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손 글씨를 쓸 일이 별로 없다. 해야 할 말이 있으면 키보드를 두드리고, 문자 메시지를 전송한다. 간단한 메모는 휴대폰의 메모장 기능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디지털 기기는 필요한 도구긴 하지만,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컴퓨터와 휴대용 전자책이 보급되었지만, 책과 신문이 여전히 살아남은 이유와 같다. 디지털 도구가 정보를 전달한다면 필기구나 공책 같은 아날로그 소품은 마음을 전달한다. 매끈한 수트를 입고 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닐지라도, 펜이 없어 주머니를 뒤적인다거나 싸구려 볼펜을 꺼내 서명하는 남자에게 품격을 논하기는 어렵다. 반대로 옷차림은 수수할지라도 재킷 속에서 좋은 만년필을 꺼내 메모를 한다면 다급하지 않고 여유를 즐길 줄 알며, 취향이 고급스러운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렇듯 신사의 품격을 드러내는 만년필은 1883년 미국 보험 판매원인 로이스 에드슨 워터맨이 만든 브랜드인 워터맨의 제품이 그 시초인데 그가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사인을 받기 직전, 펜에서 잉크가 쏟아져 계약서가 엉망이 되어 계약을 망친 경험을 토대로 만년필을 개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만년필은 몸통을 뜻하는 ‘배럴(barrel)’과 잉크를 저장하는 ‘리저부아(reservoir)’, 만년필 촉 끝의 작은 금속 부분으로 필기할 때 종이와 직접 닿는 부분인 ‘펠릿(pallet)’, 만년필 촉인 ‘닙(nib)’으로 나누어진다. 닙은 두께에 따라 EF(Extra Fine), F(Fine), M(Medium), B(Broad), EB(Extra Broad) 등 크게 다섯 가지 중 선택할 수 있다. 섬세한 필기를 원한다면 0.3mm 정도로 가장 가는 엑스트라 파인을, 메모나 노트 필기를 자주 한다면 적당한 굵기의 파인을 추천한다. 서명할 일이 많다면 넓고 도톰하게 써지는 미디엄과 브로드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만년필 촉은 쓸수록 마모되어 두꺼워지기 때문에 원하는 글씨 굵기보다 한 단계 얇은 촉을 선택하면 실패할 확률이 적다. 가격대 역시 5만원대부터 수천만원대까지 천차만별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펜촉의 소재다. 스테인리스 스틸부터 도금, 14K 골드, 18K 골드까지 다양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몽블랑과 S.T. 듀퐁과 같은 고급 필기구 브랜드에서 사용하는 14K 골드와 18K 골드 펜촉은 스테인리스에 비해 탄력과 유연성이 우수하고 필기를 하는 스타일에 따라 가장 알맞게 펜촉이 변형된다. 이들은 1백 가지 이상의 공정을 거칠 정도로 정교함을 자랑하며, 일일이 손으로 수작업하기 때문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펜촉을 만든다.
좋은 만년필을 사는 것만큼이나 관리가 중요하다. 자신의 필기 습관이나 필압으로 촉을 길들인 나만의 펜이기 때문에 보관에도 신경을 써 망가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만년필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한 달에 1~2회 정도 미지근한 물로 세척하면 좋은데, 컨버터나 카트리지를 분리해 촉과 몸통을 5분 정도 물에 담그고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잉크 공급 부분에 물을 채웠다 빼기를 반복하면 된다. 펜촉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깨끗하고 부드러운 수건을 쓰고, 닦아낸다기보다는 잉크를 흡수시킨다는 정도로 힘 조절을 해야 한다. 또 펜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을 때는 잉크나 카트리지를 분리해놓는 것도 방법이다. 너무 오랫동안 잉크를 넣은 상태로 쓰지 않았다면 미지근한 물에 펜촉을 담가놓는 것도 좋다. 만약 세척할 자신이 없다면 만년필 브랜드의 세척 서비스를 이용해볼 것을 권한다.
역사적인 사건, 시대의 아이콘, 문화 예술 후원, 창립일 기념 등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을 만년필에 담아 한정 수량 선보이는 리미티드 에디션은 수백만원을 훌쩍 넘는 고가의 가격에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이들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정교한 세공력과 장인 정신, 특별한 소재로 최고의 필기구 브랜드라는 자부심을 드러낸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컬렉터와 마니아를 거느린 S.T. 듀퐁과 몽블랑에서는 국내 1~3점 소량 수입하는 한정 컬렉션만 구입하는 고객 리스트가 있을 정도다. 이들은 실용적인 쓰임새보다 소장 가치에 큰 의미를 둔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드러내는 몽블랑은 1992년부터 유럽 르네상스를 후원한 로렌초 데 메디치를 시작으로 올해는 모차르트를 후원한 요제프 2세까지 총 21개의 에디션으로 제작한 ‘몽블랑 문화 예술 후원자 펜’을 선보이고 있다. 문학속의 위대한 인물의 삶과 작품을 기리는 ‘작가 에디션’, 그레타 가르보, 잉그리드 버그먼 등 할리우드 여배우를 통해 몽블랑만의 여성상을 창조하는 ‘디바 컬렉션’ 등 다양한 한정 컬렉션을 선보이기로 유명하다. 각 에디션은 인물의 업적을 기리며 그가 추구했던 문화 예술 양식이나 활동했던 시대의 특징을 반영한다. 파리의 앵발리드, 밀로의 비너스 등 전 세계적으로 유서 깊은 건축물과 조형물에서 영감을 얻는 S.T. 듀퐁의 제품에서는 옻칠 세공 장인들의 정교한 기술력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블루 래커 컬러에 화이트와 골드 파우더로 수많은 별들이 덮여 있는 듯한 착각을 자극하는 ‘천일야화 컬렉션’, 만년필 보디에 용 무늬를 조각한 ‘드래곤 컬렉션’이 대표적이다. 그라폰 파버 카스텔은 2003년부터 그해에만 한정 출시하는 ‘올해의 펜’으로 컬렉터의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데, 스네이크 우드, 호박, 가오리가죽과 상어가죽 등 독특하고 진귀한 소재를 접목해 특별함을 더한다. 두루미, 소나무, 유니콘 등 동양 문화의 아이콘을 마키에 공법으로 세공한 파카의 듀오폴드 리미티드 에디션 역시 매 시즌 새롭게 업그레이드되어 컬렉터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유서 깊은 주얼리 & 워치 하우스에서 선보이는 만년필도 주목할 만하다. 하이 컴플리케이션 워치를 만드는 고도의 기술력과 정교한 피니싱은 만년필에도 적용되어 컬렉터의 자부심을 충족시킨다. 까르띠에를 비롯해 브레게, 해리 윈스턴, 쇼파드 등에서 만날 수 있다. 만년필은 우리가 흔히 쓰는 볼펜이나 샤프보다는 사용하기 번거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그리고, 누군가를 존경하는 마음을 전하고, 연인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중요한 서명을 하는 특별한 순간에는 만년필만 한 것이 없다. 자신의 인생과 이야기를 담은 필기구를 소유한다는 것은 값비싼 옷과 신발로 대체할 수 없는 품격을 완성하기에 충분히 가치 있는 선택이 될 것이다.
블랙 & 화이트 패턴의 까르띠에 레일로드 데코 만년필.1백80만원대 까르띠에.
뉴욕 록펠러 빌딩 앞의 지구본을 모티브로 페일 골드 소재로 정교하게 장식한 뉴욕 5번가 한정 컬렉션 만년필. 2백99만원 S.T. 듀퐁.
던힐의 가장 대표적인 만년필 라인으로, 심플한 블랙 레진 보디와 스털링 실버의 조화가 돋보인다. 70만원대 던힐.
로마 사원의 기둥을 연상시키는 입체적인 배럴이 눈에 띄는 만년필은 몽블랑 문화 예술 후원자 펜의 2011년 에디션이다. 3백90만원 몽블랑.
팔라듐 소재로 만든 블랙 래커로 심플한 멋을 드러내는 만년필. 가격 미정 해리 윈스턴 워치.18K 화이트 골드 펜촉에 새긴 정교한 블루 컬러 문자가 돋보이는 만년필. 가격 미정 브레게.
브랜드 창립 1백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탈리아 필기구 브랜드 오마스(OMAS)와 합작해 선보인 ‘1910 펜’ 리미티드 에디션. 1백52만원 에르메네질도 제냐.
칼 라거펠트와 컬래버레이션해 탄생시킨 몽 듀퐁 컬렉션 프레스티지 라인 만년필.1백19만원 S.T. 듀퐁.
반짝이는 블랙 보디에 매트한 헤링본 패턴을 새겨넣어 그립감이 좋은 기요셰 만년필. 48만원 그라폰 파버 카스텔. 블랙 레진 보디에 가느다란 플래티넘 도금 장식으로 마무리한 2012 작가 에디션, 조나단 스위프트 만년필. 1백30만원 몽블랑.
블랙 & 실버 격자무늬의 배럴과 캡이 클래식한 디자인의 만년필. 가격 미정 해리 윈스턴 워치. 알프레드 히치콕 잉크 보틀. 2만5천원 몽블랑.
까르띠에1566-7277 S.T.듀퐁 02-2106-3592 몽블랑 02-3485-6618 해리 윈스턴 워치 02-540-1356
그라폰 파버 카스텔 02-712-1350 던힐 02-3440-5615 브레게 02-3438-6218 에르메네질도 제냐 02-2016-5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