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ali Cras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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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04, 2013

에디터 고성연(파리 현지 취재)

프랑스를 대표하는 크리에이터 마탈리 크라세는 단지 디자인이나 설치물의 지평을 넓히는 데서 더 나아가 사고의 전환까지 촉구하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형태와 기능을 둘러싼 해묵은 명제들의 틀을 과감하게 부수고 언제나 의미 있는 ‘변환’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가지런히 깎은 앞머리에 귀 위로 올라오는 짧은 기장의 헤어스타일만큼이나 튀는 독특한 철학을 지녔다. 그래서 그녀에게 ‘편안함(comfort)’의 정의는 운신의 폭이 자유롭고,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꾀할 수 있는지 여부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소박한 삶이 녹아 있는 듯한, 더없이 소탈하고 따뜻한 미소는 ‘반전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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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을 단 한 문장으로 풀어낸, 그러니까 마침표가 오로지 하나만 있는 소설 <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1968), 알파벳 e를 모조리 빼고 쓴 소설 <실종>(1970), 모음 중 e만 사용해 써 내려간 소설 <돌아오는 사람들>(1973). 20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계의 ‘천재 악동’으로 불린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 1936~1982)은 전위 문학의 선봉장이었던 인물답게 길지 않은 삶이었지만 다분히 실험적인 작품 세계를 집약적으로 펼쳐냈다. 문학 평론가인 고려대학교 조재룡 교수는 최근 페렉이 몸담았던 전위 문학 단체 ‘울리포(OuLiPo)’를 다룬 책인 <잠재문학실험실>에 대한 서평에 ‘제약을 실천하기, 문자를 해방하기, 삶을 번역하기’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 재능과 삶을 동시에 보듬어나갈 줄 아는 ‘그녀들’에 대한 인터뷰 시리즈에서 굳이 조르주 페렉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번에 등장하는 여성 크리에이터가 페렉이라는 기이하고도 걸출한 문호에 대해 필자에게 처음으로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과 디자인 철학이 스스로를 박제하지 않고 끝없이 제약의 틀을 깬다는 점에서 페렉의 작품 세계와 많이 닮았다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이다. 파리지엔인 그녀의 이름은 마탈리 크라세(Matali Crasset). 5년 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고, 그 이후에도 전시회를 수차례 열었기에 아주 생소하지는 않은 프랑스의 디자이너다. 산업 디자인, 가구 디자인, 인테리어 디자인 등을 아우르며 프랑스를 대표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그녀를 일컬어 ‘여자 필립 스탁’이나 ‘제2의 필립 스탁’이라 부르기도 한다. 필립 스탁이 누구인가. 2000년대 중반 마이크로소프트(MS)에서 ‘스탁 마우스(Starck Mouse)’라는 협력작을 내놓고 빌 게이츠와 찍은 ‘인증’ 사진을 공개할 정도로 유명세가 엄청났던, 명실공히 20세기 최고의 스타 디자이너 아니던가. 그녀는 1990년대 필립 스탁을 위해 일한 적도 있다. 그러므로 이제 나란히 칭송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히 좋은 일일 것이다.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작품 세계를 보면 닮은 면모도 있긴 하지만 자세히 면면을 보자면 다르다. 그녀는 네 번 결혼할 만큼 사생활의 굴곡이 심한 데다 웬만한 영화배우 부럽지 않은 화려한 ‘셀럽’ 스타일로 살아가는 스탁과는 여러모로 사뭇 다른 DNA를 지닌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일단 그녀는 젊은 시절 자신의 사고 체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는 페렉이 어린 시절을 보낸 파리의 북동쪽 벨빌(Belleville)에 스튜디오를 차리고 참으로 소박한 삶을 꾸려나간다. 벨빌은 로맹 가리의 인기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주인공 로자 할머니와 모모가 사는 동네이기도 하다.
디자인도 삶도 ‘탈형식’, 왜 스스로를 박제하는가
“이 동네는 중국인, 유대인 등 다인종이 어우러져 사는 곳이에요. 저는 이처럼 작은 상점과 전통 시장이 있고, 가지각색의 사람들과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을 좋아해요. 웨스트 파리(West Paris)처럼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잖아요. 파리에서 이웃 아이들과 한데 섞여 뛰놀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역이기도 하지요.”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버섯 머리(?)’를 20년 가까이 고수하고 있는 마탈리 크라세를 마주한 곳은 다채로운 삶의 온기가 느껴지는 그녀의 동네 벨빌. 이 정감 어린 곳에 자리 잡은 3층짜리 로프트는 그녀의 일터이자 집이며, 한때는 아이들을 키우는 육아의 터전이기도 했던, ‘전천후 보금자리’다. 그녀에게는 10대 딸과 아들이 한 명씩 있는데, 지금은 손이 덜 가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는 이 로프트가 가족이 다 같이 어우러지는 공간이었다. 알록달록한 색상의 소파 등 환상적이면서 도전적인 색채 감각으로 유명한 그녀의 창작 오브제들이 가득한 1층은 사무실이자 회의실, 식사를 하는 공간으로 쓰인다. 아이들이 놀자고 달려들면 방해를 받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벽으로 차단해놓지도 않았다. 사생활을 영위하는 2, 3층 공간이 따로 있긴 했지만 언제라도 ‘소통’할 수 있도록 ‘열린 공간’을 만든 것이다. 가정이 휴식만 취하는 게 아니라 발상의 전환, 혁신과 실험이 이뤄질 수 있는 공간이라는 믿음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다목적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또 한 명은 그녀의 남편이자 ‘마탈리 크라세 프로덕션’의 운영을 맡고 있는 프랑시스(Francis). 마탈리 크라세의 ‘수족’과도 같은 조수이다. 마탈리가 가끔 질문에 답하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을라치면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자신의 책상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던 프랑시스가 “그건 0000년의 일이야”라며 민첩한 조력자 역할을 한다. 이들은 학창 시절 동창생으로 만나 인연을 맺게 됐다고 한다. “20대 초반이니까, 무척 오래전 얘기지만 저는 처음에는 마케팅을 공부했어요(웃음). 학교에 다니면서 프랑시스를 만났는데, 둘 다 예술, 문학 등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게 됐고, 서로 책을 바꿔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죠.” 학교 친구로 시작해 부부의 연을 맺고, 일까지 함께 영위하는 ‘솔 메이트’ 같은 이들 커플에게는 ‘조수’라는 단어에 대한 거리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프랑시스야말로 출중한 ‘알파우먼’인 아내의 창조적인 재능과 커리어를 위해 아낌없이 조력하는 완벽한 ‘베타맨’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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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디자이너 필립 스탁과의 인연, 자신감과 실력을 더하다
우연히 향수를 기획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창조의 세계에 흠뻑 매료된 젊은 마탈리 크라세는 ‘크리에이터’로 진로를 바꿔 국립산업디자인대학(ENSCI-Paris)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1990년 졸업한 그녀는 밀라노에서 커리어의 첫 여정을 시작했다.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탈리아의 크리에이터 데니스 산타치아라(Denis Santachiara)의 스튜디오에 취직해 해외 경험을 쌓다가 1993년 파리로 돌아와 필립 스탁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 당시 스탁은 프랑스의 간판 기업인 톰슨 그룹의 가전 업체 톰슨멀티미디어의 디자인을 맡고 있었는데, 마탈리 크라세는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자신감을 쌓아갔다. “밀라노에서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일했는데, 이와 달리 톰슨의 일은 상당히 규모가 큰 상업적인 프로젝트가 많았죠. 그때 톰슨은 필립 스탁과의 협력 체제 아래 디자인을 우선시하면서, 뭐랄까 ‘문화적인 혁명’을 시도했어요. 필립은 제가 맡은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을 확인할 뿐 세세하게 관여하지는 않았어요.” 당시 유럽의 가전 업체는 저마다 색다른 변모를 모색하고 있었다. 필립스가 이탈리아의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들인 것처럼, 톰슨은 스탁을 통해 탈출구를 찾았다. <스탁(STARCK)>이라는 책을 펴낸 영국의 디자인 저널리스트 콘웨이 로이드 모건의 설명에 따르면 그 당시 제품 분야에서는 이렇다 할 이력도 없는 스탁이 지명된 것 자체가 상당한 파격이었다고 한다. 필립 스탁은 ‘팀 톰’이라는 디자인 팀을 만들었고, ‘스타일의 전복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톰슨의 제품 전반에 과감한 변화의 물결을 일으켰다. 무채색이 대부분인 기존 제품과 대조적으로 톱밥으로 상자를 만들어 붙이고 형태를 짠 ‘짐 네이처’, 젊은이들을 위해 비스듬히 누워서도 시청할 수 있는 ‘제오 텔레비전’ 등 당시로서는 참신한 디자인의 TV를 내놓는 등 톡톡 튀는 ‘물건’들을 선보인 것이다. 스탁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겠지만 마탈리 크라세에게도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전자 제품의 혁신을 시도하는 대형 프로젝트는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처럼 젊고 의욕 넘치는 디자이너들이 적극 가담할 뿐만 아니라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확실히 영양가 있는 자산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5년이 지나는 사이에 마탈리 크라세는 결국 톰슨 프로젝트의 팀을 이끌게 됐고, 1998년 자신감을 갖고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열기에 이르렀다.
마탈리 크라세표 디자인의 경쾌한 자유로움
삶을 대하는 그녀의 자세를 보면 놀랍지 않지만 우리네 삶을 규정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일종의 ‘법칙’을 거침없이 탈피하는 게 ‘마탈리 크라세표’ 작품 세계다. 디자인과 순수 예술의 경계가 따로 없을 정도로 사정없이, 그렇지만 경쾌하게 ‘제약’을 깨부순다. 마치 자신의 거주 공간에 일과 놀이의 경계가 따로 없는 것처럼 그녀가 맡은 인테리어 디자인을 보면 마치 ‘설치 작품’ 같다. 그만큼 자유롭고 유연하다.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걸고 스튜디오를 연 초기부터 다채로운 도전을 시도했지만, 그녀의 명성에 확고한 무게를 실어준 작품으로는 소위 ‘부티크 호텔’의 역할 모델로 통하는 프랑스 니스의 ‘하이 호텔(HI Hotel)’ 프로젝트(2003)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저마다 차별되는 9개의 콘셉트를 부여하고 아홉 가지 방식으로 ‘체류의 경험’을 맛볼 수 있는 다차원적인 공간은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큰 주목을 받았다. 화사한 파스텔 색조의 방들, 음악, 미술, 이미지 등 다양한 요소가 어우러진 호텔 곳곳의 공간에 그녀가 주입하려고 했던 기운은 호사스러움이 아니라 ‘편안한 자유로움’이었다. 그렇기에 값비싼 가구로 도배한 럭셔리 호텔과는 차별되는 하이 호텔의 개성이 더욱 돋보였을 것이다. 2010년에 완공한 ‘다르 하이(Dar HI)’ 리조트는 마탈리 크라세의 내공과 자유로운 정신이 보다 더 심층적이고, 종합적으로 반영된 작품이다. 튀니지의 사막 도시 네프타(Nefta)에 위치한 다르 하이는 ‘호텔’이라는 명칭이 어색할 만큼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이색적이고 실험적인 면면을 간직한 일종의 생태 휴식 공간 같은 곳이다. ‘그냥 ‘집(a house)’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야자수들 사이로 이국적인 디자인의 몸체가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범상치 않은 다르 하이는 자연환경은 물론 주민들과도 조화롭게 시너지를 빚어낸다. 실제로 인근 마을의 지역 주민들이 다르 하이의 정원사, 요리사 등으로 일하며 몸소 기른 채소와 과일을 리조트 고객들의 식탁에 올린다. ‘로컬 소싱’이 강조되는 요즘 F&B 업계의 추세와도 맞지만 뭔가 인위적인 꼼수라고 볼 수는 없는 ‘진정성’이 살아 있다. 니스와 튀니지의 프로젝트를 발주했던 하이 라이프 그룹은 마탈리 크라세와 손잡고 파리에도 랜드마크를 설립했다. 2011년 문을 연 디자인 호텔 ‘하이 매틱(HI Matic)’이다. 바스티유 광장과 가까운 이 호텔은 9호선 샤론역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데,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방은 작지만 침대로도, 소파로도 활용 가능한 매트리스와 함께 ‘익스텐션’ 가능한 앙증맞은 탁자와 TV까지 ‘깨알’같이 있을 건 다 있다. ‘무인 시스템’을 표방하기에 로비에 체크인과 체크아웃을 위한 컴퓨터가 설치돼 있으며 예약 번호를 입력하면 방 열쇠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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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하지 않은 진화의 끝은 어디일까
‘하이 시리즈’를 합작한 하이 라이프 그룹의 공동 경영자 파트리크 엘루아르기(Patrick Elouarghi)와 필립 샤틀레(Philippe Cha^telet)를 가리켜 마탈리 크라세는 ‘클라이언트(client)’가 아니라 ‘파트너(partner)’라고 부른다. ‘자기 복제’를 염려할 수도 있건만, 이들 사업자가 한 명의 아티스트에게 세 번의 프로젝트를 맡긴 것은 무한한 신뢰와 존경이 굳건히 버티고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벌써 ‘10년 지기’도 훌쩍 넘긴 관계가 됐는데, 둘 다 흥미로운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지향하는 가치가 비슷하기에 오랫동안 즐겁게 일해올 수 있던 것 같아요.” 선입견을 강렬하고 흥미롭게 파괴하는 유일무이한 공간과 특별하면서도 온기가 스며들어 있는 인간적인 경험을 창출하는 것. 마탈리 크라세는 이러한 철학을 펼쳐나가는 데 있어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강조했다. 실제로 그녀는 이탈리아 가구 업체 캄페지(Campeggi), 카펫 업체 노두스(Nodus) 등과 일하면서 태피스트리 장인인 도모&페레(Domeau & Pe`re´s)와 무려 15년이나 인연을 이어왔다. “생명과 안식을 가져오는 건 ‘사람들’이지요. 사람들은 나 자신이 꿈꾸는 것보다도 훨씬 더 굉장한 걸 가져다주는 것 같아요.”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비상하고자 하는 그녀의 실험적 의지가 과격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건 근본적으로 이 같은 인간에 대한 ‘동지애’와 더불어 의미 있는 혁신, 그리고 탄탄한 내공이 뒷받침된 완성도를 추구하는 자세 덕분일 것이다. 조르주 페렉이 단지 도전적인 실험만 일삼은 문학계의 이단아가 아니라 20세기를 대표하는 대가로 평가받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제약을 실천하기, 문자를 해방하기, 삶을 번역하기’라는 과제는 순수한 도전 의지와 숙련된 솜씨 없이는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이 글을 마치기 전에 마탈리 크라세가 ‘꼬옥’ 읽어보라고 추천한, 조르주 페렉의 역량을 집대성한 걸작으로 꼽히는 소설 <인생사용법>(7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다)을 아직 완독하지 못한 게 아쉽지만, 분명 그녀의 작품들은 페렉의 세계와 통하는 ‘오라’가 있다. 특히 마탈리 크라세가 오랫동안 돈독하게 협업을 진행해온 파리의 로팍 갤러리와 지난여름 선보인 전시회에서 소개한 펠트 소재의 퍼니처와 설치물 등 괴짜 같지만 신비로운 품격이 묻어나는 이 묘한 오브제들이 그 방증일 것이다. 그동안 자신의 전시회에서 시도하던 습관적인 방식과 동떨어진 요소를 펼쳐 보이려 했다는 그녀의 설명대로 이 전시 작품에는 크리에이터로서 끝없는 진화를 갈구하는 마탈리 크라세의 ‘창조혼’이 투영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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