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꽃 호텔, 진정한 랜드마크로 도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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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 2014

에디터 고성연

<도시의 건축>이라는 명저를 남긴 이탈리아의 건축가 알도 로시는 도시를 가리켜 “시간과 더불어 성장한 건축과 공학의 합작 인공물이자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고 했다. ‘도시의 세기’라 불리는 21세기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는 호텔 역시 종합예술의 면모를 갖춰가는 듯하다. 건축과 디자인, 공학, 예술, 미식, 전시, 쇼핑 등 갖가지 콘텐츠들이 결합된 유기체로 진화하고 있다. 서울, 부산 등 주요 도시의 풍경을 바꾸고 있는 각양각색의 프리미엄 호텔들은 ‘한 시대의 열망을 보여주는 엑스레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도시의 진정한 랜드마크로 거듭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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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훨씬 더 전에 인도에 3주 가까이 머물면서 7개 도시를 돌아다닌 적이 있다. 인구수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인 데다 IT 강국이며 제3세계의 맹주를 자처할 만큼 국제 정치판에서도 한몫을 하는 인도지만 지금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천달러대일 만큼 가난한 데다 빈부 격차가 심한 나라이기도 하다. 정부 초청의 출장이라 ‘토종 브랜드’의 호텔에서 머문다기에 솔직히 굉장히 쾌적한 숙박 시설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웬걸. 향신료 냄새가 솔솔 풍기는 맛깔스러운 음식만큼이나 필자를 반하게 만든 건 이 매력적인 ‘모순의 대국’에서 잉태된 호텔들이었다. 우선 인도 고유의 정서가 느껴지면서도 세련되고 호화로운 맵시가 일품인 뭄바이의 오베로이(Oberoi) 호텔. 찬란한 역사적 전통이 느껴지는 격조 높은 장식, 상층부에서 빼어난 곡선미를 자랑하는 수영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 디자인, 2000년대 초반이었는데도 이미 DVD 플레이어 등 당시로서는 첨단 시설을 객실마다 완벽히 갖춘,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요소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곳으로 기억된다. 가족 경영으로 유명한 오베로이는 그동안 해외에도 더 활발히 진출해 그야말로 세계적인 프리미엄 호텔 브랜드로 성장했다. 인도 최대 대기업인 타타 그룹이 거느린 타지(Taji)는 또 어떤가. 이 호텔 브랜드는 극도의 호사스러움을 자랑하는 궁전 호텔로도 유명하지만, 사실은 각양각색의 포트폴리오를 지니고 있다. 예컨대 인도의 실리콘 밸리로 불리는 방갈로르 소재의 타지는 ‘자연주의’라는 단어를 절로 연상케 하는 더없이 안락하고 평온한 분위기를 지녔기에 지금까지도 푹 파묻혀 깨어나고 싶지 않은 ‘하얀 유기농 면’ 같은 이미지로 떠오른다. 실제로 타지는 2005년 뉴욕의 최고급 호텔 피에르 뉴욕을 인수해 고아한 분위기의 명문 호텔로 자리매김시켰고, 호주 시드니의 W호텔을 사들여 오래된 부두를 살린 재기 넘치는 인테리어가 특징인 디자인 호텔로 탈바꿈시키기도 했다. 바로 수많은 트렌드세터들의 사랑을 받는, 이름처럼 푸른색이 감도는 외벽이 인상적인 블루 시드니(Blue Sydney) 호텔이다.
도시 경쟁력의 밑거름인 랜드마크를 꿈꾸는 프리미엄 호텔
오랜 세월이 흐르면 기억의 편린이 흐려지면서 여행지는 결국엔 한두 개의 이미지로 남곤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인도는 필자에게 IT 강국이라기보다는 경이로운 호텔의 나라였다(물론 그 무엇도 타지마할과 같은 문화유산만큼 그 오라가 강력할 수는 없었지만). 소위 ‘럭셔리 호텔’이어서만은 아니다. <랜드마크: 도시들 경쟁하다>라는 책을 펴낸 건축가 송하엽이 주장했듯이 모든 도시가 꿈꾸지만 아무 도시나 가질 수 없는 경쟁력의 뿌리인 성공적인 랜드마크는 돈만 쏟아붓는다고 탄생시킬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분명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한 도시의 랜드마크는 단지 자금력만이 아니라 시대의 정신과 사고 체계, 예술 정신, 기술력 등을 반영하는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인도의 정체성과 저력이 느껴지는 오베로이와 타지는 분명 당시 ‘공식 가이드’를 맡았던 인도 외교관이 당당하게 뽐낼 만한, 매혹적인 브랜드이자 랜드마크였다. 물론 호텔이란 공간은 집을 떠나 머무르는 외부의 장소이기에 아무리 화려하고 멋지더라도 그저 차갑기 그지없는 상업 시설, 그리하여 오히려 인간의 외로움을 북돋우는 곳으로 여기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불세출의 작가 알베르 카뮈처럼 호텔에서 일하는 걸 몹시 좋아해 ‘죽어도 괜찮다고 여겨진다’라고 할 만큼 호텔 방처럼 고독하고 편리한 공간을 사랑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또 다른 동기에서 나온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매트릭스>의 배우 키아누 리브스처럼 집 없이 호텔을 떠도는 ‘집시형’ 인간도 있는 법일 테고 말이다. 출장이든 여행이든 방랑이든 우리는 대부분 낯선 타지에 도착하면 지친 심신을 편히 쉬게 할 수 있기를 바라며 호텔로 발걸음을 옮긴다. 완벽한 자유로움을 만끽하든 고독으로 괴로워하는 인간형이든 일부러 불결하고 불친절한 호텔을 원하기는 힘들다. 보다 소박하고 장식이 덜 된 호텔을 선호할 수는 있어도 말이다. ‘도시의 세기’라 불리는 21세기를 맞이해 국경 없이 여행을 즐기는 레저 인구가 점점 더 늘어날수록 호텔 산업의 정체성, 특히 입맛 까다로운 고객의 수요에 맞춘 다양한 색깔의 중요성이 갈수록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황금 알을 낳는 MICE 산업을 겨냥한 전략적 행보
관광만이 아니다. 마이스(MICE) 산업, 다시 말해 회의(meeting), 포상 관광(incentives), 컨벤션(convention), 전시회(exhibition)를 둘러싼 비즈니스가 발달하면 할수록 호텔은 더더욱 도시 경쟁력의 핵심 축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풍부한 비즈니스 기회를 제공하는 MICE 산업을 겨냥해 일류 호텔들이 제공하는 ‘환경’은 다채롭게 진화하고 있다. 실례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야외 수영장에서 마이스 행사를 진행하는 예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카지노 도시의 고급 호텔 벨라지오(Belagio), 윈(Wynn)에서는 휴가차 머무르는 레저 고객들과 정장 차림의 비즈니스 고객들이 한데 어우러져 야외 수영장에서 즐기는 풍경이 자주 연출된다고. 지난해 8월 새 단장한 모습을 드러낸 서울 장충동 신라 호텔은 실제로 라스베이거스 사례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호텔 야외 수영장의 카바나(cabana)에 각별히 신경 썼다는 후문이다. 실제로 당시 ‘리오픈’을 앞둔 전야에 주류 기업 디아지오의 프리미엄 보드카 브랜드 시락(Ciroc) 론칭 행사가 신라 호텔의 야외 수영장 어반 아일랜드에서 열린 예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신라 호텔 관계자는 “라스베이거스의 호텔업을 주도했던 카지노 산업이 마카오로 넘어가면서 자구책으로 마련한 돌파구가 마이스 산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었다”라고 설명하며 “야외 수영장은 일반 고객한테도 인기 만점이지만 칵테일 리셉션, 애프터 파티 등 비즈니스 고객을 위한 공간으로도 활용하기 위해 다각도로 애쓰고 있다”라고 밝혔다.
지난 3월 초 10개월에 걸친 리모델링 작업을 끝내고 새 모습을 선보인 서울 삼성동의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도 마이스 고객들에게 중점을 둔 좋은 예다. 무역센터 인근에 자리한 위치 선정에서 이점을 지닌 인터컨티넨탈은 그랜드 볼룸을 본관으로 옮기면서 대폭 확장했는데, 전체 면적 1,494m²로 국내 최대 면적을 자랑하며 7m 이상의 천장고로 장대한 규모의 국제 행사나 연회를 진행할 수 있도록 디자인됐다. 비즈니스 고객들이 자주 들르는 로비 라운지와 바에는 ‘숙취 해소 전문가’까지 영입했다고 하니 가히 마이스 산업의 영향력을 가늠할 만하다. 인터컨티넨탈을 소유한 GS 그룹 계열의 파르나스 호텔(주)은 올해 호텔 기업에서 운영하는 최초의 컨벤션 전문 브랜드를 표방하는 ‘나인트리 컨벤션 광화문’도 개장하며 이 분야에 중점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또 2016년에는 세인트 레지스(St. Regis)와 함께 스타우드 그룹의 최상급 호텔 브랜드인 럭셔리 컬렉션(Luxury Collection)을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바로 옆에 들어설 복합 빌딩 파르나스 타워에 선보일 예정이다. 이미 강북에서는 힐튼 그룹의 최상위 브랜드 콘래드가 여의도에 터를 잡고 비즈니스 고객을 유치하고 있고, 오는 2016년엔 포시즌스(Four Seasons)가 광화문에 문을 열 예정이라 웨스틴 조선, 플라자, 롯데 등 인근 호텔들이 긴장하고 있다. 서울 못지않게 마이스 산업이 강세인 부산에서도 지난해 봄 오픈해 이목을 집중시킨 파크 하얏트에 뒤이어 영국의 세계적인 호텔 브랜드인 랭햄(Langham)의 6성급 호텔이 광안리해수욕장 인근에 들어설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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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을 채우는 콘텐츠가 알차야 호텔도 도시의 콘텐츠로서 성장한다
이쯤 되면 한국에 글로벌 톱 브랜드들이 대거 입성하는 호텔 춘추전국 시대가 열릴지도 모르겠다. 상권은 발달했지만 프리미엄 인프라는 부족한 편이었던 동대문도 예외는 아니다. 천문학적인 자금 동원과 이질감을 주는 외관 디자인 때문에 말도 많았지만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를 지향하는 동대문디자인공원(DDP)의 개장을 앞두고 그 맞은편에 JW메리어트 브랜드의 프리미엄 호텔까지 등장했다. 서울 강남의 JW메리어트에 다소 실망했을지라도 동대문 한복판에 들어선 JW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에 대해서는 일단 흡족해할 고객이 많을 듯하다(물론 ‘평판’이란 장시간을 요하는 것이긴 하지만). 번잡한 동대문의 건물들과 대비되는 현대적이고 얌전한 외관 디자인도 그렇고 객실부터 라운지, 레스토랑, 수영장 등 실내 디자인이 전반적으로 품격 있고 단아하다. 더구나 벽지, 천장 페인트, 마감재 등을 모두 친환경 제품을 고집해 ‘새 집’인데도 크게 불편한 냄새가 나지 않는 점도 높이 평가된다. 뭐니 뭐니 해도 눈에 띄는 장점은 보물 1호인 흥인지문이 시야에 들어오는 ‘전망의 미학’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는 것이다. 또 내국인에게는 익숙하다 못해 지루하고 어지러운 광경일 수 있지만 타지인들에게는 객실 창으로 시장의 간판들이 보이고 행인들의 활보하는 모습도 자못 이색적인 매력으로 비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미식과 쇼핑은 공통의 투자 분야다. 상점들이 즐비한 도심의 호텔들이 고객의 눈높이에 맞추려면 허를 찌르거나, 거부하기 힘든 유혹적인 ‘패키지’가 필요하다. 저마다 와인을 곁들인 객실 패키지, 요트 경험을 선사하는 패키지, 애프터눈 티 세트 같은 것은 기본으로 앞다퉈 선보이고 있고 TWG나 알트하우스, 케리케리등 요즘 뜬다는 티 브랜드들을 재빨리 입성시키는 데도 발 빠르다. 워낙 녹록지 않은 수준의 고객들을 겨냥하다 보니 ‘이그제큐티브 라운지’가 활성화되는 건 당연한 추세로 떠올랐다. 신라 호텔은 이그제큐티브 라운지를 통합해 꼭대기인 23층으로 옮기고 국내 최초로 하루에 네 차례 다이닝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성까지 보이고 있다. 그랜드 인터컨티넨탈은 프랑스 현지에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수석 파티시에로 근무한 세바스찬 코쿼리를 영입해 ‘디저트 마니아’를 유혹하겠다고 나섰다. 또 ‘남들’에게는 없는 특이하거나 고가의 브랜드를 접할 수 있는 상점을 들이거나 일회성 행사도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요즘 엄청난 고가에도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영국의 하이엔드 주얼리 브랜드 그라프(Graff)는 국내 1호 매장을 신라 호텔에 냈는데, 기존의 1층 프런트 데스크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콘래드 서울은 웨딩을 위한 모든 공간들을 한 층에 결집시킨 전용층 서비스로 차별화에 나섰다.
경쟁력 있는 브랜드를 만드는 건 정말 브랜드일까?
서울, 부산 등 우리나라 주요 도시의 호텔 지도가 세련되게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지만 아쉬운 점도 여전히 많다. 주요 호텔들은 저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건축가를 영입해 ‘차별된’ 디자인에 승부를 걸고 있기도 한데, 과연 엄청나게 바쁜 스타 크리에이터들을 고용하는 게 반드시 정답일까? 물론 전문성과 국제적인 감각은 필요하다. 하지만 도시의 랜드마크로 키우겠다는 야심을 갖고 짓는 건축물들을 상당수 우리의 지형과 역사를 잘 모르는 전문가들에게 거의 맡겨버리는 건 아쉬움이 남는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최근 공자의 고지(故地)로 알려진 취푸(曲阜)에 홍콩을 거점으로 하는 럭셔리 브랜드인 샹그릴라 호텔이 들어섰다. 필자에게 인터뷰 요청을 해온 이 호텔의 건축가 그룹은 홍콩 소재의 디자인업체 AB 콘셉트의 ‘듀오 크리에이터’ 였다. 동양적인 정서가 물씬한 호텔 곳곳의 요소가 디자인 자체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문화적인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했다. 호텔이란 곳도 결국은 우리네 삶의 모습이 축약된 공간이라면 우리의 도시를 잘 알고 사랑하는 ‘인적 자원’의 손길도 함께 어우러지면 더 바람직한 생태계가 되지 않을까. 호텔 조직의 차원에서도 역시 ‘사람’을 중시하는 문화를 창출하는 노력도 핵심 과제가 아닐까 싶다. 고객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포시즌스의 창립자인 이사도어 샤프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결국 호텔 산업은 ‘사람 비즈니스’다. 샤프가 직원이라면 간부든 도어맨이든, 청소부든 전부 포시즌스에 무료로 숙박할 수 있도록 할 만큼 ‘내 사람’을 중시했던 건 호텔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구성원들이 몸담고 있는 곳에서만 ‘진정성 있는‘ 서비스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서비스를 ‘잘 하라’고 강조할 게 아니라 그 서비스를 맡은 ‘식구’들에게 사랑을 아까지 않는 문화가 필요하다. 진정 경쟁력 있는 브랜드는 바로 그렇게 탄생하는 것일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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