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도시를 감싸는 미학적 공기
팬데믹으로 온통 멍들고 생채기가 난 영혼이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은 바다의 품을 그리워한다. 여름이 가까워지면 더욱 그렇다. 제주나 남해처럼 청정한 한가로움의 미학을 품은 곳도 좋지만, 왁자지껄한 활력이 넘치는 항구도시도 좀처럼 물리치기 힘든 끼를 발산하며 유혹의 손짓을 한다. 몇 년 전부터 한 해가 다르게 지평을 넓혀가는 듯한 문화 예술 생태계의 풍경 덕분에 도시의 매력이 한층 다채로워지고 있는 부산! 특히 심상치 않은 미학적 공기가 감돌고 있는 초여름의 부산은, 때로는 떠들썩한 열기가 꽤 괜찮은 치유책이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해운대 일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한 ‘아트부산 2021’을 계기로 부산이라는 도시만이 지닌, 그리고 잠재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로컬 콘텐츠의 힘에 대해 생각해본다.
# 아트부산 2021 & …
부산은 길을 떠날 핑계를 애써 찾아 방문하고 싶은, 그리고 더 오래 머물고 싶은 도시다.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환경과 특유의 쾌활한 이미지로 오랫동안 인기를 누려왔고, 국제 영화제 개최지로서 위상도 지닌 메트로폴리스지만, 그게 끌림의 주된 이유는 아니다. 사실 ‘자연’만 따지자면 다른 쟁쟁한 후보들이 있고, 문화 예술 콘텐츠의 세련미나 다양성에서는 서울이란 도시가 워낙 독보적이니까. 아무래도 외지에서 찾는 도시 산책자 입장에서는 바쁜 와중에도 느긋하게 거닐고 싶은 거리와 골목이 얼마나 많은지가 더 중요할 것 같다. 누군가 ‘도시의 영혼’이라고도 부르는 거리 풍경,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녹아 있는 로컬 콘텐츠의 매력 말이다. 어느새 부산에서는 늘 들르는 맛집이며 카페의 동선을 그릴 수 있고, 과하지 않은 수준에서 변주를 꾀하는 공간도 여럿 눈에 들어오게 됐다. 여기에 미술제나 음악제 같은 ‘축제’가 더해지면 거리의 표정은 더욱 생기를 띤다. 현대미술 장터인 아트 페어가 잇따라 열려 그 열기가 좀처럼 식을 줄 모르는 5월의 부산도 그랬다.
올해로 10회를 맞이한 아트부산(Art Busan). 지난 5월 13일, VIP 프리뷰를 시작으로 주말까지 이어지는 나흘간의 아트 페어가 부산 벡스코 전시장에서 펼쳐졌다. 프리뷰 데이부터 북새통을 이루며 ‘완판’ 소식도 여기저기에서 들리더니 국내외 갤러리 1백10곳이 참가한 ‘아트부산 2021’의 공식 방문객은 8만 명을 넘겼고 작품 판매액도 3백50억원대로 역대급 기록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불과 한 달 전에 부산화랑아트페어(BAMA)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는데, 아트 페어를 향한 열기가 지치기는커녕 더 솟구친 모양새다. 아시아 지역 아트 페어의 선두 주자로 꼽히는 아트 바젤 홍콩의 2019년 관람객이 8만8천 명 수준이었는데, 이 수치만으로 단순 비교하기는 힘들다고 해도 아트부산의 성장세는 단연 주목할 만하다. 물론 비단 부산만의 ‘특수’는 아니다. 지난해 팬데믹의 충격으로 확연히 움츠러들었던 것과 달리 요즘 국내 미술 시장의 분위기는 꽤 좋은 편이다. MZ세대의 가세 등으로 문화 예술 향유층의 저변이 넓어진 영향도 있지만 투자처를 찾아 헤매는 시중 유동성이 ‘보복 소비’의 협공까지 등에 업고 미술 콘텐츠에 대한 전반적인 수요 상승으로도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시장에 불어오는 순풍에 취해 아트부산을 가리켜 ‘한국의 마이애미’라느니, 아트 바젤 홍콩과도 자웅을 겨루게 됐다느니 하는 식의 들뜬 자화자찬은 섣부른 감이 있는 듯하다. ‘바젤’이라는 글로벌 브랜드를 내세운 아트 바젤 홍콩의 판매액이 1회 행사당 비공식적으로 1조원대에 이른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물론 명실공히 아시아를 대표하는 ‘아트 허브’로서 지위를 누려온 홍콩이 여러모로 위기에 봉착한 것은 맞지만, 그 틈을 타 패권을 노리는 도시들이 아시아 곳곳에 꽤 포진해 있다(여기에는 내년에 글로벌 아트 페어 프리즈를 유치하는 서울도 포함된다). 특히 아트 페어에는 ‘수명’이 있다는 논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역 아티스트와 인프라, 시장 규모가 두루 받쳐주지 않은 채 그저 ‘글로벌’만 지향하며 달리다가는 수명이 급격히 단축될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구미 지역의 명성 있는 갤러리들이 참가하면서 ‘지역 페어’에서 글로벌 요소를 어느 정도 가미한 균형 있는 구성을 갖추게 된 아트부산은 꾸준한 변신의 노력 속에서 10회 차에 이른 현재에는 또 다른 도약을 타진할 수 있게 됐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타데우스 로팍, 리만머핀, 에스더 쉬퍼 같은 글로벌 갤러리에서 들고 나온 이른바 ‘블록버스터’ 작품만이 아니라 거장의 소품이나 판화라든지 경쟁력 있는 중견, 신진 작가 등 다채롭고 조화로운 구성이 MZ세대를 아우르는 확대된 컬렉터층의 구미를 자극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관객이 움직이면 벽에 여러 색의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작품의 일부가 되는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미디어 작품이라든지 커다란 물고기 모양의 알루미늄 풍선과 노닐 수 있는 필립 파레노의 작품, 한국화 기법으로 현대적인 콘셉트의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들의 전시 같은, 올해 호평을 받은 다수가 즐길 수 있는 콘텐츠도 그저 ‘그들만의 장터’가 아닌 ‘우리의 축제’로 커나갈 수 있는 동력이 아닐까 싶다. 아트 바젤 홍콩처럼 한 점에 수백억원씩 판매되는 작품이 나오지 않더라도, 보다 많은 이들이 즐기고 거래할 수 있고 값비싼 부스값 탓에 많은 갤러리들이 울상 짓지 않는 보다 대중적인 플랫폼으로 완만히 성장해나갔으면 하는 게 부산을 ‘애정’하는 도시 산책자로서의 바람이기도 하다.
# ‘동시대’를 고민하는 미술관의 역할
2000년대 중반, 축구 영웅 박지성이 활약했던 영국 맨체스터에 경기를 보러 갔다가 지역 화가의 존재를 접한 기억이 있다. 맨체스터 출신 화가 L. S. 라우리(L. S. Lowry,1887~1976)라는 인물이다. 지역 토박이 화가라 한국에서는 낯선 이름이었는데(심지어 당시 런던에서도 별로 알아주지 않았지만 나중에 <미세스 라우리 & 선>이라는 영화가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라우리의 자취를 훑어볼 수 있는 미술관을 품고 있는 복합 문화 공간 ‘더 라우리’는 맨체스터의 명소였다. 이렇듯 어떤 지역이나 도시든 글로벌 슈퍼스타가 아니더라도 현지인들이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작가군이 있다. 그동안 ‘아카이브’에 몰두할 만한 여유가 없어 간과했다가, 어떤 계기로 연구 작업이 이뤄지면 훗날 미술사적으로도 가치 있는 ‘발견’이나 ‘재조명’이 되는 사례가 나오기도 한다. 수년 전부터 부산의 근현대미술사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기획전을 펼쳐오고 있는 부산시립미술관의 행보가 반갑고 다행스럽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산시립미술관은 2018년 개관 2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로 <모던·혼성: 1928-1938>과 <피란수도 부산-절망 속에 핀 꽃>을 열었고, 2020년에는 1960~70년대 부산 미술을 돌아보는 전시를 열었다. 그리고 올해는 1980년대 의미 있는 역사적 발자취를 남긴 시대정신을 ‘형상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바라보는 <거대한 일상: 지층의 역전>을 진행 중이다. 흔히 ‘민중미술’의 시기로 인식되는 1980년대 한국 미술을, 부산의 형상미술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면 좀 더 입체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지 않겠냐는 의도에서 출발한 기획전이다. 김난영, 김은주, 노원희, 안창홍, 송주섭 등 26명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데, 유무명을 떠나 전반적으로 작품 세계가 흥미롭다(김경미 학예연구사가 35번이나 출장을 다니면서 새롭게 발견한 작품들도 포함돼 있다). 그중 8명이 강렬한 감성을 주는 여성 작가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고인이 된 송주섭의 테라코타 작품과 한 공간에 콩테 작품을 내건 김은주 작가는 “ 우리의 역사를 다루는 전시가 열려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이것이 초석이 되어 다른 지역 작가들을 해석하는 전시가 또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회를 밝혔다.
사실 부산은 제2의 도시라는 이름에는 걸맞지 않게 랜드마크가 될 만한 미술관이 부족했는데, 2015년 시립미술관에 이우환의 ‘공간’이 별관으로 자리 잡고, 2018년 을숙도에 부산현대미술관이 문을 열면서 지형이 확 달라졌다. 부산비엔날레의 주 전시장이기도 한 부산현대미술관은 동시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를 읽어내는, 갖가지 문제를 둘러싼 담론의 장을 마련하기 위한 다면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 ‘동시대성’을 추구하는 미술관들은 미술관의 정체성, 미술관이 다루는 예술의 범주나 미술관이 생산하는 관람의 양태 등을 고민하기 마련인데, 부산현대미술관은 그런 역할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행보를 보여왔다. 얼마 전 개막한 생태 환경전 <시간여행사 타임워커>는 국내에서는 최초로 관람객이 ‘미션’을 해결해야 전시 여정을 마칠 수 있는 ‘방 탈출’ 게임을 활용한 기획전을 선보여 새로운 방식의 ‘참여형 전시’를 시도했다. 놀이형 전시지만 과거 쓰레기매립장이던 을숙도의 특수한 배경 등을 반영해 ‘환경’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온 만큼 생태 환경을 주제로 한다. 더불어 진행 중인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은 아예 제작, 포장, 운송, 설치, 철거 등 전시 과정을 아우르는 모든 활동에서 친환경적 실천을 시도한 기획전이기도 하다.
# 새로운 문화 지구의 꿈틀거림
요즘 부산의 거리 풍경을 살펴보노라면 “카페는 도시의 혈관을 타고 흐른다”고 한 벤 윌슨이라는 저자의 말이 떠오른다. 특히 부산에 뿌리를 둔 텐퍼센트나 컴포즈 같은 프랜차이즈 커피 브랜드나 서면, 해운대, 기장 일대의 개성 어린 카페들을 보면, ‘뜨는 동네에는 역시 그곳에만 있을 법한 카페가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로컬 비즈니스’의 중요성을 다룬 책을 꾸준히 시리즈로 펴낸 모종린 교수가 최근의 저서에서 “머물고 싶은 동네에는 반드시 빵집이 있다”고도 했지만, 부산의 거리나 골목길을 산책하다 보면 매혹적인 베이커리가 많다. 최근에는 수영구 망미동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엿보인다. 옛 고려제강의 공장을 복합 문화 공간으로 멋지게 되살린 F1963이 이 동네의 명소가 된 지 벌써 몇 년이 흘렀는데 그새 국제갤러리 부산 지점이 들어섰고, 최근에는 현대모터스튜디오의 브랜드 체험관이 입성하기도 했다. 그 여파로 망미동 일대에도 맛집이나 카페, 그리고 갤러리가 점차 눈에 띈다. 그래서 부산에 가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 갤러리 전시를 보러 망미동을 찾게 된다. 올봄에는 개념미술로 단단한 입지를 쌓아온 안규철의 개인전 <사물의 뒷모습>이 열리고 있기에(국제갤러리 부산 지점에서 오는 7월 4일까지), 발품을 파는 게 필수였다. 대학교수 생활을 병행하다 지난해 정년퇴직해 전업 작가가 된 그의 이번 전시는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그의 작품 여정을 수놓은 다채로운 구성으로 작은 회고전을 연상시켰다. 미술지 기자 출신이기도 한 그는 늘 ‘쓰는’ 사람으로서 태도를 견지해왔다는데, 전시명과 같은 <사물의 뒷모습>이라는 새로운 단행본도 얼마 전 출간됐다.
F1963을 ‘찍고’ 인근을 탐색하다 보면 불과 몇 년 전에 비해 한결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하게 된다. 딱히 계획적으로 생겨나지 않은 데서 느껴지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조화가 아직은 무르익지 않았지만 매력적이다. 그중에는 다시 찾게 될 듯한 느낌이 드는 오브제후드(Objecthood)라는 갤러리도 있다. 지난해 여름 건축 설계 사무소 PDM 파트너스 건물에 들어선 이래 ‘계절’을 주제로 기획전을 잇따라 펼치고 있는 이 갤러리는 회화, 조각, 공예 등 다양한 범주의 국내외 신진 작가를 소개하는데, 지역 작가의 참여에도 의미 있는 비중을 두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봄의 조각(Piece of Spring)>만 해도 6명 중 절반이 부산 출신 작가다(이은, 심종후, 정호석).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정원의 녹음과 어우러진 작품들이 ‘봄’의 생명력을 느끼게 해, 잠시 발걸음을 멈춰봐도 좋을 듯하다. 누가 알랴. 운이 좋아 대기표를 받고 줄을 서야 하는 유명한 망미동의 텐동 집도 더불어 ‘섭렵’할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