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에 가장 화제가 된 작가 2명을 꼽는다면 매머드급 조각의 향연을 벌인 미술계 슈퍼스타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와 독일 국가관을 맡아 황금사자상을 받은 안네 임호프(Anne Imhof)가 아닐까 싶다. 독일관 수상작은 ‘파우스트(Faust)’. 괴테의 희곡과 동명의 타이틀이지만 작품 내용과는 관련 없는, 독일어로 ‘주먹(faust)’이라는 뜻의 작품이다. 숱한 관람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안네 임호프를 만나러 프랑크푸르트를 찾았다.
이탈리아의 수상 도시 베니스는 ‘제발 그만 좀 와달라’고 주민들이 하소연을 쏟아낼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인기가 너무 많아 괴로운 도시다. 항시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데다 물길과 좁은 골목 때문에 몹시 느리고 힘든 행보를 기꺼이 감수하면서도 다시 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베니스를 계속 찾게 만드는 매력의 동인으로 1세기 넘는 역사를 지닌 비엔날레를 꼽는 이들도 많다(홀수 해에는 현대미술전인 아트 비엔날레가, 짝수 해에는 건축 비엔날레가 열린다). 물론 베니스 비엔날레를 떠받치는 하나의 큰 축인 자르디니(Giardini)가 한국, 프랑스, 일본 등 국가관이 전용관을 두고 저마다 자웅을 겨루는 구도인 탓에 “예술이 무슨 올림픽 종목이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그래도 세월과 함께 여문 풍부한 녹음(자르디니는 실제로 ‘정원’이란 뜻이다) 속에 자리 잡은 전시 터 자체가 ‘예술’이기에, 또 가끔은 인상이 길게 남거나 강렬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나게 되는지라 굳이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찾게 되는 듯하다. 그런 맥락에서 지난해 여름의 방문은 꽤 의미 있었다. ‘베니스의 그녀’를 만나는 계기가 됐으니 말이다. 초반부터 엄청난 화제몰이를 했을 뿐 아니라 언론에서 ‘센세이션’이라는 수식어를 동원할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킨 독일 국가관을 맡아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품에 안은 1978년생 작가 안네 임호프(Anne Imhof)가 바로 그녀다.
2017 베니스 비엔날레가 낳은 스타, 황금사자상 거머쥔 ‘파우스트’로 세계의 주목을 받다
사실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은 황금사자상 발표가 나기 전에도 이미 ‘인기상’은 거머쥔 거나 다름없었다. 이 거대한 다국적 축제가 시작된 5월 초 프리뷰 기간부터, 매일 아침 똬리를 틀 정도로 길게 줄지어 기다리는 관람객들 때문에 입장하는 데만 1시간 넘게 소요되는 일이 다반사였으니까. 필자는 8월 중순께 갔는데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사실 당시 베니스에 간 주목적은 다른 데 있었던 터라 몹시 빡빡한 일정에도 긴 줄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누군가의 강력한 추천이었다. 건축, 미술, 오페라 등 다방면에 박식하고 취향도 확고한 패션 디자이너 릭 오웬스(Rick Owens)가 “이번 비엔날레 기간에 꼭 보라고 당부하고 싶은 2개의 전시 중 하나”라고 한 것이 바로 안네 임호프의 ‘파우스트(Faust)’였다. 베니스 본섬 끝자락에 있는 자르디니와 그리 멀지 않은 리도섬에서 여름을 보내던 릭 오웬스는 자주 나다니는 성향이 전혀 아니지만, 비엔날레 같은 문화 예술 행사는 은근히 티 안 내고 잘 챙겨 보는 편인데, ‘파우스트’를 언급하면서 주저 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실제로 접한 ‘파우스트’는 묘하게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나치 정권의 주도 아래 재건된 만큼 히틀러의 욕망이 반영된 듯한 천장 높은 전시장은 철제 프레임과 투명한 유리로 덮인 바닥 덕분에 발아래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어 긴장감을 주었다. 전시장 밖에는 저도 모르게 흠칫 물러서게 만드는 검은색 도베르만 몇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윽고 배우들이 나타났다. 캣워크를 걷는 좀비 콘셉트의 모델처럼 걷기도 하고, 지붕 위, 벽에 박힌 선반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기도 하고, 머리를 벽면에 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기도 했다(호스의 물을 뿌리거나 자위를 하거나 생닭의 날개를 뜯어내는 등의 연출도 있다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다). 이렇듯 공간 구석구석에서 불쑥불쑥 등장하는 배우들은 공통적으로 검은색 옷차림에 무표정한 듯, 혹은 노려보는 듯 종잡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때로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듯한 음악이 공간을 감싸기도 했다. 이 속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퍼포먼스는 권력과 자본이 판치는, 발가벗겨진 듯 모든 게 노출되지만 단절은 더 심해지는 불안과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절박한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다. 시간의 제약으로 축약된 버전의 일부만 봤을 뿐이지만(‘오리지널 버전’은 장장 5시간이다) 공간이 뿜어내는 강한 에너지와 출연진의 눈빛만으로도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누군가는 사회성 짙은 독일 울리 에델 감독의 영화 <크리스타아네 F.(Christiane F.)>의 한 장면, 누군가는 S&M 극 무대가 떠오른다고도 한다. 확실한 건 음울한, 하지만 어딘지 아름다운 구석이 있는 잔혹극이라는 점(‘잔혹 오페라’의 대명사로 꼽히는 <살로메>를 사랑하는 릭 오웬스가 왜 칭찬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살짝 멍해진 듯, 생각에 빠지면서 전시장을 나가게 된다는 점이었다. 알랭 바디우 같은 철학자는 관객이 극장에 오는 건 교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연극 이념이 주는 ‘충격을 받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아마도 이런 경험을 말하는 것일까.
프랑크푸르트의 ‘그녀’를 만나러 가다
어쨌거나 그녀가 궁금해졌다. 축약된 버전의 일부만 봤을 뿐이지만 라이브 퍼포먼스, 그림, 조각 등이 어우러진 그 공간의 강렬한 에너지를 만들어낸 크리에이터는 어떤 사람인지. 베니스 비엔날레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스타가 된 안네 임호프는 베를린, 뉴욕 등을 오가면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고향 기센(Giessen)에서 멀지 않은 프랑크푸르트의 스튜디오를 주 무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마침 그녀는 ‘파우스트’의 LP 앨범 작업을 막 끝냈다고 했다. “A, B, C, D면이 있는 더블 앨범인데, D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10분 분량을 온전히 담고 있어요. 맨 끝이 계속 반복되는 ‘엔들리스 루프’ 방식이에요. 절규하는 듯한 소리가 나왔다 사라졌다 하는 식이지요.” LP에서 이런 방식이 가능한지 몰랐다면서 설명하는 그녀는 멋지지 않냐면서 해맑게 웃었다. 사실 필자는 꽤 냉철하고 이지적인, 속을 잘 모를 듯한 이미지를 미리 연상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네 임호프는 조금은 수줍고 여린, 그러면서도 꽤 밝고 솔직해 보였다. 릭 오웬스가 찬사를 보냈다는 얘기에 “와, 정말인가요”라면서 아주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유명세에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비난도 따르는 법인데, ‘파우스트’를 비롯해 그녀를 ‘주목해야 할 아티스트’로 처음 널리 인정받게 만든 ‘Angst’ 시리즈(2016) 등 그녀의 작품을 영상으로 접한 이들 중에는 ‘악플’을 다는 이들도 많다. 특히 ‘파우스트’의 대대적인 성공 뒤에는 건설적인 비판이라기보다는 무조건적인 비난도 많이 쏟아졌다. “일부러 소셜 미디어를 멀리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일할 때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해요. 하지만 그(작품) 안에 있는 ‘좋은 것’도 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때로는 악의적인 반응에 신경 쓰느냐고 묻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는 듯 미소 지으면서 “그렇지만 작업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정말로 소중하다”면서 자신이 행운아라고 말했다.
안네 임호프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명성이 진정한 ‘협업’의 소산임을 거듭 강조하면서 팀 동료들과 주고받는 영감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럭셔리’라고 했다. 그녀에게는 주로 음악을 담당하는 빌리 불틸(Billy Bultheel), 안무가 강점인 프란치스카 아이그너(Franziska Aigner), 자신의 뮤즈이자 파트너로 음악과 퍼포먼스 등을 맡고 있는 엘리자 더글러스(Eliza Douglas) 등 대부분 친구와 지인으로 이뤄진, 단단한 유대를 지닌 팀이 있다(‘파우스트’에서는 큐레이터 수잔 페퍼(Susanne Pfeffer)를 비롯한 또 다른 걸출한 협업진도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알던 친구들 위주로 뭉쳤는데, 제 팀이 함께한 지는 5년 정도 됐어요. 우리에게는 각자 강점에 따른 역할이 있지만(엘리자는 그림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는 아티스트이자 발렌시아가 무대에 서는 슈퍼 모델로도 활약하고 있다) 특히 주요 멤버인 4명은 최근에는 음악 작업은 거의 다 참여하고 있어요. 저는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고, 독학한 경우지만요.” 놀라운 점은 사실 그녀는 초반에는 모든 걸 혼자 했다는 사실이다. 학교(Sta··delschule)에 다닐 때도 좀처럼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아 몇몇 친구는 마지막 졸업 작품전에서 처음 인사를 나눴을 정도라고. “제가 부끄러움을 좀 타기도 했고, 학생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하기도 했고, 또 원래 집에서 혼자 작업을 해온 탓이기도 했어요. 예술 학교에 지원한 것이 20대 후반이었거든요.”
그 누구의 ‘무엇’이 아닌 그냥 아티스트
알고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원래는 사진을 배우는 학교에 다녔는데, 10대 후반에 미혼모가 됐고, 혼자서 딸을 키우면서 생계를 유지하느라(클럽에서 일했다) 정신없이 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도 하고, 아이도 키우는 순탄하지 않은 시기였죠. 그런 와중에도 정말 미친 듯이 작업을 했어요. 하지만 학교에서 다시 공부하기 전까지는 작업을 집에서 혼자 했기 때문에 누구도 제 작품을 보지 못했고, 전 정말이지 절박했죠.” 때때로 이런 성장 스토리가 자신을 오롯이 아티스트로서 바라보는 시선을 왜곡시킬 수도 있기에 조심스럽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에 빛나는 영예에도 누군가는 흔히 붙이는 ‘퀴어 작가’라는 수식어. 그것 말고도 그녀에게는 ‘싱글맘’이라는 멍에가 있었다. 삶의 큰 부분이자 소중한 딸이기에 정작 자신은 멍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남들과 다른 굴곡을 겪은 여성 아티스트에게 유독 주홍 글씨처럼 ‘딱지’가 많이 붙는다. 심지어 ‘여성’이나 ‘엄마’라는 딱지도 쓸데없는 수식어 아닌가. 안네 임호프의 말대로 그녀는 자신의 팀 동료들과 함께하는 작품을 설명할 때 가장 행복해 보이는 “그저 좋은 작가일 뿐”인데 말이다. 그 모든 것에도, 작가로서의 인정, 돈독한 창조적 팀워크, 가정, 파트너 등 자신의 성을 잘 쌓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문득 그녀가 줄곧 다뤄온, 그리고 우리 대다수가 고민하는 ‘불안(angst)’이라는 감정은,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조금쯤 다른 의미로 다가올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음, 좋은 질문이네요.” 그녀는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확실히 ‘파우스트’ 때문에 바뀐 건 있어요. 어른 입장에서도 급격한 변화였고, 성장이었죠. 하지만 이제는 부모라는 존재 없이도 ‘그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물론 우리 부모님을 사랑하는 건 틀림없지만요.(웃음)”
지난해 열린 57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각국의 국가관이 자웅을 겨뤄 ‘현대미술 올림픽’이라 불리는 자르디니 전시에서 ‘파우스트(Faust)’라는 작품으로 황금사자상을 받은 안네 임호프(Anne Imhof). Photo by Nadine Fraczkowski. 비엔날레 총감독이 지휘하는 아르세날레 기획전에 참여하는 작가에 돌아가는 황금사자상 역시 독일 작가인 프란츠 에르하르트 발터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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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 임호프, ‘Ropedancer’(2016), ink on paper, 35.7X26.7cm. Courtesy: the artist, Galerie Buchholz, Berlin/Cologne/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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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을 수놓은 <파우스트> 공연 현장. Photo by SY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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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에 몰두하는 안네 임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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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 임호프, ‘Untitled’(2016), oil, acrylic, felt tip pen, gouache on primed canvas, 140X100X2cm. Courtesy: the artist, Galerie Buchholz, Berlin/Cologne/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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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퍼포먼스 장면. Photo by Nadine Fraczkowski. Courtesy: German Pavilion 2017,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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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공연, 설치, 조각, 페인팅 등이 어우러진 ‘파우스트’를 선보인 독일 국가관 건물 외관. Photo by Ugo Carmeni, Courtesy: German Pavilion 2017,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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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퍼포먼스 장면. Photo by Nadine Fraczkowski. Courtesy: German Pavilion 2017, the artist. |
2016년 베를린의 현대미술관 함부르크 반호프(Hamburger Bahnhof)에서 공연된 ‘Angst II’ . Photo by Nadine Fraczkowski. Courtesy: the artist, Galerie Buchholz, Cologne/Berlin/New York. |
2013년 퍼포먼스 작품 ‘Parade’ 중 ‘Aqua Leo, 1st of at Least Two’, Photo by Nadine Fraczkowski. Courtesy: the artist, Portikus, Frankfur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