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경계를 넘나드는 밀레니얼 세대, 딱딱했던 미술계 지형도 바꿔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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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 2016

에디터 고성연 |일러스트 하선경

세계적인 아트 경매업체 소더비와 한류 아이콘 빅뱅의 탑이 손을 잡았다. 오는 10월 3일 홍콩에서 열리는 소더비 경매에 탑이 큐레이터로 참여해 아시아 현대미술품 25여 점을 내놓는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 화백 집안의 후손이기도 한 탑이 아트 애호가라는 사실은 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큐레이터라니, 파격 아니냐’는 시선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경계를 허물어뜨리면서 다채로운 영역에서 재주를 발휘하는 밀레니얼 세대 아티스트답게 당차고 생기 넘치는 탑의 행보는, 변혁의 시대에도 유난히 보수적이고 느릿느릿한 미술계에 여러모로 참신하고도 의미 있는 파장을 던져줄 수도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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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도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시네마 천국>의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연출한 영화 <베스트 오퍼(The Best Offer)>에는 세기의 경매사이자 미술품 컬렉터인 남자 주인공(제프리 러시 분)이 등장한다. 흰 머리 나부끼는 노인이 도록 일만 들이파왔지만 사실 그에게도 삶의 낙으로 삼고 있는 은밀한 사생활이 있다. 자신의 집에 설치한 ‘비밀의 방’ 벽면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초상화 속 여인들을 남몰래 감상하는 취미다. 부와 여유, 식견까지 갖춘 나이 지긋한 ‘올드 제너레이션’ 지식인이 뒷방에서 은밀하게 즐기는 사적인 취미. 영화에서 묘사하는 극적인 유형까지는 아니더라도 흔히 ‘아트 컬렉터’라고 하면 이처럼 비밀스러운 이미지가 연상되는 건 사실이다. 실제로 뭔가 감출 게 많아서 남모르게 취미 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조용하게 컬렉션을 완성해나가면서 웬만해서는 과시하지 않는 겸양이야말로 훌륭한 컬렉터가 갖출 미덕으로 여기는 일종의 고정관념도 존재했다. 기성세대 컬렉터들 중에는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라면 공연히 자랑하기도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고, 빼어난 컬렉션을 갖췄다 할지라도 노년기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기부의 형태든, 미술관 설립의 형태든 사회에 공개하고 대중과 공유하는 수순을 밟는 게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경계가 무너지는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에는 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미술품을 사고파는 방식은 물론 아트를 바라보고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다양해져서일까? 요즘 미술계에서는 당당하게 컬렉션을 공개하고 대중과 활발하게 소통하며 세대교체의 조짐을 알리고 있는 젊은 컬렉터들의 활약상이 돋보인다.
그 변화의 흐름을 이끄는 세력은 소비의 핵심 계층으로 부상 중인 소위 ‘밀레니얼 컬렉터’들. 21세기를 주도하는 ‘소프트 파워’의 핵심 축으로 일컬어지는 문화에 초점을 두는 이들은 국적이나 장르를 크게 개의치 않고 컨템퍼러리 아트를 섭렵하는데, 자신의 취향이나 컬렉션을 스스럼없이 드러낼뿐더러 ‘아트’라는 연결 고리 속에서라면 적극적으로 소통과 교류를 모색한다. 이들은 스스로의 경계도 가뿐히 무너뜨린다. 엄연히 직업을 갖고도 컬렉터로, 갤러리스트로, 심지어는 아티스트나 큐레이터로도 도전장을 내민다. 특히 대중문화계에서 다양한 재주를 뽐내는 신세대 글로벌 스타들이 앞장설 경우에는 그 파장이 꽤나 클 수밖에 없다.

글로벌 현상으로 자리 잡은 밀레니얼 세대의 활약, 빅뱅의 탑도 흐름에 동참
얼마 전 한류를 이끄는 아시아의 팝 아이콘, 빅뱅의 탑(최승현)이 #TTTOP이라는 이름을 내건 소더비 경매에서 큐레이터로 나선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신선하다’는 반응도 많았지만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꽤 있었을 듯하다. 단순한 소장품 공개가 아니라 큐레이터라니, 아무리 마케팅이 중요해도 그렇지 과도하지 않느냐는, 다소 삐딱한 맥락에서 말이다. 물론 파격적이라 할 수는 있다. 크리스티와 함께 세계 경매 시장의 양대 산맥으로 2백5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소더비 아닌가. 유명 연예인의 소장품을 다룬 적은 있어도 ‘큐레이터’라는 개념을 도입한 건 소더비 홍콩 지사가 설립된 이래 초유의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경계를 사뿐히 넘나들면서 위세를 떨치는 밀레니얼 세대의 활약은 이미 글로벌 무대를 달구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술계에서는 대개 10만~2백만달러어치의 미술품을 사들이는 40세 이하의 젊은 세대(1980~2009년생)를 의미 있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밀레니얼 컬렉터로 정의한다. 향후 소비 시장을 주도할 이들은 다양한 네트워킹, SNS 등 디지털을 활용한 적극적인 소통, 지역이나 장르를 따지지 않는 ‘오픈 마인드’, 좋아하면 남의 눈치를 별로 보지 않는 주관 등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전통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러면서도 아날로그 현장을 꺼리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 융통성도 갖추었다.
대표적인 밀레니얼 세대의 아트 피플을 꼽자면 중화권에서는 아트를 곳곳에 녹인 복합 공간 K11과 아트 재단 K11 파운데이션을 이끌고 있는 홍콩 출신의 30대 부호 에이드리언 청(Adrian Cheng)이 있다. 상하이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세계 각지의 미술관을 후원하고,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그는 1965년생 중국 작가 장언리(Zhang Enli) 전시의 큐레이터로 나서기도 했다. 중국 난징에 도시의 다양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창들이 인상적인 건축물 시팡 아트 미술관을 부친과 함께 지은 션루(Sean Lu) 역시 30대 초반이다. 러시아에는 젊은 대중을 주요 타깃으로 잡은 가라지 현대미술 센터를 설립하고 아트 잡지를 펴낸 모델 출신의 다샤 주코바(Dasha Zhukova)가 있다. 러시아 석유 재벌로 프리미어 리그의 축구 클럽 첼시 구단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파트너로도 유명한 그녀는 20대부터 아트계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켜왔다. 힙합 음악의 기수인 미국 스타 퍼렐 윌리엄스는 연령대로는 밀레니얼 세대가 아니지만 누구 못지않게 경계 타파의 모범이 되고 있는 인물. 프랑스의 유명 갤러리 페로탱과 함께 2009년, 스위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아트 페어인 아트 바젤에서 무라카미 다카시의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한 데 이어 2014년에는 <Girls>라는 전시의 공동 큐레이터로 활약하기도 했다.

슈퍼 팬과 전문가의 경계가 무너지다, 디지털 파급력 무시 못해
무엇이든 미치도록 좋아서 하는 것만큼 무서운 힘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물론 컬렉터라면 예나 지금이나 단순한 단골 고객 수준이 아니라 열성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주체 의식까지 지닌, 전문가 못지않은 ‘슈퍼 팬’이 많을 터다. 하지만 ‘디지털’이 여러모로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증폭제 역할을 하는 요즘의 슈퍼 팬들은 막강한 인플루언서 대접을 받고 있다. 게다가 대중적인 스타를 비롯해 디지털 세상에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문화 셀럽’의 파급력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지난해 영화배우 피어스 브로스넌이 한 경매 회사를 방문했다가 마음에 드는 디자인 체어 ‘록히드 라운지’의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그로부터 몇 주 뒤 열린 경매에서 이 작품은 무려 2백40만파운드에 팔리면서 기록을 깼다. 작품의 수준이 뒷받침돼야 하고, 자칫 마케팅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업계 종사자들로서는 어찌 귀가 쫑긋 서지 않겠는가.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주요 갤러리나 경매 회사가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이 큰 데다 소통에도 적극적인 ‘젊은 피’ 수혈에 공을 들이는 건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는 영리한, 아니 어쩌면 필연적인 행보다.
탑과 소더비의 협업도 마찬가지다. 탑은 디자인, 아트, 가구 등 전방위적으로 수집을 해온 예술 애호가일 뿐만 아니라 5백만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거느리고 있는 글로벌 스타인 만큼 누가 봐도 매력적인 대상이 아닐 수 없다(특히 예술이 생소한 이들에게도 자연스러운 ‘입문’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번 경매는 아시아의 젊은 컬렉터들을 기념하고 신진 예술가를 지원한다는 취지(판매 대금의 일부를 아시아문화위원회에 기부할 예정이다)를 밝혔을 뿐 거창한 명분을 내걸지는 않았다. 지난 1년 동안 정성 들여 준비했다는 이 경매에 대해 소더비 아시아 현대미술 담당 디렉터 이블린 린(Evelyn Lin)은 “생기 넘치는 아시아 미술계를 뒷받침하는 열정적인 젊은 컬렉터 그룹의 기상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면서 “이들은 여러 문화와 장르에 걸친 현대미술을 추구하면서 폭넓고 다양한 컬렉팅을 한다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베이징 UCCA 미술관의 설립자 울렌스(Ullens) 컬렉션을 위한 기획 경매를 비롯해 세계 기록을 수립한 수많은 경매를 꾸려온 베테랑 린은 “아시아와 서구 현대미술의 기성 작가와 떠오르는 신성을 아우르는 이번 경매가 젊은 아시아 컬렉터들의 독특한 특성을 보여줄 것”이라고 자신했다.

공유하고 소통하는 컬렉팅 문화, 삶을 즐기는 하나의 방식
실제로 이번 경매 출품작의 스펙트럼은 동서양과 신구를 가로지른다. 아시아 세션에서는 고 김환기 작가의 수작을 비롯해 이우환, 백남준, 박서보, 정상화 등 한국의 대가들부터 고기타 도무, 박진아, 허샹위, 사이토 모코토 등 한·중·일의 신진 아티스트들이 있고, 서양 세션에서는 앤디 워홀, 조지 콘도, 루돌프 스팅겔, 시그마 폴케 같은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 떠오르는 별 조나스 우드, 전설적인 사진가 데이비드 라샤펠의 컬렉션에서 나온 키스 해링의 희귀작도 포함돼 있다. 탑의 친구이자 일본의 컬렉터 마에자와 유사쿠는 “우리는 좋은 친구이기도 하지만 컬렉팅 문화를 함께 즐긴다”며 자신의 소장품인 장 미셸 바스키아의 대표작 ‘보병대(Infantry)’(1983)를 선뜻 내놓아 공유를 선호하는 밀레니엄 컬렉터 세대의 우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TTTOP에 선보일 25여 점 작품의 총 추정가는 1백30억원대.
“예술은 삶을 바꾸는 힘을 지니고 있다.” 탑은 이번 경매에 앞서 이런 말을 했는데, 실제로 예술은 많은 이들에게 전혀 다른 삶의 차원을 선사한다. 컬렉터가 되는 순간 가는 곳과 만나는 사람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물론 순수하게 좋아서 즐기며 시작된 취미지만 ‘아트’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사회적 관계를 쌓으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탄탄한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기도 하다. 삶을 즐기는 방식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만큼 강력한 유대감은 좀처럼 찾기 힘들 테니 말이다. 그래서 컬렉터든 갤러리스트든 일부 아트 종사자들은 일부러 비싼 작품을 구해 유명세를 쌓고 네트워크를 만들려는 경우도 많다. <아트뉴스>에 소개된 린한(Lin Han)이라는 젊은 중국인 갤러리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그저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취급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저한테는 팔 게 없다는 소리를 들었죠. 이제는 사람들이 제 이름을 알도록 아주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사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실제로 그는 중국 현대미술 대가 쩡판즈의 회화 작품을 5백만달러 넘게 주고 구입했다.

아트의 대중화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까?
어쨌거나 아트가 점점 더 많은 이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젊은 세대가 주체적으로 동참하면서 단순한 투자 목적보다는 ‘즐기려는’ 의도가 더 강한 미술 애호가들이 많아지는 현상은 반갑다. 특히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도 다양한 예술 작품을 구매할 수 있는 채널이 많아지면서 고소득 전문직과 중산층을 중심으로도 애호가층이 확대되어 아트의 대중화라는 명제가 좀 더 현실적으로 반영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싹트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은 그중에서도 미술 시장의 저변을 넓힐 수 있는 강력한 도구다. 아직 온라인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 미술품 총 판매액을 기준으로 할 때는 크지 않은 수준이지만(2014년 기준 6%), 짧은 역사를 감안하면 꽤 의미 있는 수치인 데다가 성장률이 두 자릿수의 성장률을 기록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 시장에서는 1천~5만달러대 작품이 가장 활발하게 거래된다는 통계가 있듯이,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초보 컬렉터들에게 미술 시장으로 부담 없이 진입하는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더비의 이블린 린 디렉터는 “올해 상반기만 놓고 볼 때 소더비의 온라인 판매액이 9천만달러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년 동기 대비 27% 성장한 실적이고 경매 건수(lot)로 치면 무려 54% 증가한 수치”라면서 온라인의 가능성은 정말로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특히 새로운 고객의 유입이 고무적이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7월에 온라인상에서만 이뤄지는 5건의 경매를 진행했는데, 그중 두 건은 100% 낙찰률을 기록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그중 33%가 신규 고객이었다는 점이었어요.” 이렇듯 ‘불특정 다수’가 대상이 될 때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수요의 저력은 소수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아트를 둘러싼 세상에서도 온라인의 잠재력이 그저 기대감에만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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