자리하고 있다. 새로운 물결에 기꺼이 부응하고 있는 글로벌 미술 시장의 변화 양상과 함께 상대적으로 소외된 듯한 우리의 현실을 살펴본다.



2006년 소더비 뉴욕 경매에서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이 경매 역사상 최초로 1억달러가 넘는 가격($102,168,000)을 기록했을 때만 해도 이 숫자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쉬이 깨질 것 같지 않던 기록을 남긴 채 2007년 전 세계를 휩쓴 경제 위기를 맞이한 미술 시장은 주춤했다. 2008~2009년에 접어들면서 금융 위기의 그늘이 미술 시장에도 드리우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난 듯하다. 세계 미술 시장은 2010년을 기점으로 점차 회복세에 접어들었고, 2013년에는 가뿐하게 예전 수치를 회복하면서 뜨거워졌으며, 지난해에는 활활 타올랐다. 2014년 미술 시장 거래액(판매액 기준)은 전년도 대비 7% 증가한 5백10억유로를 기록하며 역대 최고 수준을 찍었다. 그 목적이 단순 투자든, 투자를 곁들인 취미든 간에 시장을 뒤흔드는 슈퍼 리치들, 그리고 분산 투자 대상을 찾는 기관 투자자들의 미술품 사랑은 갈수록 더 깊어지는 듯하다.
이처럼 ‘핫한’ 세계 미술 시장을 두고 여전히 슈퍼 리치의 ‘그들만의 잔치’일 뿐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막상 그 내부를 살펴보면 블루칩 중심의 하이엔드 시장과 그렇지 못한 2~3군 작품들의 가격 양극화 현상이 극심하다는 주장도 있다. 앤디 워홀,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한 슈퍼스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전반적으로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 가격은 고공 행진을 하고 있지만, 애매한 중간 지대에 속한 작가나 신진 작가들은 별로 그 상승세에 동참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 그럼에도 전체적 맥락에서 살펴보면 여러모로 긍정적인 변화의 기운이 감지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술계가 고고하고 콧대 높은 이미지에서 벗어나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점차 유연해지는 모습이 눈에 띄고, 디지털 시대를 겪으면서 저변이 확대될 조짐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 풍요롭기 그지없는 글로벌 풍경에 비하면 다소 초라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한국 미술 시장에 오랜만에 감도는 긍정적인 기운도 반갑다.

‘핫한’ 세계 미술 시장의 중심이 된 컨템퍼러리 아트
상승세를 타고 있는 글로벌 미술 시장의 중심에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미술을 지칭하는 이른바 ‘컨템퍼러리 아트’ 가 있다. 지난해 전후·동시대 미술(post-war and contemporary art) 분야의 판매액은 미술 시장 전체 금액 에서 절반가량(48%)을 기록하면서 압도적인 1위를 유지했 다. 이 부문의 경매 기록이 거듭 최고가를 갈아치우고 있음은 물론이다. 전 세계 미술 관계자들의 이목이 쏠리는 경매 중 하나인 크리스티 뉴욕의 예를 들자면 ‘전후·동시대 미술’ 분야의 2014년 경매 판매액이 28억달러에 이르렀는데, 이는 2001년(1억1천8백70만달러)에 비해 약 23배나 높은 수치다. 경매 시장에서 현대미술이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인상주의를 제치고 급성장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다 보니 이 분야의 우량주 작가들에 대한 ‘대접’이 갈수록 극진해지는 추세다. 경매 시장에서 1억달러를 넘는 사례가 계속 나올 정도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루치안 프로이트 초상의 세 가지 습작’이 2013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 서 1억4천2백40만달러를, 올해 5월에는 피카소의 ‘알제리의 여인들’ 이 1억7천9백만달러를 각각 기록했다.
신흥 시장에서 부는 새 바람

미술 시장 호황을 주도하는 세력을 보자면 중동, 러시아, 아시아 등에서 활약하는 신흥 컬렉터층이 ‘일등 공신’ 으로 꼽힌다. 전통적으로 미술 시장이 서구의 보수적인 컬렉터들에 의해 주도됐다면, 1980년대에는 일본의 입김이 거셌다. 모네, 고흐 같은 인상주의 작품을 대거 사들이면서 혜성처럼 등장한 일본인 컬렉터들은 당대 최고가 기록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그들은 아직까지도 인상주의 작품으로 한몫을 톡톡히 보고 있다). 1990년대부터는 거품경제가 꺼진 일본 대신 러시아, 중동의 부호들이 미술 시장을 움직이는 큰손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중국 부호들까지 대거 가세했다. 수퍼 컬렉터층의 저변도 확대되고 있는 셈이다.
러시아의 거물급 컬렉터로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축구 클럽 첼시 구단주로도 유명한 로만 아브라모비치, 최근 모스크바에 현대미술관을 연 그의 부인 다샤 주코바 같은 인물 들이 있다. 막강한 자금력을 등에 업고 연간 수억달러어치씩 미술품을 사들이는 카타르 왕실의 거침 없는 행보도 하이엔드 미술 시장의 새 지평을 열고 있다. 그 주도 세력으로 카타르 국왕의 딸인 셰이크 알-마야사 공주가 꼽히는데, 그녀는 카타르 왕실이 프라이빗 세일(비공개)로 2011년 폴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2억5천9백만달러대에 구입한 데 이어 지난 2월에는 고갱의 ‘언제 결혼하니’를 미술품 거래 역사상 최고가인 3억달러에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5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의 최고가 기록을 다시 세운 피카소의 ‘알제리의 여인들’ 역시 카타르 전 총리가 구입했다 하니, 미술계의 카타르 파워를 알 만하다. 중국 부호들은 초창기에 자국의 골동품과 서화에 주로 관심을 보였다면 이제는 서구 현대미술에도 눈을 돌려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2014년 TEFAF 미술 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미술 시장에서 중국은 미국(39%)에 이어 영국과 공동으로 각각 전체 거래량의 22%씩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밀레니얼 세대와 디지털 파워

큰손들이 초우량주에 입이 떡 벌어지는 금액을 투자하는 경향 탓에 미술 시장은 특정 작품에만 돈이 쏠리고 가격이 오르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지배한다. 하지만 모든 걸 숫자로만 설명할 수는 없는 법. 그 이면에는 투자만이 목적이 아니라 즐기기도 하려는 미술 애호가들이 많아지고 있는 조짐이 보인다. 이를 주도하는 세력은 소비의 핵심 계층으로 부상 중인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 generation, 1980~2009년생)의 부자들과 고학력 중산층 등 젊은 애호가들이다. 미술계에서는 10만~2백만달러어치의 미술품을 사들이는 40세 이하의 젊은 세대를 의미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밀레니얼 컬렉터로 정의한다. 이들은 전통적인 컬렉터와 여러모로 다른 성향을 보인다. 구세대 컬렉터들이 세계적인 미술 잡지 <아트 포럼(Art Forum)>을 구독하고 미술 전문가 의 조언과 갤러리 전시를 통해 정보를 차곡차곡 모아 신중하게 작품을 구입한다면, 밀레니얼 컬렉터들은 요람에서부터 인터넷을 활용한 세대답게 아티스트나 갤러리 관계자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SNS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며 여러 경로를 통해 작품을 구매한다. ‘날것 그대로의 정보’ 수집에 능하며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품이면 장르나 배경을 따지지 않고 과감하게 구입한다. 작가나 컬렉터를 ‘팔로’하는 등 디지털 세대다운 모습을 보이지만 그렇다고 오프라인 활동을 소홀히 하지도 않는다. 아날로그 현장을 즐겨 찾고, 오프라인 인맥 쌓기에도 열심이다.
온라인 시장도 주목할 만하다. 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기준으로 세계 온라인 시장의 총 판매액은 세계 미술품 총 판매액의 6%에 해당하는 33억유로로 추정되는데, 짧은 역사를 감안하면 꽤 의미 있는 수치다(국내 대표 경매업체 서울옥션의 온라인 매출도 6% 대로 성장세다). 온라인 시장에서는 1천~5만달러대 작품들이 가장 활발하게 거래된다는 통계가 있다. 아직은 섣부른 감이 있지만 온라인 경매는 미술 시장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초보 컬렉터들에게 미술 시장으로 부담 없이 진입하는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트 페어 전성시대, Go Go Fairs!

미술품 거래의 중요한 채널이자 축제의 성격까지 갖춰가는 아트 페어의 위상은 갈수록 늠름해지고 있다. 2014년 기준 으로 해마다 세계 곳곳에서 적어도 1백80여 개의 주요 아트 페어가 열리는데, 특히 아트 바젤(Art Basel), 프리즈 (Frieze), 피악(FIAC) 등을 포함하는 상위 22위 아트 페어 에 다녀간 총 관람객은 무려 1백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2014년 미술 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아트 페어를 통해 거래되는 미술품은 전체 미술품 거래량의 40%를 차지한다. 그런데 작품 판매가 아트 페어 직후에도 페어에 다녀간 손님 들과 연락을 취해 이뤄지는 경우가 빈번한 현실을 고려할 때 심지어 이 수치는 과소평가됐다고 볼 수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과거 주요 아트 페어가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 에서 개최됐다면 요즘에는 아시아 아트 페어의 약진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지난해에는 전체 주요 아트 페어 중 약 12%가 아시아 지역에서 개최됐다. 특히 2008년 출범한 아트 홍콩의 경우, 당시 경기 침체기임에도 묵묵히 세계적인 갤러리를 유치하면서 내실을 쌓았고, 2013년 세계적인 아트 페어 브랜드인 아트 바젤 홍콩으로 거듭났다. 홍콩은 중국 자본까지 쉽게 유입 가능한 곳이라 아트 스폿으로 매력적이다. 또 1997년 홍콩 반환을 기점으로 중국 정부 차원에서 문화 정책에 역점을 둔 전략도 현재의 위세에 보탬이 됐다.

한국의 미술 시장을 생각한다

이러한 글로벌 풍경을 바라보다 한국에 눈을 돌리면 다소 소외된 느낌을 받는다. 아트 홍콩보다도 먼저 출범한 KIAF의 경우 최근 들어 ‘아트 바젤 홍콩’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그 위상이 약해졌다. 어포더블 아트 페어 같은 경우, 올해 한국 시장에 진출한 첫해에 14억원의 판매 실적을 올리면서 저변 확대의 가능성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한국 미술 시장의 전반적인 풍경은 안타까운 편이다. 그나마 최근 ‘단색화’ 작품들이 재조명되면서 해외 경매에서 탄력을 받는 등 시장에 훈풍이 불어오게 한 점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최근의 단색화 열풍은 2008년 세계 경제 위기 이후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미술 시장이 저평가됐던 작가들을 재조명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의 일환이라는 시각도 있다. 독일의 제로(Zero) 그룹이나 일본의 구타이 그룹 작가들에 대한 미술 시장의 관심도 비슷한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미 한국의 단색화는 페로탱이나 화이트 큐브 등 세계적인 화랑과 주류 경매 회사의 주목을 받으며 해외 컬렉터들의 관심을 끄는 데는 일단 성공한 듯 보인다. 다만 이 모든 과정이 너무 빨리 전개되는 바람에 단색화에 대한 심도 있는 학술적 논의가 충분하게 뒷받침되지 못한 상황에서 ‘가격 상승’이라는 시장의 관점만 강조되면서 때로는 ‘몰아가기’식 그루핑(grouping)이 이뤄진다는 점이 아쉽다.
하지만 단색화 열풍의 문제점에만 천착하기보다는 오랜만에 한국 미술계에 찾아온 긍정적인 에너지를 잘 지켜나가는 편이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전후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이 여전히 굳건하게 미술사에 중요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시장에서도 블루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작금의 위상은 당대의 딜러와 평론가, 자국 미술을 사랑하는 컬렉터와 후원자의 노력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니지 않은가. 좀 더 진지한 이론적 접근과 전략적 모색이 따른다면 단색화의 인기를 물꼬로 다른 가치 있는 한국 작가들도 국제 무대에서 제대로 된 관심과 평가를 받게 되지 않을까. 그러한 시너지를 목격하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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