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CULTURE 2021 Summer SPECIAL] 베니스와 런던을 수놓다 – 샤를로트 페리앙의 미래 지향적이고 따스한 건축적 시선

조회수: 2780
7월 07, 2021

글 한지혜(디자인 비평가·이화여대 겸임 교수) | 기획 고성연

베니스와 런던을 수놓다
샤를로트 페리앙의 미래 지향적이고 따스한 건축적 시선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이라는 20세기 디자이너가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놓은 혁신에 비하면 그녀의 이름은 언제나 그림자 속에 있었다. 건축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근대건축의 선구자를 꼽아보라고 하면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데어로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발터 그로피우스 등 거장들의 이름을 떠올리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릴리 라이히, 아일린 그레이, 샤를로트 페리앙 같은 여성 대가들이 합당한 가치를 인정받기까지는 수십 년이 넘는 시간 차가 존재한다. 샤를로트 페리앙은 요 몇 년 새 ‘재평가’ 작업이 가장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인물이다. 지금 베니스, 런던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를 통해 인류애 충만하면서도 미래 지향적인 시선이 깃든 그녀의 작품 세계를 엿본다.



1
2
3
4


르 코르뷔지에라는 거장의 조수 정도로 알려져온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은 그녀와 동시대를 살았던 어떤 거장에도 뒤지지 않는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근대성을 가지고 디자인·건축계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개척해온 선구자였다. 안타깝게도 당대 최고의 엘리트이던 르 코르뷔지에조차 그녀를 처음 만난 날 “여기는 쿠션에 수놓는 데가 아니다”라며 돌려보냈을 정도로 여성 크리에이터의 가치를 인정받기 힘든 시대적 상황에서 길을 헤쳐나가야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간 디자이너이자 실험적인 건축가, 그리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가득한 행동가이던 그녀가 21세기에 들어 전 세계적 화두가 되고 있는 ESG의 흐름 속에서 가치를 꾸준히 재조명받고 있다. 특히 21세기 들어 그 물꼬를 튼 계기는 2019년 프랭크 게리의 전위적 건축물로 유명한 파리의 루이 비통 재단미술관에서 전체 공간을 할애해 개최한 대규모 샤를로트 페리앙 회고전이었다. 건축에서 디자인, 예술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 관한 탐구와 열정을 기린 이 전시를 지렛대 삼아 페리앙은 점차 수면 위의 존재로 더 크게 부각하고 있다.
지난해엔 서울에서도 페리앙의 사진과 가구를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렸는데, 올해는 유럽에서 전시가 잇따라 펼쳐지고 있다. 명품 브랜드 루이 비통이 운영하는 베니스의 전시 공간 에스파스 루이 비통(Espace Louis Vuitton)에서 진행 중인 전시, 그리고 최근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서 막을 올린 전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2021 비엔날레 건축전이 열리고 있는 베니스에서 빌모트(Wilmotte) 재단이 이탈리아 가구 브랜드 카시나(Cassina)와 함께 재구축한 ‘레퓌주 토노(Le Refuge Tonneau)’는 창의적 재능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깃든 ‘유목 건축’의 사례로 눈길을 잡아끈다. 샤를로트 페리앙이 당시 그녀의 동료이자 연인이던 피에르 잔느레와 함께 설계한 이 유목식 가건축물(1938)은 제한된 환경에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공간과 도구에 대한 디자인으로, 르 코르뷔지에가 추구했던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표현을 오히려 그의 어떤 건축물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양철로 만든 우주정거장처럼 생긴 레퓌주 토노는 샤를로트 페리앙이 1937년 크로아티아에서 찍은 사진 속 회전목마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했다고 알려져 있다. 스키어들이 알프스의 산에서 임시 거주지를 세우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이동식 가건축물로 각각의 패널 모듈이 40kg 미만으로 가벼워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게 조립·분리하고 이동할 수 있다. 1층의 접이식 침대와 2층의 2층 침대를 비롯한 침대 6개로 8명의 인원까지 수용할 수 있고, 기차식 침실에서 영감받아 가죽 줄을 이용해 접고 펴는 방식으로 내부 공간의 활용도를 한껏 높인 이 건축물은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빼어난 기계이자 새로운 거주 방식의 제안이기도 하다. 작은 공간이지만 조리도 할 수 있는 간이 부엌이라든지, 눈 녹은 물을 활용할 수 있도록 양동이가 설치된 나무 소재의 작업대, 중앙의 둥근 철제 기둥 안에 설치되어 공간 효용을 살린 난로 등 세심한 설계와 요소가 단연 돋보인다. 환경 친화적인 나무 소재와 더불어 경량화를 위한 알루미늄이라는 신소재의 활용까지, 레퓌주 토노의 면면을 보노라면 근대적 주거 환경 실험의 정점에서 그녀가 얼마나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사고를 했는지 알 수 있다. 또 상류층을 위한 장식적 거주 공간의 설계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환경에서 인간을 위한 도구로서의 공간을 제안하고자 하는 포용적 시선도 느껴진다. 이처럼 진취적인 사고방식이 스며든 그녀의 유목 건축물은 오늘날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뿐더러, 남극이나 사막의 연구 기지 등의 귀감이 될 정도로 미래적인 면모가 배어 있기도 하다.
미래에 펼쳐질 삶의 방식에 대한 호기심과 개척은 언제나 창조적인 사람들의 몫이었고, 어쩌면 우리가 현재 누리는 일상의 많은 부분이 ‘과거에 그들이 어떤 미래를 상상했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왔다고도 볼 수 있다. 인간과 환경, 기술에 대한 균형적인 관점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본 샤를로트 페리앙의 선견지명은 오늘날의 디자인과 건축에도 많은 영감을 준다. 우리는 이미 그녀의 생각이 녹아든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봉쇄’와 ‘제약’이 일상의 키워드로 자리매김한 코로나 시대가 펼쳐지고 있기에, 그녀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한정된 거주 공간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한’ 레퓌주 토노가 시사하는 바는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하루빨리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어 베니스에 재현된 이 역사적인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보고 싶을 따름이다.






[ART + CULTURE 2021 Summer SPECIAL]

1. Intro_사유의 바다, 치유의 숲  보러 가기
2. Front Story_현대미술과 치유의 계보학  보러 가기
3. 지상(紙上) 전시_Soul Mending_01_빈우혁  보러 가기
4. 지상(紙上) 전시_Soul Mending_02_염지혜 보러 가기
5. 지상(紙上) 전시_Soul Mending_03_호 추 니엔  보러 가기
6. 지상(紙上) 전시_Soul Mending_04_휘도 판 데어 베르베  보러 가기
7. CIRCA 프로젝트_공공 미술, 도시 속 계절을 품다  보러 가기
8. 샤를로트 페리앙의 미래 지향적이고 따스한 건축적 시선  보러 가기
9. Market Insight_포스트코로나 시대와 미술 시장의 지각 변동  보러 가기
10. 미술관에 간 스니커즈  보러 가기
11. 피카소 탄생 1백40주년_Irresistible Charms  보러 가기
12. ‘벚꽃’으로 돌아온 Damien Hirst, Blossoming Again  보러 가기
13. Remember the Exhibition 보러 가기 보러 가기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