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틴 퀙(Justin Quek)-싱가포르가 사랑하는 셀러브리티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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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01, 2019

글 고성연

출장으로, 관광으로 많은 이가 찾고 있는 싱가포르의 명물 마리나 베이 샌즈(Marina Bay Sands). 이 복합 리조트가 생겼을 때 미식업계에서 화제가 된 인물이 있다. 당시 마리나 베이 샌즈 57층에 자리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자리를 거머쥔 싱가포르 출신의 셰프 저스틴 퀙(Justin Quek). 배를 타는 선원으로 시작해 싱가포르 미식계에 한 획을 그은 레스토랑 ‘레 자미(Les Amis)’를 열었고, 이어 세계적인 정·재계 명사들의 만찬을 진두지휘할 정도로 명성 높은 셰프가 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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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크리트어로 ‘사자의 도시(Singapura)’라는 뜻을 지닌 동남아시아의 작은 섬나라 싱가포르. 오늘날에는 관광지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사실 이 도시국가는 반세기 전만 해도 이런 곳에 과연 사람이 살 수 있는지 의심이 들 만큼 낙후된 곳이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1963년 말레이시아 연방의 구성원으로 독립했지만 불과 2년 만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연방 탈퇴’라는 난관을 맞닥뜨렸다. 당시만 해도 경제나 사회 인프라, 교육 등 싱가포르의 여건은 지금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하지만 알려졌다시피 싱가포르에서 ‘국부(國父)’로 일컬어지는 초대 총리 리콴유(Lee Kuan Yew)가 압도적인 리더십으로 경제성장을 이끌어내면서 이 보잘것없던 섬나라는 오늘날 세계적인 강소국으로 자리매김했다. 필자는 1997년 외환위기가 발발하기 직전 여름, 싱가포르에 한 달가량 체류했던 적이 있는데 당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세 가지 있다. 하나는 겉포장만 그럴싸한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매우 똑똑한 엘리트 공무원과 지식인층, 그다음은 ‘유리벽’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뭔가 답답하지만 그래도 안전하고 깨끗한 환경 그리고 마지막은 무엇보다 맛난 음식. 1인당 국민소득 수준이 높은 다문화, 다인종 국가답게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 페라나칸 등의 다채롭고 풍부한 음식 콘텐츠가 발달해 있었다.
하지만 땅덩이가 작은 싱가포르가 처음부터 이른바 MICE(Meeting·Incentive trip·Convention·Exhibition·Event) 산업의 중심지이자 관광지로 부각된 건 아니었다. 미래 성장을 위한 돌파구로 오픈 카지노를 허용하고 호텔, 컨벤션 홀, 쇼핑몰 등 각종 인프라와 그 속을 채울 콘텐츠를 갖추면서 물꼬를 튼 것이다. 그 핵심에는 이제는 싱가포르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마리나 베이 샌즈가 있다. 하늘 향해 뻗어 있는 3개의 초고층 건물 위에 배 모양의 구조물을 지붕처럼 얹은 ‘스카이 파크’로 유명한 독특한 외관의 복합 리조트. 필자가 싱가포르를 다시 가보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 역시 학창 시절의 추억도 있지만 이 인상적인 랜드마크를 직접 보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싱가포르에 간다면 이 랜드마크와 더불어 유명세를 떨치는 한 셰프를 만나고 싶었다. 싱가포르 파인다이닝 업계의 선구자로 꼽히는 저스틴 퀙이 바로 그 인물이다.


마리나 베이 샌즈를 미식으로 수놓고 있는 스타 셰프
1962년생으로 싱가포르 출신인 저스틴 퀙은 30년 넘도록 싱가포르는 물론 방콕, 타이베이, 베이징, 상하이 등에서 활약해온 스타 셰프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름값 때문에 그를 만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저스틴 퀙과의 인연은 2012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샴페인 브랜드 초청으로 방문한 호주 출장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업무로든 사적으로든 얽힐 만한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귀국길 경유지인 시드니에서 예기치 않은 동행을 하게 됐다. 그에게는 일행이 있었지만 선뜻 손을 내밀어준 덕분에 현지 맛집을 탐방하고 해안가의 아름다운 야경도 즐기는 아주 ‘영양가 있는’ 하루를 보냈다. 사실 당시에는 미식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고, 그의 이름도 처음 접했지만 알고 보니 마리나 베이 샌즈 57층에 있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스카이 온(Sky on) 57’을 꾸리고 있는 싱가포르의 유명 셰프였던 것. ‘소탈하고 친절한 씨’는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점차 미식 세계에 눈을 뜨면서 그의 요리도 궁금해졌다. 그로부터 6년 뒤, 마침내 싱가포르를 찾을 일이 생기면서 저스틴 퀙 을 다시금 만나게 됐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동안 그는 스카이 온 57을 떠나 마리나 베이 샌즈에 있는 새로운 장소에 터를 잡았다. 하나는 모던 아시안 요리를 내세운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시누아즈리(Chinoiserie)’,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부담없이 싱가포르 현지식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캐주얼 레스토랑 ‘저스틴 퀙(JustIN-Flavours of Asia)’. 시간이 훌쩍 흘러버린 탓에 서로 얼굴이 잘 기억나지도 않았지만 ‘스토리가 있는 미식’이라는 매개체로 인연을 이어가게 된 셈이다. 그런데 그의 대표 메뉴 중 하나인 ‘푸아그라를 곁들인 샤오룽빠오’를 음미하면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저스틴 퀙 자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스토리가 풍부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언뜻 봐도 중국계 화교로 여겨지는 외모의 그는, 광저우에 속하며 미식으로 유명한 차오저우(潮州) 계통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차오저우 요리는 중국 남부 요리를 대표하는 광저우 요리의 한 갈래로 제비집, 샥스핀 같은 메뉴가 유명하다). ‘쓰짜이광저우(食在廣州, 먹는 것은 광저우에서)’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광저우 요리의 명성은 대단하다. 아무래도 그런 혈통 덕분에 일찍이 미식을 접하고 자랐던 것일까? “전혀 아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무려 12명의 아이가 있는 대가족의 막내였던 그는 어릴 때부터 모친을 도와 과일 노점상을 꾸렸다고 한다. “거기서 내가 장사를 배운 것이죠. 의식적인 건 아니지만 손님을 상대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 게 있잖아요.”


만다린 오리엔탈의 견습생으로 시작한 셰프의 여정
저스틴 퀙이 셰프가 된 계기는 순전히 우연이었다. 10대 후반, 군 복무를 마치고 난 뒤 그는 선원이 되고자 했다. 이유는 단순 명료했다. “세상을 둘러보고, 여행을 하고 싶어서”였다고. 과일을 팔 때 다양한 외지인들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싹튼 열망이었다. ‘저스틴 퀙’이라는 이름도 본명이 아니고 자주 들르던 한 손님이 붙여준 것이라고(나중에는 ‘저스틴 퀙’이라는 이름을 공식 등록했다). 그런데 그에게는 선원이 될 만한 토대가 전혀 없었고, 그래서 청소나 설거지 같은 일을 도우면서 교육도 받을 수 있는 ‘막내’로 들어갔다. 기초 없이 무작정 뛰어들었지만 워낙 부지런하고 무엇이든 빨리 배우는 그의 ‘일 센스’와 성실한 태도 덕분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렇듯 선원 생활을 해나가던 그는 간단히 빵을 만드는 일 등을 도우면서 요리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요리사라고 할 수는 없을 정도의 실력이었지만 주방에 있을 때면 항상 즐거웠다고. 그런 그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한 윗사람이 뱃사람보다는 요리를 제대로 배워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건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과감히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선원의 급여가 꽤 좋은 편이었지만 과감히 박차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섰다. 그는 일을 하면서 학원에서 정식으로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주는 곳을 찾았고 싱가포르에 있는 수많은 브랜드 호텔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런 자리는 쉽게 얻을 수 없었고 그래서 일단 한 작은 호텔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런 지원을 해줄 용의가 있는 호텔을 계속 찾았고, 운 좋게도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매니저와 면접을 볼 수 있게 됐어요. 만다린 오리엔탈이 아직 싱가포르에 호텔을 오픈하기 전이었어요. 대개는 바로 ‘안 된다’는 답을 들었는데, 만다린 오리엔탈에서는 그나마 인터뷰를 허락했던 거죠.” 호텔에서는 그런 조건이라면 급여를 많이 줄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요리를 배울 수만 있다면 급여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열의에 그들의 마음이 움직였고, 그렇게 저스틴 퀙 은 요리사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게 됐다. 일이든 학원 생활이든 열정적으로 임한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선원 생활 막판에 받았던 급여의 5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는 돈을 받았지만 그는 그보다 훨씬 더 값진 기회를 낚아채게 됐다. 우수한 성적의 견습생에게 주어지는 특전으로 해외 연수를 받게 된 것이다. 만다린 오리엔탈 방콕이 그 기회의 땅이었다. “만다린 오리엔탈 방콕은 세계 최고였어요. 이때 제 요리사 커리어가 비로소 시작된 거죠.” 그곳에서 저스틴 퀙은 그의 첫 은사라고 할 수 있는 셰프 노버트 코스트너(Norbert Kostner)을 만났다. 제자의 재능과 태도를 높이 평가한 코스트너의 열성 어린 지도로 그는 프렌치를 비롯해 다양한 요리를 접하면서 미식의 세계에 눈을 떴고, 이후 싱가포르로 복귀했다. 이때가 1985년, 저스틴 퀙은 불과 23세였다(먼 훗날 그는 만다린 오리엔탈 방콕에 자신의 이름을 건 요리를 일주일간 선보이는 셰프로 초청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건국의 아버지’ 리콴유 총리의 생일 만찬을 맡다
저스틴 퀙의 인생에는 또 다른 귀인이 있다. 프랑스 출신의 유명 셰프 베트랑 랑글레(Bertrand Langlet). 엄격하고 완벽주의를 추구했으며 창의적이기도 했던 스승 밑에서 그는 프랑스어 수업을 듣고, 요리의 다양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베트랑 랑글레는 ‘원조’인 프랑스에서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준 인물이기도 했다. 1991년, 저스틴 퀙은 프랑스로 떠난다. 1년에 걸쳐 파리, 런던, 남프랑스 등 여기저기에서 돈을 받지 않고 일을 하면서 요리 본토의 지식과 노하우를 닥치는 대로 흡수했다. 돈을 받지 않고 일했기에 선원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모아뒀던 돈을 다 쓰고도 모자랐다. 고되지만 값진 경험을 쌓고 귀국한 그는 잠시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가 마침 공석이었던 주 싱가포르 프랑스 대사관의 셰프 자리를 맡게 된다.
“당시 대사가 제 요리를 처음 맛보더니 아주 흡족해했어요. 도대체 어디에서 프랑스 요리를 배웠느냐고 물었죠.” 그렇게 2년을 일하던 중 일생일대의 ‘손님’을 마주치게 된다. 바로 리콴유 총리였다. 원래는 프랑스 대사관 소속이라 정부 관료를 위한 요리를 할 수 없었지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총리의 생일 만찬이었다. 그 후로 저스틴 퀙은 리콴유 총리가 2015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무려 21년 동안 그의 생일 만찬을 책임졌다. 첫 만찬 메뉴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물론’이라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휴대폰 사진을 보여줬다. “첫 만찬을 준비할 때 정말 신이 나기도 했어요. 하지만 동시에 엄청 떨리기도 했죠.”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회상에 잠겼다. 그의 요리를 좋아했던 리콴유 총리는 중요한 만찬이 있을 때 자주 그를 불렀고, 덕분에 세계적인 인사들을 위해 요리 솜씨를 발휘할 수 있었다. 장쩌민 중국 국가수석,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모리타 아키오 소니 회장, 영화배우 조디 포스터와 주윤발 등이 그 목록에 있다. 냉철한 카리스마로 유명했던 리콴유 총리지만 그에게는 따스한 면모와 의리를 지닌 사람으로 기억된다. “참 멋진(amazing) 분이었어요. 나중에 레스토랑을 열었을 때 초청했는데 기꺼이 와주셨지요. 그분은 (맨몸으로 시작해 프랑스까지 건너갔던) 제 인생 스토리를 알고 계셨고, 다른 분들에게 이야기해주기도 하셨어요.”
사실 저스틴 퀙은 요즘 흔한 스타 셰프들처럼 초반부터 두드러지는 화려한 스펙이나 배경과는 거리가 먼 이력의 소유자다. 어쩌면 결코 녹록지 않았던 환경의 싱가포르를 끌어올린 리콴유 총리는 그의 손맛도 당연히 마음에 들었겠지만 험로 같은 인생 여정을 꿋꿋이, 그리고 낙천적으로 개척해온 ‘자랑스러운 싱가포르인’으로서도 그를 아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씩씩하게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베이징에서도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고, 맛도 있고 영양가도 있으면서 벤딩 머신에서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즉석 간편식을 개발해 싱가포르는 물론 일본, 말레이시아 시장에서 곧 선보일 계획도 있다. 혹시 마리나 베이 샌즈를 방문할 일이 있다면 자신의 레스토랑 두 군데(http://justinquek.com)를 오가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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