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들어오는 디자인이 돋보이는 시계도 있지만 그 이면에 담긴 역사와 전통의 특별함이 감동을 선사한다. 클래식한 시계부터 스포티한 시계까지 올해 특히 눈길을 끈 의미 있는 시계들을 소개한다.
1 1912년 포르트-어니용 시계.
2 H1912 무브먼트를 탑재한 아쏘 에퀴예르 1백 주년 기념 에디션 시계.
3 로터에 H 자 이니셜을 각인한 H1912 무브먼트.
1 탱크 시계를 착용한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2 초창기 탱크 시계.
3 1917년 최초로 탱크 시계를 만난 미국의 존 퍼싱 장군.
4 배우 게리 쿠퍼.
5 2012년 소개한 탱크 루이 까르띠에.
6 탱크 시계를 착용한 앤디 워홀.
1 브라이틀링 광고 캠페인 모델인 존 트래볼타.
2 초창기 내비타이머의 광고 캠페인.
3 한정판 내비타이머 블루 스카이.
시간을 알려주는 매체가 많아져서 시계의 위상이 낮아졌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여전히 생명과 직결된 도구로서 시계는 중요하다. 바다를 넘어 세계를 정복할 때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는 해상시계가 필요했듯 창공을 날아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비행 시 속도나 고도, 온도, 거리와 연료의 양 등 여러 가지 정밀한 계산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여러 가지 계산자가 개발됐다. 1933년 미국 해군 중위 필립 돌턴이 개발한 플라이트 컴퓨터도 그중 하나다. 이를 원형으로 만들어 2차 세계대전 중에 40만 개가 넘게 생산된 E6B를 응용한 슬라이드룰을 개발해 1940년 특허를 받은 브라이틀링. 1952년 내비게이션과 타이머란 이름을 결합해 슬라이드룰을 적용한 내비게이션 시계를 소개한다. 휴대전화로 수만 가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세상이 됐지만 내비타이머는 항공기 오너 및 파일럿협회(AOPA: Aircraft Owners and Pilots Association)의 공식 시계로 지정되면서 탄생 60주년이 지난 지금까지 파일럿의 사랑을 받고 있다. 어릴 적 꿈이 매일 하늘을 나는 것과 내비타이머를 착용하는 것이었다는 배우 존 트래볼타. 그는 이미 6천 시간 이상의 비행 기록과 집 앞에 활주로와 여러 항공기를 소유한 것으로 유명한데 브라이틀링의 광고 캠페인 모델로 활동하는 그가 착용한 시계도 내비타이머이다. 브라이틀링은 얼마 전 내비타이머 탄생 60주년을 기념하는 5백 개 한정판 내비타이머 블루 스카이를 소개했다. 브라이틀링 최초의 자사 무브먼트 01을 탑재해 더욱 의미가 깊다.
1 피에르 아펠(왼쪽)의 생전 모습.
2 초창기 시계의 스케치.
3 2012년 소개한 새로운 피에르 아펠 시계.
주얼리 브랜드로 출발했기에 간간이 시계를 제작한 반클리프 아펠이 1949년에 소개한 시계는 태생 자체가 특별했다. 창립자인 에스텔 아펠의 형제 줄리앙, 그 뒤를 이어 세 아들 자크, 클로드, 피에르 아펠이 합류했는데 활동적인 스포츠맨이자 예술가로 사교계에 명성이 높았던 막내 피에르 아펠이 30세 되던 1949년 자신이 착용하기 위해 구상한 시계로 일반인들에게 팔기 위한 시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화이트 래커 다이얼에 로마숫자를 넣은 깔끔한 다이얼, 그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케이스를 이어주는 T 자 형태의 러그가 독특한 시계는 1971년에야 이니셜과 연도를 따 PA49란 이름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됐다.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으로도 소개되던 PA49는 올해 한 차원 높은 마무리로 피에르 아펠이란 이름으로 거듭났다. 로마숫자 인덱스는 스탬핑이 아니라 부착한 형태로 다이얼 중앙에는 마름모꼴의 엠블럼을 닮은 패턴을 넣어 입체감을 더했고 무브먼트는 울트라 씬으로 유명한 피아제 830P를 탑재해 얇고 날렵한 형태였다. 다이얼과 소재, 사이즈의 고급스러운 진화를 보여주면서도 여전히 시대의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다.
1, 2 초창기 로얄 오크의 스케치와 실제 시계, 도해도.
3 1972년 소개한 오리지널 버전을 그대로 재현한 15202ST 버전.
전쟁 후 밀리터리 시계가 대거 출현한 이후 1970년대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시계와 그 사이를 넘나드는 시계로 럭셔리 브랜드에서 내놓기 시작한 것이 스포츠 시계다. 오데마 피게에서는 로얄 오크가 그런 존재였다. 1972년 제럴드 젠타가 디자인한 로얄 오크는 올해로 탄생 40주년을 맞이했고 오데마 피게를 대표하는 컬렉션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에는 혁신적이었으나 지금은 클래식해 보이는 시계는 특유의 팔각형 베젤과 타피스리라 부르는 패턴이 들어간 다이얼, 매끄러운 브레이슬릿이 특징이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위해 기능성을 강화한 로얄 오크 오프셔와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여성용도 내놓으면서 점점 그 범위를 확대해 나가고 있는데 올해는 40주년을 기념해 두께가 얇은 울트라 씬 버전과 40개만 제작한 오픈워크 엑스트라-씬 버전, 투르비용 버전 등 새로운 로얄 오크를 소개했고 이를 기념하는 전 세계 순회 전시도 개최했다.
1 아버지와 아들을 위해 2012년 새롭게 소개한 마크 16 버전.
2 올해 신제품인 마크 17.
시계의 특별한 매력은 대를 이어 물려주는 감동적인 유산이 된다는 사실이다. 파텍 필립의 경우 이를 주제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이 나오는 광고 캠페인을 전개하기도 한다. 이를 차용한 브랜드가 또 있으니 IWC다. 2008년 IWC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착용하는 파일럿 시계를 소개했다. 당시 시계는 마크 16 모델로 아버지의 시계는 플래티넘 케이스의 빅 파일럿, 아들의 시계는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로 옐로 톤의 인덱스와 핸즈, 브라운 톤의 스트랩이 돋보였다. 2012년 IWC는 여기에 또 다른 아버지와 아들 버전을 더했다. 아버지의 시계는 케이스 지름이 46mm의 빅 파일럿 시계로 칼리버 51111을 장착, 7일간 파워 리저브 되고 아들의 시계는 지름이 36mm로 칼리버 30110을 장착한 파일럿 마크 16 시계이다. 실버 다이얼에 블랙 스트랩으로 매치한 시계는 모두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로 소개해 이전에 비해서 더욱 폭넓은 사랑을 받을 듯하다. 상술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런 제품으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DNA를 가진 시계를 착용함으로써 더욱 끈끈한 유대 관계를 가질 수 있으니 어떻게 보면 삭막해지는 가족 관계를 위한 배려라는 긍정적 측면도 보인다.
1, 3 제라 페리고 빈티지 1945 르 코르뷔지에 트릴로지.
2 르 코르뷔지에.
화가, 조각가, 건축가, 그리고 사상가이기도 했던 샤를 에두아르 잔레. 파리에서 개명한 후 우리에게 르 코르뷔지에로 알려진 현대 건축의 거장은 1887년 현재 시계 산업으로 유명한 스위스 쥐라 산맥의 도시 라쇼드퐁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 그곳 장식 미술 학교에서 시계 장식을 배운 바 있다. 지금도 라쇼드퐁에 가면 르 꼬르뷔지에가 25세 때 부모를 위해 지은 집인 메종 블랑쉬에 가볼 수 있다. 라쇼드퐁에서 터를 잡은 시계 브랜드 제라 페리고가 르 코르뷔지에의 탄생 1백25주년을 위한 특별한 컬렉션을 제작하고 메종 블랑쉬에서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빈티지 1945 르 꼬르뷔지에 트릴로지’라고 이름을 붙인 3개의 시계로 1929년에 선보인 LC4 침대식 긴 의자, 인간의 형상을 그린 모듈러 등 생전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에서 차용한 형상과 콘크리트, 금속, 자개로 건축적인 질감을 표현한 다이얼과 스트랩이 특징적이다. 각 시계는 5개씩 한정 생산했다. 제라 페리고는 르 코르뷔지에가 다녔던 장식 미술 학교인 에콜 다르 아플리케(the Ecole d’Arts Appliques)에서 조각을 배우는 4명의 학생을 후원하기도 한다.
1, 3 막스 빌의 가구 컬렉션.
2 막스 빌이 융한스와 손잡고 제작한 주방용 시계.
4 한결같은 디자인을 간직한 막스 빌의 융한스 컬렉션.
독일 하면 실용적인 기능에 충실하며 군더더기 없고 간결한 디자인을 떠올린다. 이는 1919년 발터 그로피우스가 미술 학교와 공예 학교를 병합해 집을 짓는다는 의미의 하우스바우에서 착안해 이름 붙인 학교, 바우하우스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 출신으로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라즐로 모흘리나기, 막스 빌이 있다. 스위스 태생의 막스 빌은 조각, 공예, 가구 디자인을 했는데 1957년 독일의 시계 회사 융한스와 인연을 맺고 주방용 시계를 제작한다. 그 성공에 힘입어 1962년 손목시계도 제작하는데 이것이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건재한 융한스의 막스 빌 컬렉션이다. 2000년대 복각한 막스 빌 컬렉션은 시, 분만 있는 초창기 시계에 초를 더한 심플한 버전에 크로노그래프 기능을 넣은 크로노스코프도 더해졌다. 1960년대를 떠올리게 해주는 밀라노 메시 브레이슬릿과 가장자리로 갈수록 곡면을 이룬 핸즈와 볼록한 글라스, 그리고 무엇보다 케이스 백에 각인한 막스 빌의 사인은 바우하우스를 흠모한 건축가나 디자이너를 이끄는 매력적인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