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or n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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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03, 2021

글 고성연

부산, 2021바다미술제

아트 페어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 한 점 사는 것도, 우아한 미술관에서 감상의 늪에 빠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눈부시기도, 쓸쓸하기도 한 해변을 거닐며 공공 미술의 파도에 몸을 맡겨보는 건 어떨까? 부산 기장의 일광해수욕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2021바다미술제는 미술이 미술관 밖을 벗어나 대중의 일상이 전개되는 ‘삶터’에서 즐거운 영감과 묵직한 울림을 선사하는 흐뭇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이는 지역 작가를 포함한 13개국 22팀(36명)이 다문화적 배경을 지닌 20대의 감독과 진지하게 머리를 맞댄 기획 아래 현지인과 어우러져 창작을 해나간 과정이며, 그 결과물이 다 준수한 ‘축제’다. 상품화나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아니라 문화적 감성과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사명을 지키려 애쓴 예술 체험의 현장에 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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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다 그렇지만 바다라는 존재는 참으로 많은 이미지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복잡한 뭍의 삶에서 잠시 벗어난 ‘객’에게는 한없이 낭만적이고 반짝이는 바다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끝을 모르게 깊고 칠흑같이 어두운, 그래서 때로는 불안하고 섬뜩한 바다일 수도, 고요하고 쓸쓸하고 애처롭기 짝이 없는 적막과 슬픔의 바다일 수도 있다. 이렇듯 다분히 인간 본위적인 감성도 좋지만 한 번쯤 바다를 이루는 비(非)인간의 생태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부산 기장군의 일광 해변에서 펼쳐지고 있는 2021바다미술제의 리티카 비스와스(Ritika Biswas) 감독은 인간과 비인간을 분리된 개체로 인지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여러 세계와 만나는 ‘교감의 장’으로서 바다에 초대한다. 지난 10월 중순 막을 올려 11월 14일까지 진행되는 <인간과 비인간: 아상블라주(Non-/Human Assembl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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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인간-비인간을 보듬는 연결 고리

지구촌을 2년 동안이나 장악한 코로나19와 기후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자연과의 ‘관계 회복’, 인간 공동체의 ‘연대’는 공공 미술이 선보이는 야외 미술제를 수놓기에 적절한 키워드일 수 있지만, 언뜻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기자기하고 평온한 분위기의 일광 바닷가에 놓인 여러 설치 작품은 투박하거나 강렬한 방식으로 진지한 성찰을 호소하기보다는 주변의 아름다움을 상기시키는 다채로운 형태와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이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어떤 진입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의 산책은 영롱하게 빛나는 커다란 해변의 설치 작품에서 시작됐다. 낮에 햇살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나는 양파나 복숭아 같기도 하고, 밤엔 우주선 같기도 한 ‘영혼의 드롭스’(2021)라는 오태원 작가의 작품. 해변만이 아니라 바다, 하늘까지 ‘육해공’을 아우르는 커다랗고 사랑스러운 ‘물방울’들이다. 오비비에이(OBBA)의 ‘Lightwaves’(2021)는 다색의 빛을 반사시키는 특수 필름이 바닷바람에 나부끼면 마치 빛의 바다 사이로 걸어 다니는 듯 한 환희를 준다. 부드러운 곡선의 결이 유려한 ‘태동’(2021)은 자연으로부터 소재와 영감을 얻는 대지 미술가 리 쿠에이치의 대나무 소재 설치 작품이고, 커다란 나무 소재 설치물에 퍼포먼스 현장을 담은 사진을 프린트한 ‘유영하는 뿌리’(2021)도 대자연 속에서 성장해 자연물을 재료로 즐겨 활용하는 방글라데시의 지역 원주민 출신 작가 조이데브 로아자의 작품이다. 멀리서 보면 고운 색조의 섬 같지만 가까이 갈수록 산호초와 뒤얽힌 팔꿈치, 무릎 등 몸의 일부들이 드러나는 류예준 작가의 인체 조각 ‘주름진 몽상의 섬들’(2021), 머구리(어업 잠수부)가 쓰는 장비를 등에 찬 사이보그의 모습이 바다를 배경으로 묘한 느낌의 형상을 빚어내는(현대 문명 발달로 퇴화되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냈다는) 최한진 작가의 ‘트랜스’(2021), 바람을 동력 삼아 움직이는 조병철 작가의 키네틱 아트 작품 ‘생명체의 반격’ 등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묘한 미를 자아낸다. 십장생이 새겨진 타조알처럼 생긴 자개 작품은 언뜻 생뚱맞아 가장 눈길을 끌 수도 있는데(김경화 작가의 ‘바다가 들려주는 이야기’), 영겁의 바다로부터 온 재료인 ‘버려진 자개’로 지역 장인의 도움을 받아 빚어낸 ‘협업’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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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공간으로 거듭난 일광해수욕장 일대

해가 지더라도 발길을 돌려서는 안 된다. 일몰 이후에도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이 있으니 시간을 넉넉히 잡고 이 동네 맛집이라도 예약해두기를 추천한다. 해변가에서 바다 생물들의 춤을 보여주는 듯한 로히니 드배셔의 영상 작품 ‘심해 온실’(2021)이라든지, 낚싯줄과 구리선으로 엮어 다리 사이로 리듬을 타는 안재국의 설치 작품 ‘세포유희’(2021), 거대한 뜨개질로 수놓은 작품이 다리 위에서 신비롭게 빛나는 최앤샤인 아키텍츠의 ‘피막’(2021), 공원에서 주민들의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나무와 조형물로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이진선의 ‘The DNA Park’(2021), 그리고 마을의 아파트 파사드를 장식하는 김안나의 영상 작품 ‘오션 머신’(2021). 충분히 대중적이면서 생각할 거리도 던져주는 바닷가의 예술 산책은 길지 않아 고되지 않고, 호젓한 일광의 아름다움을 듬뿍 누릴 수 있어 즐겁다. 바다미술제 사상 첫 외국인, 여성, 최연소라는 수식어를 단 리티카 비스와스 감독은 다중 집합이 어려운 시기에 규모가 큰 장소보다 아담하고 상업적이지 않은 ‘무대’를 원했는데, 일광해수욕장이 안성맞춤으로 여겨졌다고. 한동안 ‘붙박이’처럼 이 마을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비스와스 감독은 “지나가면 절 다 알아볼 정도로 배회했다”고 말하며 일부 작가들은 주민과 대화를 나누면서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사회 참여적인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지역 미술제에서 준비 과정부터 현지인들과 소통한 점은 주목할 만한데, 이는 격년으로 열리는 바다미술제의 이전 장소(송도, 다대포 등)와 달리 일광은 주민들이 대부분 바다 가까이 거주하는, ‘주인 있는’ 해수욕장이라 가능했다는 해석이 뒤따른다.
벌써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는 일광의 예술 산책은 섬세한 생태계이자 누군가의 삶터인 바닷가에서 ‘공생’과 ‘소통’, ‘기다림’ 같은 가치를 생각해보게 해준다. 그래서인지 간만에 오래된 책을 끄집어내게끔 하기도 했다. 미국 여성 최초로 비행 면허를 취득한 시인이자 수필가로 평생에 걸쳐 바다를 사랑했던 앤 모로 린드버그의 <바다의 선물>. 좋은 글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여전히 큰 울림을 준다. “바다는 욕심 많고 참을성 없는 이에게 자신의 보물을 내주지 않는다(중략). 마음을 비우고 아무런 바람 없이 누워 바다로부터의 선물을 그저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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