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ni Marqu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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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01, 2014

에디터 고성연 (바르셀로나 현지 취재)

가스통 바슐라르의 저서 <꿈꿀 권리>를 보면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예술가 에두아르도 칠리다는 쇠의 존재를 꿰뚫고 싶어 끌과 나무망치가 아닌 쇠망치를 집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대장장이처럼. 바르셀로나 출신의 디자이너 나니 마르키나는 양탄자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장인들과 함께 실을 엮고 베틀 짜기를 배웠다. 그녀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깔개를 거의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데는 그런 섬세하면서도 저돌적일 정도로 강한 열정이 뒷받침됐을 것이다. 가녀린 체구로 작은 브랜드를 이끌며 지구촌을 누비는 나니 마르키나의 ‘무용담’을 그녀의 고향을 찾아가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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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들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는 창조 도시로 손꼽히는 바르셀로나.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카탈루냐 지방의 주도인 이 도시는 잘 알려졌다시피 그 유명한 19세기의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활약했던 무대다. 카사밀라, 카사바트요 같은 건축 작품이 황홀하게 늘어서 있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길거리의 벤치와 가로등까지도 가우디의 손길이 닿았다는 그라시아 거리(Passeig de Gracia). 화려하게 펼쳐진 이 예술적인 대로에서 발걸음을 살짝 옮기면 은근히 눈길을 끄는 풍요로운 공간을 발견할 수 있다. 유리창 안, 현대 조각의 거장으로 불리는 스페인 조각가이자 판화가인 에두아르도 칠리다의 이름이 적힌 직사각형 팻말이 서 있는데, 이것만 보자면 언뜻 갤러리처럼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못 이색적인 인테리어가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칠리다 팻말 뒤의 벽을 우아하게 장식한 아름다운 미색 양탄자를 비롯해 형형색색의 카펫이 공간을 온통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현대미술 작품을 연상케 하듯 자못 ‘컨템퍼러리’ 색채가 묻어난다. 이곳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바르셀로나 출신 러그(rug) 디자이너 나니 마르키나(Nani Marquina)의 쇼룸이다.
양탄자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혁신 브랜드
부모한테 물려받은,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딴 양탄자 브랜드 나니 마르키나는 올해로 탄생한 지 27년 된 가족 경영 디자인 회사다. 규모 자체는 크지 않지만 오라만큼은 카탈로그만 슬쩍 들춰봐도 남부럽지 않은 위용을 자랑한다. 패브릭의 미학을 살리며 칠리다의 추상적인 작업을 평면에 아름답게 펼쳐놓은 작품을 위시해 얼마 전 한국에서도 성황리에 전시회를 개최한 바르셀로나의 스타 크리에이터 하비에르 마리스칼,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가구 디자이너 토르트 본체 같은 내로라 하는 작가들과 손잡고 빚어낸 다채로운 디자인의 러그들. 조약돌을 줄지어놓은 듯한 담백한 모양새, 탐스러운 꽃잎을 흩뿌려놓은 듯한 폭신한 느낌, 아프리카나 인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실험적인 분위기. 게다가 보온성과 통기성이 우수한 뉴질랜드 울, 면, 황마 같은 천연 소재와 솜씨 좋은 장인들의 수공예 기술이 만나 궁극의 조화를 이룬 질감과 색감. 이 정도면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지만 선뜻 밟기 황송할 정도로 부담스럽지는 않다. 바르셀로나 특유의 햇살처럼 포근하고 친근하게 다가선다. 세련미 넘치지만 대부분 숙련된 장인들이 ‘핸드메이드’로 만들어서인지 차갑고 기계적인 느낌은 묻어나지 않는다. 이 브랜드에서 제작하는 명품 양탄자의 8할가량이 해외로 수출된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커피를 홀짝이며 마케팅 담당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약속 시간보다 살짝 늦게 도착한 나니가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왔다. 그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3년 전쯤,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에서였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디자이너 듀오 로낭 & 에르완 부룰렉 형제의 작품이 나니 마르키나 부스에 전시된 걸 보고는 단번에 반했다. 보풀 없이 평평하게 짜는 ‘킬림(Kilim)’이란 기법으로 하나를 만드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린다는 마름모꼴 무늬의 양탄자 ‘로산주(Losanges, 마름모꼴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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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 디자이너들과의 컬래버레이션이 빚어낸 풍부함
그러고 보니 13가지 색상의 조합이 강렬한 원작의 뒤를 이어 블랙 & 화이트, 레드 계열 등으로 다양하게 선보인 로산주의 후속 버전들이 나니 마르키나의 바르셀로나 쇼룸에 전시돼 있었다. 그녀는 파키스탄의 장인들이 직접 이 근사한 마름모꼴을 엮어내기 위해 한 올 한 올 공들이는 모습을 비디오로 보여주며 설명했다. “원래 부룰렉 형제는 유명한 스위스 가구업체에 이 디자인을 먼저 가져갔어요. 그런데 우리 브랜드가 그들이 원하는 느낌의 디자인을 더 잘 구현해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신기한 건 우리가 서로에게 거의 동시에 연락을 취했다는 사실이에요.” 운명적인 파트너십은 그렇게 생성됐고, 프로젝트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현재 나니 마르키나와 부룰렉 듀오는 아프가니스탄을 무대로 또 다른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나니 마르키나는 자신도 다수의 히트작을 낳은 스타 디자이너이지만 이처럼 젊은 인재나 탁월한 대가들과의 실험적인 협업으로도 유명하다. 아리아드나 미겔이란 디자이너와 함께 자전거 폐타이어를 재활용해 만들어낸 업사이클링 양탄자 ‘비시클레타(Bicicleta, 2004)나 예쁘장한 꽃잎 모양의 직물 조각을 일일이 손으로 엮어냈다는 ‘리틀 필드 오브 플라워스(Little Field of Flowers, 토르트 본체의 2006년 디자인)’, 빙하 위에 위태롭게 선 백곰으로 지구온난화를 경고하는 ‘글로벌 워밍(Global Warming, 2008)’ 같은 작품을 예로 들 수 있다. “토르트 본체는 나니 마르키나라는 브랜드와 인연을 맺은 최초의 해외 스타 디자이너였는데, 꽃을 소재로 한 작업으로 알려졌지요. 우리는 꽃이 러그에 뭔가 괜찮은 작용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꽃무늬를 그려 넣는 기존 방식과는 다르게요.” 원래 산업 디자인을 전공했다는 나니는 어쩌다 이처럼 탁자나 그릇, 혹은 커피 포트가 아닌 양탄자의 차별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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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선구자의 딸, 바르셀로나의 새 물결에 동참하다
그녀의 디자인 뿌리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아버지 라파엘 마르키나에게 있다. 건축가이자 조각가, 디자이너였던 그는 스페인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생활의 디자인’으로 기억되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어린 시절 오일을 따르다가 항상 흘리던 기억에 착안해 ‘흘림 방지’ 기능을 장착한 투명한 양념통을 디자인해 유명세를 탔는데, 이 제품은 모조품이 무척이나 많은 용기이기도 하다. 나니에게는 언제나 디자인의 가치를 각인시키고 이끌어준 아버지였다. 21세란 어린 나이에 결혼한 나니는 남편을 군대에 보내고(당시는 스페인도 병역이 의무였던 시대였다), 일과 디자인 공부, 살림을 동시에 해나간 가녀린 체구의 ‘여장부’였다. 잠시 패턴 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했지만 다른 이의 밑에서 일하는 걸 견디지를 못했고, 아버지 소유의 인테리어 상점을 운영하다가 1980년대 들어서는 양탄자를 디자인하게 된다. “그 시절, 저는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유럽 문화의 일부인 양탄자는 1980년대에 들어서는 거의 죽었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스페인에는 바깥세상에서 온갖 새 조류가 물밀듯 유입되고 있었고, 디자인도 마찬가지였죠. 이케아의 열풍으로 값비싸다고만 여기던 디자인을 생활 속에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카펫만큼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던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 바르셀로나는 전환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1936년 피비린내 나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이래 길게 지속됐던 프랑코 독재 정권이 막을 내린 뒤였기 때문이다. 19세기 모더니즘의 꽃을 피웠던 찬란한 도시의 영광을 기억하며 세계적인 도시로 다시 발돋움하려는 바르셀로나의 크리에이터들을 가리켜 ‘80년 세대’라고도 부른다. 나니는 ‘디자이너가 만드는 컨템퍼러리 양탄자’라는 개념으로 그 변화에 동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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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맘의 고군분투, 위기를 벗어나고자 인도로 향하다
그런데 인생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디자인계의 동료였던 하비에르 마리스칼을 위시한 실력자들과 작업을 해나갔고, 초반에는 나름 주목도 받았지만 사업으로서는 수익이 영 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30대의 젊은 디자이너였지 비즈니스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디자인이 아무리 괜찮아도 기계로 짠 제품으로는 품질에 한계가 있었고, 따라서 가격 정책도 제대로 펴지 못했다. “정말이지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전반적인 경제 상황도 뒷받침이 되질 않아 우리는 1990년대 초에 이르자 결국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처했어요. 따지고 보면 디자인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제품을 보여주고, 개념을 제시하고, 이해시키는 방식 등 모든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 계기였죠.” 게다가 그녀는 10대의 딸을 홀로 키우는 ‘싱글맘’이었다. 회사를 살리려고 고군분투하면서 민감한 나이대의 딸까지 건사하려니 오히려 ‘이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겠다’는 낙관적인(?) 생각마저 들었다고 회상하면서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정말로 갑자기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회사가 기울었던 당시 호텔 프로젝트를 하나 맡게 됐는데, 기계로 짠 균일한 선이 아니라 불규칙한 형태와 질감의 양탄자가 필요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장인들을 찾아 나섰고, 그러다 보니 결국 인도로 향하게 됐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인도의 작은 마을 보팔로 간 그녀는 베틀로 카펫을 짜고 실을 엮는 베테랑들을 마주했다. 사막의 오아시스나 다름 없었다. 이렇게 해서 독창성을 갖춘 현대적인 디자인에 장인의 전통 기술을 얹은 작품이 탄생하자 브랜드 가치가 달라졌고, 나니는 제작 기반을 인도로 옮기는 결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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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단 양탄자의 스토리텔링, 어디까지 지평을 넓힐까?
극적으로 회생한 나니 마르키나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02년 선보인 ‘플라잉 카펫(Flying Carpet)’이라는 프로젝트였다. 살짝 굽이진 언덕에 어깨를 기대거나 잔디밭에 누운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신선한 매력으로 어필했다. 이 신개념 양탄자는 디자인상을 휩쓸며 나니 마르키나라는 브랜드를 세계적으로 각인시키는 출발점이 됐다. 이를 디자인한 신진 디자이너 아나 미르와 에밀리 파드로스 듀오도 일약 스타로 떠오른 건 물론이다. “플라잉 카펫은 그들의 데뷔작이었어요. 전시회 후원을 부탁하러 찾아왔는데, 잠재성을 발견하고는 아예 일을 해보자고 제안했죠.” 연타석 홈런까지 터졌다. 같은 해 나니 자신이 디자인한 ‘토피시모(Topissimo)’가 쏠쏠한 인기몰이에 성공한 것이다. 물방울 무늬에서 영감을 얻은 몽글몽글한 동그라미들이 톡톡한 질감과 매력적인 색조를 형성한 이 작품은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줬다. 그로부터 상승 궤도에 접어든 나니 마르키나는 이제 가구처럼 ‘컬렉션’을 내놓는 카펫업계의 명품 브랜드로서 지위를 누리고 있다. 뉴욕에서 쇼룸을 선보였고, 전 세계 45개국에 판로를 구축하면서 글로벌 확장도 순조롭게 전개해나가고 있다(현재 한국에서는 멀티 브랜드 가구 숍 웰즈(www.wellz.co.kr)가 판매 창구다). 나니의 행보 중에는 인도로 향한 발걸음이 자신의 인생을 바꾼 선물임을 기억하며 펼쳐나간 다양한 시도가 흥미롭다. 힌두교 행사인 디왈리(Diwali) 축제에 갔다가 포착한 인디언 문양을 바탕으로 ‘랑골리(Rangoli, 2007)’라는 매혹적인 원형 양탄자를 만들기도 하고, 올해에는 영국 디자이너 듀오인 도시 레비언과 손잡고 ‘라바리(Rabari) 컬렉션’을 내놓기도 했다. 인도 쿠치 지역의 소수민족인 라바리족 여성들과 함께 섬세한 전통 기술로 구현했다고 한다. 또 나니는 자신이 처음 방문했던 보팔 마을에 학교를 짓기도 했는데, 이곳에서 개최한 그림 공모전의 우승작을 상품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칼라(Kala, 2008)라는 이름의 이 작품이 한 점 팔릴 때마다 1백50유로를 현지 교육 재단에 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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