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섬 오디세이 with 아만(Aman)_I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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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05, 2025

고성연(인도네시아 현지 취재)

‘꿈꿔온 게으름’이 선사하는 생동의 시간


이제는 도쿄, 뉴욕, 방콕 같은 메트로폴리스에도 도심형 리조트가 자리하지만, 원래 아만(Aman)은 분주한 도심이나 시끄러운 관광지를 벗어난 호젓하고 외진 곳에 천혜의 자연을 벗 삼은 집 같은 안식처 개념의 리조트로 출발했다. 1988년 태국 푸켓에 1호점인 아만푸리(Amanpuri)를 선보여 참신한 파장을 던진 이래 지구촌을 아우르는 여행 생태계에 은은한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하나의 문화를 창출해낸 선구적인 브랜드다. 산스크리트어로 ‘평화’라는 뜻의 이름을 브랜드 정체성에 탁월하게 녹여낸 아만 창립자는 지금은 회사를 떠났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호텔리어 아드리안 제차(Adrian Zecha, b. 1933)로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다. 미국 유학파인 그는 졸업한 뒤 일본 도쿄에서 <타임>지 기자로 근무하다가 직접 잡지를 창간하는 등 미디어업계에서 활동하면서 아시아를 두루 여행했고, 문화의 빛나는 다양성과 풍부함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은 애정과 지식을 담아 시작됐기에 아만은 여전히 대다수(36개 중 24개)가 아시아에 포진하고 있다. 아드리안 제차는 사업 초기에 모국인 인도네시아의 발리섬에 잇따라 호텔을 열었는데, 먼저 1989년 우붓에 아만다리(Amandari), 1992년에는 동쪽 망기스에 아만킬라(Amankila)를 각각 개장했다. 이듬해인 1993년에는 발리에서 비행기로 1시간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숨바와의 모요섬에 글램핑 사이트인 아만와나(Amanwana)를 선보였다. 이들은 아만 특유의 소박하고 따뜻한 환대의 DNA를 오래도록, 곱게 간직해왔다는 공통분모를 지녔다. 그리고 그로부터 무려 22년 뒤에는 인도네시아의 아름다운 섬들을 물길로 누비는 대망의 프로젝트인 아만디라(Amandira)가 등장했다. ‘느림의 미학’이 지닌 정수를 담아낸다는 요트 호텔이다. 이어 2018년에는 덴파사르 공항에서 멀지 않은 아만 누사두아 빌라(Aman Villas at Nusa Dua)가 생겼다. 아만디라 탄생 10주년을 맞이해 인도네시아 군도에 자리 잡은 다섯 군데의 아만을 체험하는 흔치 않은 여정에 동참했다. 아만과 함께한 ‘아일랜드 오디세이(Island Odyssey)’ 1편은 ‘텐트(아만와나)’와 ‘요트(아만디라)’를 무대로 삼는다.



참된 행복은 목적 없고 효용 없는 것 덕분에, 고의로 장황한 것 덕분에, 비생산적인 것, 에둘러 가는 것, 궤도를 벗어나는 것, 남아도는 것,
아무것에도 유용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종사하지 않는 아름다운 형식들과 몸짓들 덕분에 있다. _한병철 <관조하는 삶> 중에서




아만와나(Amanwana)
평화로운 숲에서의 ‘무위’가 주는 축복

오랫동안 전 세계 여행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신들의 섬’ 발리의 동쪽에는 롬복이 있고, 롬복에서 더 동쪽으로 향하면 숨바와(Sumbawa)가 있다. 발리와 플로레스 사이에 위치한 동부의 섬들이 자리 잡은 서누사텡가라 지역에 속한다. 고작 수십 명의 승객을 태우는 작은 비행기지만 발리에서 오가는 직항이 생긴 덕분에 가뿐히 도착한 숨바와는 ‘서퍼들의 파라다이스’라 불리는 한적한 섬이다. 여기에서 다시 보트를 타고 조금만 가면 아만와나를 품은, 꿈결 같은 모요섬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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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졌듯 인도네시아는 무려 1만7천여 개의 섬이 5,000km에 걸쳐 늘어선 세계 최대 ‘군도의 나라’다. 그래서 숨어 있는 여행지가 많다지만 모요섬은 이곳을 발견한 초기 모험가들의 ‘희열’이 상상될 만한 외진 곳이다. 시간의 흐름이 절로 느려지는 듯 평온한 겉모습이지만, 놀랍도록 풍요로운 해양 생물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스노클링과 다이빙 포인트를 지닌 바다, 사슴이 노니는 울창한 숲,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야생이 숨 쉬는 섬이다. 뒤로는 짙은 녹음을 병풍처럼 두르고, 앞으로는 언제든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모요섬의 해변에 사파리 텐트 17채가 사이좋게 펼쳐져 있다. ‘평화로운 숲’이라는 아만와나의 뜻이 절로 수긍되는 풍경이다.
수면 위로 등을 반짝이며 헤엄치는 아기 상어를 보고픈 마음이었을까? 모요섬에서의 첫날 아침에는 필자 같은 늦잠꾸러기도 동틀 무렵 절로 눈이 떠졌다. 도착한 날의 한낮에는 쪽빛에 가까운 진한 파랑을 띠더니, 새벽녘에는 은은한 연하늘색과 옅은 청록색이 층층으로 일렁이는 물결의 세레나데가 잔잔히 퍼진다. 뒤편에서 해가 뜨는 리조트의 위치 덕분에 살짝 연분홍 색조만 드리운 하늘을 배경으로. 나바호 원주민의 천 작업에서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는 화가 애그니스 마틴의 가로선이 화면을 담백하게 흐르는 그림 같다. 그런데 조류가 낮은 편이라 아마도 오늘은 오전 8~9시는 되어야 나타날 듯하다고 직원이 귀띔을 해주었다.
어차피 잠이 깨어버린 차에 이른 아침의 신비로운 정취가 아까워 산책을 하게 됐다. 시리듯 투명한 바닷물 속 오색찬란한 물고기 떼를 관찰하기도 하고, 마치 강원도 삼척의 해변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 형형색색의 조개껍질을 줍기도 했다. 그러다 해변 앞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원숭이를 마주쳤다. 텐트의 문을 열어두면 알아서 손잡이를 내리고 들어오기도 한다는 얘기에 살짝 무서워했는데, 생각보다 귀엽게 생긴 얼굴을 보니 경계심이 조금은 풀어졌다.
하얀색 상의에 알록달록한 사롱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성 직원이 레스토랑이 문을 열기도 전에 근처 해변을 어슬렁거리는 필자를 발견하고는 수줍게 말을 걸어왔다. “저, 생강차를 만들거나 커피를 내려드릴 수 있는데요.” 앳된 얼굴을 한 이 10대 소녀에게 모요섬의 걸쭉한 천연 꿀을 곁들인 생강차를 부탁했다. “한국에서 오셨죠?” 그녀는 차에 레몬즙을 짜 넣으면서 자신을 ‘블링크(걸 그룹 블랙핑크의 팬 클럽)’라고 소개했다.
그렇게 담소를 주고받으며 따스한 생강차로 시작한 다정하고 심심한 아침. 파도가 해변에 부드럽게 부딪히는 소리를 배경으로 서서히 밝아오는 수평선 너머로 흐릿한 윤곽이 보이는 산의 자태를 가만히 응시하노라니 머릿속에서 음표들이 떠다니는 듯했다. 풍경만으로도 음악이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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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부안 아지(Labuan Aji)
절정의 맑음을 품은 천연 폭포의 마을


아만의 고유한 DNA에 반해 여정의 복잡함에 아랑곳없이 여러 리조트를 섭렵하는 팬을 ‘아만 정키’라고 부른다. 고요한 평화를 보장하는 ‘위치 선정’과 소박한 듯 우아하고 편안한 인테리어의 힘도 있겠지만 아만 팬들이 말하는 최대 매력은 특유의 정감 어린 환대다. 아만와나의 스태프에게서도 그러한 정수가 다분히 느껴지는데, 대다수가 라부안 아지(Labuan Aji) 마을 사람들이다. 바다와는 또 다른 감성을 주는 폭포의 마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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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란 데이베드에 느긋하게 누워 창밖을 바라보면 ‘멍 때리기’는 가장 쉬운 일이 되어버린다. 어떠한 터키석도 당해내지 못할 만큼 맑고 영롱한 청록빛 바다를 머금은 아만와나만(Amanwana Bay)이 아닌가. 모요-사톤타 국립공원의 일부로, 산호초가 풍요롭게 터를 잡고 있는 플로레스해의 36,000ha에 걸친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 가끔은 바깥에서 바스락거리며 돌아다니는 원숭이의 존재가 느껴지고, 이따금 자신의 이름을 증명이라도 하듯 “게코~”라고 우는 게코도마뱀의 소리가 낯설지만, 어느새 텐트라는 보금자리 속 일상에 익숙해졌다. 삼림욕의 싱그러운 에너지와 짭조름한 바다 내음의 하모니는 긴장을 늦추고 서서히 기분 좋은 심심함에 빠져들게 해주었다.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말했던 ‘꿈꿔온 게으름’의 맛보기 정도는 될지도 모르겠다.
‘무위’의 시간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텐트 밖은 위험해(?)’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스러지는 걸까? 결국에는 평소 바다에 가더라도 ‘물 묻히기의 귀찮음’에 자주 하지 않았던 스노클링에 자진해서 나섰다. 아만와나의 장점은 해변에서 바다를 향해 아주 살짝만 전진해도 수려한 바다의 생명체를 물 밑으로 생생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스노클링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라는 점이다. 사실 대모거북, 푸른바다거북, 곰치, 쏠배기 같은 바다 생물들이 정말로 궁금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근히 신이 났다. 더구나 물속에서 유영하다가 옆을 보면 늘 곁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요가’라는 이름의 어리지만 듬직하고 노련한 ‘스노클러’ 스승과 함께했기에 든든했다. 몸은 좀 고단해도 스파 텐트로 향하면 된다는 생각에 스노클링을 다시 해보자고 요가와 느슨한 약속까지 했다.
그리고 급기야 스노클링 선생님인 요가와 ‘블링크’ 소녀의 고향 마을인 라부안 아지로 향했다. 아만와나에서 배로 10~15분 거리에 있는 라부안 아지 인근은 커다란 산호초의 서식처인데, 1백 세 넘은 장수 산호초도 있다. 이번에도 굳이 산호초를 목표로 한 건 아니었다. 마을 자체가 궁금하기도 했고, 인간의 발길을 덜 타 궁극의 맑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폭포들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중 백미는 아만와나만에 이어 1990년대 초 모요섬의 명물이 된 폭포를 발견한 배리 리스(Barry Lees)의 이름을 딴 ‘배리의 폭포’로, ‘마타 지투 폭포(Mata Jitu Waterfall)’라고도 한다. 근처에 더 작지만 호젓이 흐르는 다른 계곡도 있는데,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1993년 아만와나를 방문했을 때 헤엄을 친 장소라고. 아만와나 손님이라면 이 계곡에 띄운 튜브 형태의 선베드에 누워 힐링 세션을 경험할 수도 있다. 현지 힐러의 ‘움 찬팅’이 들려오는지도 모르게 반쯤 잠에 빠져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무 조각에 누군가가 새긴 글귀가 눈에 띄었다. ‘작은 낙원까지 앞으로 150m!(150m menuju surgah kec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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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만디라(Amandira)
군도의 축복을 온몸으로 느끼는 바다 위 용맹한 안식처


‘평화롭고 용맹한’이라는 뜻을 지닌 아만디라는 인도네시아 전통 목선인 ‘피니시(Phinisi)’에서 영감받아 설계됐다. 52m 길이의 늠름하고도 우아한 몸체를 지닌 이 배는 처음부터 아만의 프라이빗 요트 항해를 위한 맞춤 설계를 거친 뒤 콘조 부족 장인들이 현지 원목으로 세심하게 수작업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2015년 처음 닻을 올리고 출항해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했는데, 여전히 ‘꿈의 호텔’로 선망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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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요섬에는 리조트가 아만와나밖에 없다. 고요함이 흐르는 가운데, 낮에는 유유자적 다이빙과 스노클링을 즐기면서 저녁에는 별들이 총총히 박힌 검푸른 하늘을 보는 ‘스타게이징’ 보트를 타는 낭만을 누릴 수도 있지만 별다른 오락거리는 없다.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인적 드문, 그리고 꽤 오래된 안식처를 찾아 그토록 먼 길을 떠나는 이유가 뭐냐고. 선뜻 구체적인 답을 내놓지 못하다가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품지 않으려고”라고 부연하면 대다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스트레스 사회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혹은 자신을 내려놓는 소극적 저항 같은 여정이라고나 할까.
아만와나에는 이렇듯 대자연의 소리와 풍경만을 벗 삼으며 지내는 ‘무위’의 행복을 느끼려고 반복적으로 찾는 이들이 꽤 있는데, 거의 해마다 찾은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는 한 모자(母子)도 마타 지투 폭포로 가는 길에 만났다. 해변을 바라보는 키 큰 나무 옆 테이블이 있는 명당 자리에 앉아 있노라면 투숙객들 외의 이방인(?)을 가끔 목격할 수도 있다. 다름 아닌 자신의 배로 이 바다, 저 바다를 누비면서 항해하는 요트족이다. 필자도 아만와나에 체류할 때 마치 신기루처럼 요트가 해안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걸 봤는데, 프랑스에서 2년째 프라이빗 크루즈를 하고 있다는 한 커플의 깜짝 방문이었다. “와, 부러운 인생이네~(what a life!)”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그들의 여정만큼은 아니겠지만 아만와나에서의 정점은 역시 날렵하고 단단한 프라이빗 요트 아만디라 1박 2일 승선이었다.
아만디라는 최소 3박 이상의 전세 서비스로 한 번에 한 팀(최대 10명)만 예약 가능한 프라이빗 요트 호텔이다. 물론 크루즈나 세일링을 즐기는 이들에게 3박은 짧지만, 그마저도 바쁜 일상에서 힘들게 짬을 내야 하는 이들이 인도네시아의 군도 절경을 바다 위에서 즐길 수 있는 축복 같은 항해 노선을 소화하려면 그 정도는 필수적인 일정이고, 대개 닷새는 가뿐히 넘게 소요된다. 엄연히 체크인-아웃을 하는 ‘호텔’다운 쾌적한 숙박을 염두에 두고 서서히(항속 4~8노트) 움직이기도 하거니와 블록버스터 영화에나 나올 법한 ‘코모도 드래곤(지구상에서 살아 있는 가장 큰 도마뱀으로 불린다)’이 서식하는 코모도섬, 스파이스 제도 등 항해 노선 자체가 범상치 않기도 하다. 아만디라의 크루즈 디렉터인 스티븐은 “대개는 6노트 정도로 느리게 항해한다”며 “손님들의 면면도 흥미롭지만 이 배에 탑승한 크루도 최고의 전문가들”이라고 강조했다. 항해사는 물론 다이버, 셰프, 테라피스트 등 14~15명의 분야별 전문 크루는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한다. 심지어 커피도 식사도 ‘아만디라가 최고’라며 엄지 척을 하는 손님들이 많을 정도다. 하지만 그 매혹적인 미식도 갑자기 돌고래 몇 쌍이 등장했다는 소식에 뒷전으로 밀렸다. 일출과 함께 지구상에서 가장 큰 물고기라는 고래상어를 보고 난 뒤 아침 식사로 한숨이 나올 정도로 맛난 부부르 아얌(‘닭죽’)을 즐기던 중에 “돌고래가 나타났다”는 크루의 외침에 다들 포크를 놓고 갑판 위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한동안 하염없이 돌고래의 춤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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