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니스 리트리트’ 문화를 이끄는 체험의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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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05, 2025

글·고성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돌아보기!’ 요즘 웰니스 산업을 거론할 때 자주 등장하는 ‘리트리트(retreat)’는 라틴어 레트라헤레(retrahere)에서 유래한 단어로, ‘re(back)+ trahere(pull)=잠시 물러나본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초기에는 종교적 자기 성찰을 위한 은둔의 장소, 혹은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들을 위한 시설 등을 의미했지만, 점차 심신의 휴식과 치유를 위한 개념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오늘날의 상품화된 ‘웰니스 리트리트’는 처음에는 다이어트나 미용을 목적으로 하는 스파의 파생 상품처럼 쓰이다가 건강하고 긍정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가져보려는 이들을 위한 다양한 경험과 서비스를 아우르는 원스톱 서비스 공간으로 진화했다고 한다(<웰니스에 관한 거의 모든 것>). 사이버 세계에 매몰된 일상에서 잠시마나 사회적 가면을 벗어내고 스스로를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과 자아를 위한 순도 높은 경험을 누릴 수 있는 기회, 그 생태계를 둘러싼 행보가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철저한 가공과 순수한 시간성이 지배하는 네트워크 세계에서 지리는 더욱 각별한 뜻을 가진다. … 가장 깊은 인간의 교류는 언제나 지리적 공간에서 일어난다.
_제레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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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명한 학자이자 작가인 제레미 리프킨이 25년 전 발표해 지금까지도 자주 회자되는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소유의 종말〉. 물론 저자는 ‘재산의 소유’가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 게 아니라 시장이 네트워크에 자리를 내주며 재산을 장악한 공급자가 이를 빌려주거나 사용료를 물리는 ‘접속 체제’로 바뀌고 있음을 설파했다. 이 책의 원제도 , 그러니까 ‘접속의 시대’다. 리프킨은 ‘접속’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문화적 체험을 파는 사업이 각광받을 것이라며 앨빈 토플러 같은 출중한 미래학자가 일찍이 우리 사회에서 생산하게 될 ‘가장 일시적이면서도 가장 지속적인 상품’으로 ‘인간의 체험’을 꼽았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체험 경제’의 선봉장으로 관광산업을 지목하면서 19세기 중반 최초의 ‘유럽 대유람’ 상품을 기획하는 등 문화 체험을 정액제의 패키지 상품으로 개발한 영국의 기업가 토머스 쿡이야말로 체험 자본주의를 최초로 도입한 획기적인 실천가였다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 최장수 여행사였던 토머스 쿡 역시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구성의 상품 기획으로 결국은 파산에 이르렀고(2019년), 이듬해 리조트 브랜드 클럽 메드의 소유주인 중국 포선 그룹에 인수됐다. 이 배경에는 제임스 길모어 & 조지프 파인 2세 같은 경영 컨설턴트들이 ‘체험 경제’ 시대의 요건으로 누누이 강조했던 ‘잊지 못할’, ‘추억할 만한 감정’을 영민하게 기획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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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니스는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다!
‘접속’과 ‘구독’으로 점철된 오늘날의 일상에서 우리 대다수는 직접 맞닥뜨리기보다 기술을 통해 ‘매개된’, 그리고 ‘가장된’ 경험에 익숙해지고, 끌리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경험의 멸종’이라는 강력한 문구를 들고 나오기도 한다. 공학과 기계,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네트워크 사회에서 ‘접속’에 빠져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기는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에 집중할 수 있는 순도 높은 경험을 소망하고 갈구하는 수요가 여전히 존재한다. 아니, 외려 ‘진정한 체험’에 대한 욕구는 더 강렬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웰니스 산업의 성장세에서도 명징하게 나타난다. 글로벌 웰니스 산업의 규모는 팬데믹 기간 살짝 꺾였다가 다시금 상향 곡선을 그리며 2022년 5조6천억 달러를 기록했고, 오는 2027년께는 8조5천억 달러로 확대될 전망이다(글로벌 웰니스 인스티튜트 조사). 특히 럭셔리 시장에서는 눈에 띄는 활기가 느껴진다. 세계 럭셔리 시장을 분석한 베인 & 컴퍼니 보고서를 보면 이 분야의 소비 추이는 핸드백 같은 제품보다 크루즈 여행이나 미식 같은 경험(luxury experiences), 그리고 프라이빗 제트, 요트, 미술품 등 경험 기반의 상품으로 무게중심이 움직이고 있음이 수치로도 드러난다. 럭셔리 경험 부문의 성장률이 2023년 두 자리 수(15%)를 기록했으며(제품 부문의 성장률은 3%), 장기적 전망도 밝다. 심지어 웰니스를 지향하는 여행자들은 대체로 더 오래 머물고 더 상급의 숙박 시설을 택하며 지갑을 더 잘 연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웰니스는 더 이상 단순한 트렌드가 아닙니다. 산업을 재편하는 대대적인 움직임이죠.” 스위스의 명문인 로잔 호텔 경영대학(EHL)에서 펴내는 ‘EHL 인사이트’의 비앙카 루티(Bianca Lüthy)가 강조하듯 ‘산업’으로서 웰니스의 미래는 장밋빛이다. 물론 웰니스 상품, 서비스, 여행을 둘러싼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으므로 ‘블루오션’ 생태계라고 낙관할 수는 없고, 제레미 리프킨도 일찌감치 지적했듯 진정한 체험 그 자체라기보다 ‘체험의 모방’에 가까운 문화적 상품으로 융합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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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문화 체험, 고독 속 평안, 무위의 경험에 이르기까지
그렇다면 단순히 보고, 먹고, 찾고, 마시는 여행에서 벗어나 ‘진정한 쉼표’를 키워드로 내세우는 웰니스 여행 프로그램은 어떻게 꾸려지고 있을까?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으로는 템플 스테이를 들 수 있겠다. ‘마음 챙김’ 구루를 만날 수 있는 명상 마을 같은 전문적인 리트리트도 지구촌 곳곳에 존재하지만 한국인들은 담백한 음식에 명상, 다도 등의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는 템플 스테이는 월정사 ‘옴뷔’처럼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찾아볼 수 있다(다만 템플 스테이는 웰니스 리트리트의 꽃인 스파 프로그램이 아쉬울 수 있다). 일본 건축가 반 시게루가 설계한 아와지시마의 명상 센터 젠보 세이네이는 삼나무 향 가득한 친환경적 공간이 인상적인데, ‘발효 왕자’라고 불리는 후시키 노부아키가 감수해 개발한 설탕, 기름, 유제품, 밀가루를 일절 배제한 선방 요리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번아웃 상태거나 트라우마 치료 같은 강도 높은 돌봄을 필요로 한다면 의사, 영양사, 테라피스트 등 전문가의 세심한 프로그램이 마련된 인스튜티트, 전문적인 웰니스 시설도 있다. 물론 상당수 호텔이나 리조트에서 웰니스를 접목한 프로그램을 꾸리고 있고, 그 콘텐츠의 다채로움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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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니스 리트리트’라는 단어가 입에 붙지 않았던 시절인 1980년대부터 ‘고요함’을 내세우며 외딴섬이나 깊은 산속, 또는 사막 등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대자연을 벗하는 안식처 개념의 리조트를 열었던 개척자 아만(Aman)이나 료칸 집안의 DNA와 일본 전통을 현대적으로 잘 버무린 호시노야 같은 브랜드는 대중적인 ‘럭셔리 힐링 스테이’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아만의 경우, 도심형 호텔인 아만 뉴욕과 아만 나이러트 방콕에 전문가를 대동한 메디컬 스파를 두고 있기도 하다. 대다수의 웰니스 호텔들은 명상, 요가, 디지털 디톡스, 문화, 예술, 건강한 미식 등 다양한 문화 요소를 융합적으로 접목한 ‘컬처 리트리트’를 지향한다. 사실 타지에서 낯선 이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꽤 고단함을 동반한 여정임을 감안할 때, 여행길에 오른 이들은 대체로 평화로움을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극도의 고적함을 원하지는 않기에, 자연스러운 몰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경험의 스펙트럼을 갖춰놓는 것이다. 여행이 문화 체험을 내세운 상품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인간이 보여주는 미소와 손길, 그리고 예술이 선사하는 창조성에서 위로와 기쁨을 받지 않는가.
소박하고 따뜻한 환대로 정겨움이 느껴지지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 럭셔리인 아만, 호시노야 같은 곳과 달리 오롯이 ‘홀로움’에 초점을 맞춰 설계된 부티크형 호텔도 점점 눈에 많이 띈다. 필자가 지난해 말 방문한 스페인 아라곤 지역의 솔로 하우스(Solo Houses)는 그야말로 인적 없는 외진 산속에 솟아 있는 독채 별장인데(단기 임대 가능하다), 쟁쟁한 건축가들이 저마다의 창의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프로젝트의 소산으로 여전히 진행형이다(15개의 건축 스튜디오가 참여하는데, 현재는 2채가 들어서 있다). 갤러리 오너들이 운영하는데도 내부에 흔한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은 미니멀한 분위기이고, 최소한의 서비스 인력만 ‘거의 안 보이게’ 있다. 혹여 동반인이 있더라도 저마다 독립적인 공간을 누릴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된 데다 마침 인터넷 연결 신호도 약한 터라 ‘심심함 속 힐링’을 노려봄직하다. 철학자 한병철이 주장했듯 ‘무위는 정신적 금식’이고 ‘금식은 치유’라는 공식, 그리하여 삶의 생동성과 찬란함을 돌려준다는 얘기에 동감하는 여행자라면 안성맞춤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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