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 보이지만 의미 있는 음용(飮用) 기술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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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4, 2018

글 고성연

기술이 없는 문화란 존재할까? 이에 대해 하르트무트 뵈메(Hartmut Bo··hme) 같은 학자는 문화(culture)의 라틴어 어원은 콜레레(colere)인데, 여기에는 ‘탁월한 기술적 감각’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이따금씩 기술 없는 유토피아를 상상하며 즐거워하는 존재이기도 하고, 기술(technology)이라는 용어 자체가 20세기 초에 접어들어서야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기술과 인간 존재는 떼려야 떼어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주장이다. 먹고 마시는 일상의 행위에도 기술은 그렇게 스며들었다. 알게 모르게 수많은 혁신이 존재해왔지만 최근 우리네 일상을 좀 더 풍요롭게 변화시켰을지도 모르는 음용(飮用) 기술의 미학을 살짝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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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이 극강의 화두인 오늘날, 인류를 ‘호모 파베르(Homo faber), 다시 말해 ‘도구의 인간’으로 지칭한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 대신 로봇이 총대 메고 모든 일을 척척 해내는 수준까지 굳이 가지 않더라도 우리네 삶에서 기술이나 도구 없는 환경을 상상하기는 힘들지 않은가. 이런 맥락에서 깊이 들어가면 “기술은 더 이상 미디어나 행정, 도시 문화처럼 기술과 독립적으로 발전한 사회의 하부 시스템이 아니라 사회의 상부구조와 같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맞닥뜨릴 수 있다. 기술이 문화에 끼치는 압도적인 영향력을 강조하는 기술결정론적 관점에 대해서는 언제나 논란이 있어왔지만 적어도 기술이 우리를 둘러싼 삶이나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관돼 있는 ‘삶의 방식’이라는 시각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20세기 초·중반에 맹렬히 활약한 스위스 태생의 위대한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집을 ‘살 수 있는 기계’로, 등받이 의자를 ‘앉을 수 있는 기계’로 불렀다고 한다. 요즈음 주방은 일종의 ‘카페처럼 쓸 수 있는 기계’로 명명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예전에도 상대적으로 훌륭한 주방은 있었다. 하지만 1백 년 전에만 해도 좋은 설비와 기계를 갖지 못한 세입자들은 3리터의 물을 전기 주전자로 끓이는 데 45분이나 걸리는 경우도 있었던 데 반해(당시로서는 그 자체가 ‘혁명적’이었을 테지만) 요즘은 커피 한 잔 정도를 위한 물이라면 1분이면 ‘뚝딱’이다. 심지어 온갖 종류의 커피를 다양한 추출 방식으로 얼마든지 집에서도 즐길 수 있는 ‘홈 카페’가 가능한 세상이다. 요 몇 년 새 한국인의 커피 사랑은 놀라울 정도다. 국제커피기구(ICO)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에서 세계 6위를 차지했으며 성장세만으로 보면 단연 ‘톱’이다. ‘커피 공화국’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카페가 곳곳에 널려 있지만 나만의 홈 카페를 추구하는 인구도 늘고 있다. 인스턴트가 아닌 ‘제대로 된’ 홈메이드 커피를 찾는 애호가층이 점점 두꺼워지고 있다는 얘기다. 괜찮은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을 갖추면 금전적인 부담도 줄여줄뿐더러 집 안에서의 여유를 느낄 수 있거니와 ‘가성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업용 에스프레소 머신의 크기를 줄이고 일종의 보급형으로 제작한 상품은 물론 사용법이 간단하고 보관이 쉬운 캡슐 커피 머신의 인기도 만만치 않다. 이렇다 보니 캡슐 커피의 대명사와 같은 브랜드 네스프레소(Nespresso)가 자사의 신기술을 적용한 시스템을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한국에 선보인 것도 놀랍지 않다. 바로 요즘 네스프레소 매장의 시음 코너를 더욱 분주하게 만든 ‘버츄오(Vertuo)’ 라인이다.

캡슐 커피의 혁신, ‘회전 추출’ 방식은 새로운 대세가 될 수 있을까?

버츄오 라인은 캡슐의 생김새부터 흥미롭다. 한쪽 면이 동그랗게 솟은 버츄오 캡슐의 가장자리를 보면 바코드 표시가 있어서다. 바코드는 그냥 ‘디자인’이 아니다. 실제로 캡슐을 넣고 버튼을 한 번 누르면 고유의 바코드를 자동으로 읽어 추출 시간, 온도, 커피 스타일, 심지어 추출 전 커피를 우려내는 프리웨팅(pre-wetting)까지 알아서 맞춰준다. 캡슐 종류는 23가지가 나와 있는데, 커피 스타일로 따지면 에스프레소(40ml)에서 더블 에스프레소(80ml), 그랑 룽고(150ml), 머그(230ml), 알토(414ml)까지 크게 5가지로 나뉜다. 기존 오리지널 라인에서는 리스트레토(25ml), 에스프레소(40ml), 룽고(110ml)로 추출한 커피를 누릴 수 있는 데 반해(지금도 기존 머신과 캡슐은 판매한다) 커피 스타일이 더 다양해진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바코드가 먼저 눈에 띄지만 버츄오의 진정한 변화는 사실 추출 방식이다. 흔히 알려진 고압 추출 방식이 아니라 회전 추출 방식을 개발해냈다. 이름하여 ‘센트리퓨전(Centrifusion™)’. 최대 7000rpm으로 돌아가는 초고속 회전 추출이 가능하다는 기술인데, 네스프레소에서는 원심력이 커피와 물을 균등하게 섞어 언뜻 육안으로 보기에 훨씬 풍부한 크레마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다.
커피 애호가들의 이목을 잡아끌 뿐만 아니라 업계 관계자들이 주시하고 있는 이 시도는 네스프레소가 커피의 역사를 만들어낸 네슬레를 모기업으로 두고 있기에 이루어지는 것 같다. 세계 최초로 인스턴트커피를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캡슐형 커피의 모태(1976년 네슬레의 연구자 에릭 파브르가 발명했다)이기도 한 브랜드가 바로 네슬레 아닌가. 특히 산소와 습기를 차단해 신선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캡슐 커피는 ‘홈 카페의 편리성’을 추구하는 애호가들에게는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임종명 바리스타는 “커피의 맛과 향은 공기와 부딪치는 순간 날아가게 마련인데, 캡슐에 담아 하나씩 소비할 수 있게 되자 인기를 끈 건 당연했다. 게다가 뜯어보니 커피 특성에 맞게 로스팅과 분쇄를 다 다르게 해놓았으니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12년 말 네스프레소의 캡슐 용기 디자인 특허 기간이 만료되면서 캡슐 커피 시장은 무한 경쟁 체제로 접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네스프레소는 한 차원 진화한 캡슐 커피 시스템을 외치면서 회전 추출과 바코드로 무장한 ‘버츄오’로 또 다른 승부수를 내놓은 것이다. 버츄오의 추출 시스템이 더 똑똑해졌기 때문에 사람의 ‘개입’ 여지가 전혀 없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카푸치노나 라테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더블 에스프레소나 에스프레소 캡슐을 택하고 우유를 더하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캡슐을 택하면 안 되는 건 아니다. 예컨대 그랑 룽고를 택해놓고 추출 시간을 머신이 자동 세팅한 것보다 짧게 가져가면서(버튼을 눌러 ‘끄면’ 된다) 나만의 레시피를 그려나가는 이들도 엄연히 존재한다(이 경우 기계는 ‘주인’의 선택을 기억하고 저장해둔다). 어쨌거나 혁신이 아무리 근사하게 보여도 그 운명은 맛을 비롯한 여러 동인에 좌우되기 마련인 법. 버츄오의 운명도 결국에는 소비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어떻게 하면 양조장에서 맥주를 만든 그 순간을 그대로 담을 수 있을까?

카테고리는 다르지만 ‘인기’라면 커피 못지않은 맥주로 눈을 돌려보자. 맥주 역시 집에서 즐길 때는 신선도가 ‘이슈’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품목이다. 맥주 하면 ‘생맥주’라는 단어가 연상되니 말이다. 생맥주의 맛을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는 철제나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의 둥그런 작은 통인 케그(keg)가 필수 품목으로 꼽힌다. 원래 맥주도 와인처럼 주로 목재 통에 담긴 적이 있었지만(이 경우 술맛이 변질되기도 하고, 효모로 인해 향이 나빠지기도 했다고) 20세기 중반이 넘어서자 맥주 제조업자들은 케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케그 안에 주입되는 이산화탄소(CO₂)는 산화를 막고 맥주를 따를 때 부드러운 거품을 만들어주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펍이나 바에서는 생맥주 추출을 위해 이산화탄소를 공급하는 용기를 구비하고 빈 철제 케그를 맥주 회사로 반환해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맥주 업체들은 케그 시스템을 한 차원 진화시키고 있다. 하이네켄은 양조장에서 생산한 이후 소비자의 잔에 따르기 전까지의 모든 과정 중에 공기든 압축가스든 어떠한 외부 불순물도 맥주와 직접 접촉할 수 없도록 고안한 ‘브루락(Brewlock System)’을 내놓았다. 기존 생맥주 시스템은 맥주를 밀어 올리기 위해 CO₂를 업장에서 주입했지만, 케그 내부의 맥주 주머니 주변에 공기를 밀어 넣어 맥주가 자연스럽게 추출되도록 한 것이 브루락 시스템의 핵심이다. 100% 재활용 소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일회용 케그는 다 쓰면 분리수거 하면 된다. 덴마크에서 탄생한 맥주 브랜드 칼스버그의 ‘드래프트마스터 플렉스 20’ 역시 편리성과 친환경을 더한 생맥주 시스템이다. 재생 가능한 플라스틱 재질의 페트 케그를 사용하며 별도의 CO₂ 용기가 필요 없는 방식이라 양조장에서 담긴 맥주를 외부 접촉 없이 보관하고 추출할 수 있다. 사실 생맥주의 톡 쏘는 신선함은 업장이 아니라 야외에서도 가능한 작은 호사다. ‘최초의 휴대용 프리미엄 라거 생맥주’를 표방하는 하이네켄의 ‘드래프트 케그(Draught Keg)’는 그 대표적인 예. 하이네켄 브랜드를 상징하는 빨간 별이 박힌 5리터짜리 통통한 용기에 튜브를 장착하고 상단의 미니탭 버튼을 누르면 맥주가 나오는 제품으로, 개봉 후에도 30일 동안 신선한 맥주를 맛볼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음용 전에 4~7℃ 로 약 10시간에 걸쳐 미리 냉장시켜놓아야 한다). 전 세계 99개국에서 특허를 받았다는 케그 내부에 장착한 카르보네이터 압력 장치로 CO₂를 배출해 일정한 압력을 유지하는 방식 덕분이다. 한번 구비해놓으면 집에서도 청량한 맥주를 비교적 장기간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캠핑이나 소풍 등을 떠난 경우에도 신선한 드래프트 맥주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야외 활동을 좋아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지닌 이들에게는 꽤 인기가 높다. 별것 아닌 듯하지만 맥주 애호가들에게는 귀와 혀가 솔깃한 혁신이 아닐 수 없다.

샴페인의 역사를 ‘맑고 투명하게’ 다시 쓴 여장부, 마담 클리코

겉으로 확 드러나는 기술은 아니지만 제품의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만든 ‘은근한’ 혁신도 있다. 지난 수년간 꾸준한 성장을 이뤄온 샴페인 세계에서도 그런 예가 있다. 진한 노란색으로 유명한 프리미엄 샴페인 브랜드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 최초로 기록된 ‘빈티지 샴페인’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로제 샴페인을 상업화한 것으로 알려진 이 브랜드는 여러모로 기술 혁신의 자취를 뽐내는데, 그중 하나가 1816년 발명한 리들링 테이블(riddling table)이다. 샴페인은 병 안에서 2차 발효를 통해 생성되는데, 이때 기포만 생기는 게 아니라 효모 찌꺼기도 고인다. 이 찌꺼기로 인해 샴페인은 탁해지고 맛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그래서 리들링 테이블이 쓰이기 이전에 샴페인은 찌꺼기를 걸러내기 위해 디캔터를 필요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뵈브 클리코의 원류인 퐁사르댕(Ponsardin) 가문 출신의 미망인 마담 클리코는 “우리의 샴페인은 미각과 시각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면서 테이블에 구멍을 낸 뒤 2차 발효 중인 샴페인 병을 거꾸로 놓아둠으로써 찌꺼기가 병목으로 모이도록 해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해냈다. 덕분에 뿌연 빛깔이었던 샴페인을 크리스털처럼 맑고 투명하게 만들 수 있었고, 이 기법은 샹파뉴 지방 전역에 퍼지면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한 샴페인 전문가는 “효모가 샴페인 특유의 토스티(toasty)한 특성을 부여하는데, 너무 오랫동안 맞닿아 있었다면 신선함의 균형이 깨지게 마련이다. 이 찌꺼기를 제거함으로써 샴페인이 맑아지고 우유처럼 무거운 느낌이 가셨고, 결국 시각, 미각, 촉각에 긍정적인 영향을 다 불러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샴페인 하우스에서는 이 위대한 발명을 이룬 미망인 클리코를 기려 브랜드명을 ‘뵈브 클리코(Veuve는 프랑스어로 미망인이라는 뜻)’라 짓고 그녀를 ‘라 그랑드 담(La Grande Dame, 위대한 여인)’이라고 부르게 됐다.
흥미롭게도 같은 19세기에 샴페인 업계에서는 또 다른 미망인이 의미 있는 혁신을 일궈냈다. 주로 달콤하던 샴페인 세계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킨 마담 포므리(Pommery)다. 포므리 여사는 영국 여행을 하다가 당시 상류사회 사람들 중에 샴페인의 단맛에 질린 이들이 많다는 점을 알아내고 1874년에 드라이한 프리미엄 샴페인을 최초로 내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널리 통용되는 ‘브뤼(Brut)’ 스타일이다.
크고 작은 시도를 통해 음용 문화의 환경을 개선하고 맛을 발전시킨 개척자들의 스토리에는 시대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기술 혁신’이 들어 있다. 도구와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미각이 점점 더 진화할 수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놀랍도록 섬세하고 유연한 미각이 기술의 진화를 이끌기도 한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작은 차이와 불편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남다른 관찰력과 창의성이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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