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을 전시하는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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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1, 2026

고성연

오늘날 미술관은 더 이상 단순히 작품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장소가 아니다. 점점 더 경험을 조직하고, 시간을 연출하며, 관객의 감각과 기억을 설계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사진, 텍스트 등 어떠한 기록도 없이 오로지 ‘무형의 상황’에 참여하는 관객 경험만 남기고 사라지는 리움미술관 티노 세갈(Tino Sehgal) 개인전은 이러한 변화의 핵심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오브제가 사라진 경험 중심의 미술을 보여주는 한편,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의 기획전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는 물질이 사라지고 순환하는 과정을 담은 일련의 작품을 보여준다. 두 전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경험을 조직하지만, 결국 공통적인 질문으로 수렴한다. ‘미술관은 무엇을 남기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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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미술은 물질을 남기는 예술이었다. 회화, 조각, 설치는 시간 속에서도 지속되는 형태를 전제로 하며, 미술관은 이를 보존하고 축적하는 기관으로 기능해왔다. 그러나 물질이 넘치는 시대에 ‘사라짐의 미학’을 전면에 내세우며 이 전제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동시대 미술도 있다. 작품은 더 이상 고정된 오브제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발생하고 곧 소멸하는 사건이 된다. 퍼포먼스는 끝나고, 물질은 부식되며, 전시는 해체된다. 남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경험과 기억, 그리고 시간의 흔적이다.


물질 없는 예술, 새롭지는 않지만 참신한
영국 런던 출생의 인도/독일계 현대미술가로 베를린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티노 세갈(Tino Sehgal, b. 1976)의 작업은 이러한 전환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구현한다. 그는 타 작가의 작품과 병치는 하지만 스스로 물질적 형태를 만들어내지 않고 인간의 몸과 언어, 관계만으로 상황을 빚어내며, 사진이나 영상 기록조차 원칙적으로 남기지 않는다. 전시장에는 오직 사람들의 움직임과 소리, 그리고 관객과의 상호작용만이 존재한다. 작품은 그 순간에만 발생하고, 종료와 동시에 사라진다. 사실 개념이나 퍼포먼스를 내세우는 예술의 형식 자체가 새로운 건 아니다. 그렇다면 30대 중·후반에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꿰찬 이래 동시대 미술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해온 티노 세갈의 작업은 과연 어떻게 차별되는 걸까?


지난 3월 초 리움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그의 개인전 <티노 세갈>은 건물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흥미로운 장면을 빚어낸다. 3명의 여성이 갑자기 리듬을 탄 몸짓을 하며 구호를 반복하는데, 영어로 ‘디스 이즈 소 컨템퍼러리!(This is so contemporary!)’라는 문장이다. 자꾸 듣다 보면 절로 흥이 나는 교감은 차치하고 ‘이건 너무나도 현대적/동시대적이야’라는 뜻 자체는 의미심장하다. 대놓고 허세를 떠는 건, 언뜻 조소적인 뉘앙스로 느껴진다. ‘컨템퍼러리’라는 말 자체의 공허함을 드러내는 비판적 장치처럼. 미술계에서 이 용어를 둘러싼 해묵은, 하지만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논의를 나몰라라 하고 그저 대중적으로는 ‘쿨(cool)’한 현재의 흐름을 ‘올려치기’ 하는 관성을 떠올리게 한달까. 물론 해석은 각자의 몫으로 뒀겠지만 말이다. 이들을 맞닥뜨린 관람객이 덩달아 리듬을 타든, 아니면 어색한 문구에 쓴웃음을 짓든, 이 같은 반복 구호는 일종의 조각처럼 공간을 채운다.


미술관 내부 전시에서도 그처럼 ‘오브제 없는 조각 작업’은 이어진다. 리움이 소장한 근대 조각 거장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으로 둘러싸인 채 한 쌍의 남녀(퍼포머)가 로댕의 ‘키스(The Kiss)’를 비롯해 미술사 속 다양한 키스 장면을 라이브로 보여준다. 4명의 퍼포머가 각각 바이올린과 축구공, 자전거를 다루면서 서로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역동적인 광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처럼 신체와 언어, 그리고 관계를 매개로 형성되는 자신의 작업을 티노 세갈은 ‘구성된 상황(constructed situations)’이라 부른다. 그가 ‘해석자(interpreters)’라고 부르는 퍼포머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거나 말을 건네면서 일어나는 관객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현되는 상황이다. 관객은 해석자들과 마주하면서 관계 미학이 스며든 이 무형의 상황을 작동시키는 참여자가 된다. 이번 리움 전시에서는 모두 8점의 ‘구성된 상황’이 펼쳐진다(그가 엄선한 리움 소장품과 함께 큐레이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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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기록도 일절 남기지 않고, 관람객에게도 촬영을 허용하지 않는 티노 세갈의 전시는 모든 것이 데이터화되는 시대에 전자 매체를 통하지 않는 예술의 본질적 의미를 재고하게 한다. 정치경제학과 현대무용을 탐구했으며, 한국의 울산 같은 독일 공업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적 있는 그는 ‘물질 과잉’의 소비 시대에 비물질적 가치를 자연스레 고민하게 되었다고 전시 개막에 앞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말했다. 예술을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서 분리해 비물질적 가치로 치환하려는 시각을 지니게 된 배경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존 오브제의 해체를 의도한 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한 번도 근대적인(modern) 적이 없었다’며 근대의 허구성을 지적한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식으로 ‘파열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You don’t need to make a rupture)’고 말하면서. 이렇듯 ‘기억’과 ‘경험’으로 남는 예술은 그의 설명처럼 오늘날의 과정(시간) 기반의 경제에 걸맞은 방식으로 느껴진다. “시간 기반 예술은 탈산업사회로 넘어가는 현대에 적합한 형식이고, 현대사회를 잘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개별적인 것보다 관계나 연결이 더 중시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이런 점에서 예술가들은 자기 시대의 역사화를 그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비물질적 작업은 여전히 미술관에 의해 수집되고, 계약(‘구두’ 형태라지만)을 통해 거래되며, 제도 안에서 유지된다. 즉 완전히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방식으로 ‘남겨진다’. 어쩌면 오히려 더 엄격한 규칙과 수행 조건을 필요로 하며,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작품의 형태를 고정시키는 것 아닐까? 해석자들에게 행위의 작은 변주가 허용되지만, 이 역시 규정된 수행 조건 속에서 이뤄지기 마련이다. 그 결과, 반복 가능한 상황으로 남는다. 확실히 물질을 덜 낭비하는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말이다. 티노 세갈은 ‘미술이라는 게임의 지속’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전략적 관점에서 보자면, 참으로 영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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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수장고’ 이후의 시대를 상상하기


‘우리는 근대화와 생태화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_브뤼노 라투르, <존재양식의 탐구> 중


한편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는 ‘사라짐’ 자체를 보다 직접적인 주제로 다룬다. 거의 무한하게 정보를 쌓아 올릴 수 있는 가상공간이 아닌 현실 세계의 수장고가 지닌 물리적 제약을 놓고 볼 때, ‘보존’과 ‘소멸’은 끝없이 고민해야 할 사안이다. 이 전시에서 대다수의 작품은 완결된 형태를 유지하지 않는다. 썩고, 변형되고, 붕괴되는 과정이 작품의 일부가 된다. 예를 들어 MMCA 서울 전시장 ‘서막’ 섹션에서, 관람자는 먼저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사드 라자의 ‘네오소일(neo-soil)’ 흙을 사뿐사뿐 밟으며 공간에 들어선다. 서울의 폐기물과 시민 참여로 제작된 이 비옥하고 촉감이 경쾌한 흙은 원하는 이들에게 나눠진다. 관람자와 공동체 경험을 연결하는 공유와 재생의 매개체인 셈이다. 이은재의 ‘이제 근대 모서리를 닦아라-서문’(2023)은 달걀노른자로 만든 물감을 이용하는 템페라 기법을 쓰는데, 쉽게 갈라지고 바래는 유약한 물질의 필연적 한계를 알면서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의 의미를 구하려는 태도가 엿보인다.


1막 ‘되어가는 시간’에서는 물질의 소멸과 변화를 보여준다. 해변 잔해 조각으로 만든 세실리아 비쿠냐의 ‘작은 벽(카리오스)’은 취약함과 허망함을 아름다움으로 전환하며, 여다함의 ‘향연’은 뜨개질로 만든 향로에서 ‘춤’처럼 피어오르는 연기와 공간의 움직임을 통해 시간과 변화의 수행적 경험을 전달한다. 2막 ‘함께 만드는 풍경’에서는 인간을 넘어 비인간 존재가 공동 창작자로 등장한다. 델시 모렐로스의 ‘엘 오스쿠로 데 아바호’와 김방주의 ‘벌목과 불’은 검은 흙과 불가피한 스러짐을 통해 죽음을 환기시키지만, 동시에 생명과 순환으로 연결된다. 유코 모리의 ‘분해’는 썩어가는 과일에서 에너지를 끌어내 빛과 소리를 발생시키고, ‘사회적 발효’라는 개념 아래 탐구적 자세를 견지해온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의 ‘채널링 하우스’는 유기물과 무기물이 함께 순환하며 창작과 소멸의 경계를 허문다.


이렇듯 관객은 안정된 대상을 감상하는 대신 흙과 곰팡이, 발효액 등 다양한 재료를 통해 변화와 사라짐의 과정을 목격하고, 단순한 쇠락이 아닌 인간과 자연, 시간과 관계의 순환 속에서 피어오르는 소멸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된다. ‘남는 것’과 ‘남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을 체험하면서. 이러한 작업은 미술관이 더 이상 ‘보존’만을 수행하는 기관이 아니라, 사라짐을 경험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진행되는 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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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디자인 같은 콘텐츠 플랫폼은 동시대 미술관의 숙명일까?
두 전시 사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공통적으로 미술관의 기능을 재정의한다. 미술관은 더 이상 물질을 저장하는 공간이 아니라, 순간을 경험하고 기억을 생산하는 공간이 된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의 미술관이 놓인 구조적 조건을 드러낸다. 미술관은 한편으로는 경험을 제공하는 플랫폼으로서 관객의 참여와 몰입을 유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작품을 수집하고 역사화하는 제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긴장의 무게 속에서 미술관은 관객이 더 이상 해석하는 주체가 아니라, 경험을 수행하는 참여자가 된다고 부르짖는다. 하지만 이 참여는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이미 설계된 상황 속에서 이뤄지며, 특정한 방식으로 유도된다. 동시대 미술이 점점 더 경험 디자인, 즉 일종의 UX와 유사한 구조를 띠게 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게다가 ‘관람자가 작품의 일부가 된다’는 티노 세갈의 명제는 비판적 거리를 생성하기보다 경험을 지나치게 매끄럽게 조직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갈등이나 균열 없이 흐르는 참여는 오히려 비판적 긴장의 약화를 의미하는 건 아닐까.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 역시 물질의 붕괴와 사라짐을 통해 ‘지금-여기’를 사유하게 하지만, 이 경험이 그저 소멸을 ‘보여주는 것’에 머무는 방식으로 소비되는 것은 아닌지, 과연 제도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로 이어질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분명한 점은 ‘사라짐의 미학’이 단순히 물질을 제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술이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남기는가에 대한 조건 자체를 재구성한다는 점이다. 작품은 더 이상 대상이 아니라 사건이 되고, 의미는 고정된 메시지가 아니라 경험에서 발생하며, 지속성은 물질이 아니라 기억과 구조에 자리 잡는다. ‘패러다임의 전환’까지는 거창하지만, 많은 사유의 씨앗을 던져준다. 어쩌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건,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어떤 불편한 감각, 완전히 해석되지 않는 잔여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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