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to Ba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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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03, 2014

에디터 고성연 (밀라노 현지 취재)

세상이 어수선해서 그런지 단단한 ‘기본’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 보이는 요즘이다. 리빙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4월 밀라노에서 열린 지상 최대 디자인 행사 ‘iSaloni 2014’에서도 소재와 인체 공학적 구조부터 경첩 하나까지, 디자인의 근간을 이루는 세밀한 요소들을 소홀히 하지 않는, 기본에 충실한 가구와 소품이 빛났다. 그렇다고 미학적 오라가 뒤지지도 않는다. 톡톡 튀는 새롭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비움의 미학’을 바탕으로 한 견고한 내실에서 나오는 창조물의 오라는 지속성도, 중독성도 훨씬 더 강하다는 진리가 새삼 뇌리를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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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로마 바티칸 박물관에서 은은한 회색이 감도는, 녹색과 자줏빛의 조화가 몹시도 아름다운 대리석 바닥을 보고는, 그처럼 빼어난 문화적 유산을 일상에서 누려온 이탈리아인들이 재료와 색채를 잘 쓰지 못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그 대리석 플로어의 색 배합과 무늬만 그대로 활용해도 바로 패션쇼 무대에서 튀어나온 듯한 매혹적인 드레스나 세련된 가구를 금세 빚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견고한 느낌과 차갑고 매끈하면서도 은근한 따뜻함도 품고 있는 특유의 광택은 대자연의 위대함을 절로 인지하게 해준다.이라는 책을 쓴 디자인 이론가인 매기 맥냅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자연의 원리와 패턴, 과정을 알면 더 이상 우연에 기대지 않고 직관에 따라 참신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완성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자연이 주는 메시지를 이미지로 표현하는 능력이 디자인 미학의 관건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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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린 디자인
지난 4월 밀라노에서 펼쳐진 지상 최대의 디자인 축제 ‘iSaloni 2014’에서는 이처럼 소재(material) 자체에서 영감을 얻는 경향이 유난히 눈길을 사로잡았다. 디자인을 고려해 소재를 골랐다기보다는 아예 재료 자체가 디자인의 시발점이 되는 경우도 많았기에 소재의 견고함과 아름다움에 바탕을 둔 수작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리석이 크게 조명받았던 이유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역시 이탈리아 업체와 스타 디자이너의 ‘괜찮은 만남’으로 탄생한 작품이 눈에 띄었다. 스페인 출신으로 수년째 ‘밀라노의 여왕’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가 이탈리아 대리석 브랜드인 부르디(Burdi)와 손잡고 선보인 ‘래빗 컬렉션(Rabbet Collection)’은 파스텔 색조의 오닉스와 대리석이 자아내는 빼어난 앙상블 속에 기하학적 상감무늬가 은은하게 돋보이는 작품이다. 우르퀴올라와 부르디는 지난해 큰 반향을 일으킨 ‘어스퀘이크 5.9 컬렉션(Earthquake 5.9 Collection)’에 이어 다시금 호평을 받았다. 토스카나에 기반한 대리석 업체인 루체 디 카라라(Luce di Carrara)의 근사한 대리석을 활용한 5종의 테이블 ‘솔리드 패턴(Solid Patterns)’도 소재의 미학이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연한 핑크빛과 저마다 다른 회색 등 감탄을 자아내는 색조와 자연미 흐르는 무늬가 멋진 이 테이블 세트의 디자인은 암스테르담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혼성 듀오’ 숄텐 & 바이징스(Scholten & Bajings)가 맡았다. 일본 넨도(Nendo) 스튜디오는 유리를 활용하면서도 마치 대리석 같은 느낌이 나도록 색을 입혀 투명한 기운을 감춘 ‘브러시스토로크(Brushstoke)’라는 작품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이탈리아 명품 가방 브랜드로 알려져 있지만 가구에서도 은근한 강점을 지닌 보테가 베네타는 특유의 절제되고 세련된 분위기를 품은 데다 마감과 소재에 정성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한 우아한 가구 컬렉션을 내놓았다. 투명한 무라노 글라스를 사용하고 전선을 가죽으로 감싼 모양새가 매력적인 LED 램프, 스털링 실버에 플래티넘 계열의 로듐과 루테늄이 어우러져 앤티크한 느낌이 나는 실버 웨어로도 주목받았다. 올해 국내에서도 데스크 용품과 자기(porcelain) 등 홈 컬렉션을 일부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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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기본의 중요성
소재에 대한 집중적인 고찰은 다른 시각에서 보면 ‘기본’을 생각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가구나 인테리어에서도 기본처럼 중요한 게 있을까? 자연이 나름의 절차를 차근차근 밟으며 생성과 소멸을 관장하듯이 인간과 가구, 공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고민하고 내실을 공고히 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그 자체로도 빛이 날 수 있기에 굳이 쓸데없는 기능이나 장식 등 ‘군더더기’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컨대 서랍이라면 최고의 경첩을 활용해야만 부드럽게 열리고 적당한 간격에서 멈출 줄 아는 편리함을 선사할 수 있는 법이다. 이처럼 디자인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과 용도의 관계를 고민하는 것이 바로 디자이너의 기본 자세일 테고 말이다. 앞서 언급한 넨도 스튜디오에서는 이탈리아 명품 가방 브랜드인 콜롬보와 함께 진행한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2014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 선보였는데, 이러한 ‘관계’에 대해 고민하다가 자발적으로 한 가지 컬렉션을 더 제안하게 됐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8 Bags’다. 말 그대로 8개의 백인데, 가로 35cm, 세로 37cm, 핸들 높이 20cm로 동일하지만 1개의 가방과 핸들을 1차원적으로 배열한 뒤 3차원적으로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냄으로써 각기 다른 디자인을 빚어낸 것이다. 콜롬보 특유의 악어가죽 소재와 캔버스 천을 접목한 시도도 재미나고, 미학적으로도 꽤 출중하다. 밀라노 현지에서 만난 넨도의 수석 디자이너 오키 사토는 “패션 브랜드에서 가방을 디자인한 건 처음인데, 그러다 보니 백의 핵심 요소인 본체와 핸들의 관계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기본에 몰두하다 보니 흥미로운 창작물이 탄생한 셈이다. ‘기본의 철학’이 첨단 기술을 적용한 진화를 배제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소파는 가장 소파답게, 조명은 가장 조명답게 뒷받침해주는 첨단의 효용은 가치를 더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디자인을 맡은 깜찍한 LED 램프 깜빠넬로(Capanello)’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디지털 기술을 얼마나 가치 있게 녹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조명이다. 손안에 쏙 들어가는 투명한 ‘스테인드 폴라’ 소재의 이 작은 램프는 맵시도 뛰어나지만 머리 부분을 살짝 누르면 예쁜 종소리가 울리는 매력까지 갖추었다. 깜파넬로는 분위기를 돋우는 탁자 위의 ‘전자 촛불’로도 센스 있게 활용할 수 있지만 잔잔하게 퍼져나가는 불빛이 아기에게 자극적이지 않다는 장점에 힘입어 이미 국내에서도 수유등이나 취침등으로 인기가 무척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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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들에게 바치는 오마주
이처럼 단 하나의 기능이나 장식을 덧대는 일도 사용자를 위한 ‘기본’을 더욱 단단하게 떠받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면 ‘지속 가능한’ 디자인은 따로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명품 의자로 손꼽히는 바르셀로나 체어는 1929년에 탄생했지만 아직까지도 모더니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데,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X자형 강철 다리를 제작하는 공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한다. 금속이라는 소재를 이음매 없이 우아하고 간결한 모양새로 잡아내면서 편안히 의자를 받쳐주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도록 디자인하는 작업이 당시로서는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단지 독창적인 디자인을 내놓는 게 아니라 근본적인 기능에 역점을 둔 ‘완전체’를 빚어내려는 고심이 담겨 있기에 지금까지도 이 의자는 여전히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찰스 & 레이 임스 같은 거장들의 작품이 장수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올해 밀라노에서도 이처럼 ‘전설들’에게 바치는 오마주 작품이 눈에 띄었다.
스위스 명품 가구 브랜드 비트라(Vitra)에서는 한스 코레이가 1939년 스위스 박람회를 위해 디자인한 작품인 ‘랑디(Landi)’ 알루미늄 체어를 다채로운 색조로 내놓았다. 이 가볍고 실용적인 의자는 그동안 살짝 변형되기도 했지만 비트라는 기술력을 동원해 ‘1939 디자인’을 재현해냈으며 일부 공정에서는 로봇을 활용해 가격대도 합리적인 수준으로 맞추었다고 밝혔다. 네덜란드의 스타 디자이너 헬라 용에리위스(Hella Jongerius)는 핀란드의 전설 알바 알토(Alvar Alto)가 세운 디자인 회사 아르텍(Artek)과 손잡고 알토의 401 암체어를 새롭게 선보였다. 이탈리아 브랜드 카시나(Cassina)는 스위스 출생의 건축 거장인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명작 ‘LC4’를 선택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사촌이자 동료인 피에르 잔네레, 건축가 샤를로트 페리앙과 공동으로 작업한 LC4는 움직일 수 있는 좌석과 위치 조절이 가능한 머리 받침으로 구성된 인체 공학적인 라운지 체어로 시대를 넘어서는 세련미를 갖췄다. “좋은 디자인은 뚜렷하고, 위대한 디자인은 투명하다”라는 말이 있다. 거장들의 디자인이 여전히 유효하다 못해 시들지 않는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굳이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 자체로 내면에서 솟아나오는 투명한 오라를 발하기 때문일 것 같다. 디자인 저술가 매기 맥냅이 강조했듯이 아름다움이 겉으로 드러난 자산이라면, 속성은 내면에서 스스로 만들어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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