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남은 것과 멀어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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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04, 2024

글 김수진(프리랜스 에디터, 디블렌트 CD)

카일리 매닝, <황해(Yellow Sea)>展

세계적인 갤러리 페이스의 주목을 받으며 미술계에서 떠오르는 유망 작가가 된 알래스카 출신의 카일리 매닝( Kylie Manning, b. 1983). 현재 그녀는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국제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 최근 서울 마곡동 스페이스K 서울에서 국내 첫 개인전인 <황해(Yellow Sea)>를 시작했다. 처음 시도하는 작업을 선보이는 등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한 전시 현장을 직접 찾은 그녀를 만나봤다. 전시는 11월 1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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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시작과 끝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망망대해 위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배에서 내린 뒤 화폭에 그대로 옮기는 화가의 작품이라면, 우리는 어쩌면 ‘바다의 시작과 끝’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알래스카와 멕시코 해안을 오가며 자란 카일리 매닝(Kylie Manning)은 한때 선원으로 일하며 5백 톤급 선박의 항해사 면허를 취득하기도 할 만큼 바다에 빠져 있었다. 그녀가 경험했던 거친 파도와 바람은 그대로 그녀의 작품으로 옮겨졌다. 색채가 휘몰아치는 듯 광활한 풍경이 펼쳐지는 작품을 마주하면, 어떤 인생이든 담대하게 관조할 수 있을 것 같은 작가의 깊은 사색이 느껴진다.
“어업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배에서 자랐고 물 위에서 일한 경험이 저의 모든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 거대한 공간에 있으면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지금도 자연 속에 혼자 있을 때 훨씬 편안해요. 제가 자라온 공간에서 완전하고 온전하다고 느끼며, 그 경이로운 공간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녀의 말처럼 작품 속 모든 화면에서 무한한 바다와 자연이 연결되지만, 카일리 매닝은 표면 아래 깔려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길 바란다고. 막막한 자연 풍경에 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까지 등장시켜 추상과 구상이 혼재된 화면은 긴 서사가 담겨 있지만 결코 결말을 알 수 없는 한 편의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는 ‘내러티브와 인물이 파악되지 않게 하는 것’으로 놀라움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추상적인 옅은 물감층 사이의 인물들은 사실 그녀가 옛날 가족사진 등에서 발견한 추억이지만, 보는 이들은 각자 떠올리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며 삶을 확장해나가게 된다. “훨씬 개방적이고 더 넓은 범위를 포괄하는 방식으로 인물을 그리고 싶었어요. 우리 삶은 아주 풍부하잖아요. 그리고 저는 항상 인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싶었어요.”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 수 없는 중성적인 인물을 드로잉으로 담아내지만, 마지막에 그 드로잉을 뭉개면서 관람객들에게 자유를 안겨주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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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 카일리 매닝은 조수 간만의 차가 최대 9m에 달할 만큼 큰 한국의 ‘황해(한반도 서쪽에 있는 바다)’에서 ‘넘치는 잔해와 소음, 흔적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엔 무엇이 걸러지고 농축되는가?’에 대한 사유를 구상과 추상의 밀고 당김으로 풀었다. 어업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다가 한국에서 처음 생겨난 고유의 낚시법인 ‘견지 낚시’를 알게 되었고, 이 연구가 황해로 이어졌다고. 이 개념은 제주도의 해녀로 향해 제주도의 역사와 신화, 놀라운 지형과 지리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신작 ‘머들(돌무더기)’이 바로 제주도의 겨울 풍경을 닮은 작품. 핫 핑크부터 에메랄드, 그린과 블루가 함께 춤추는 듯(실제로 최근 뉴욕 시티 발레단과 협업하기도 했던 그녀는 서울에서는 국립현대무용단과 같이했다), 화면마다 다양한 색에서 발산되는 빛이 소용돌이친다. “모든 색은 주변 색상과의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요제프 알베르스의 색채 이론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저는 오일과 토끼 아교를 바른 리넨과 다양한 흰색으로 깔끔하게 밑칠한 캔버스에 커다랗게 붓질을 하며 작업을 시작하고, 그 위에 엷고 넓게 색을 칠합니다. 어떤 색은 1천 년 전의 색이고 어떤 색은 1천 년 후의 색인 것 같아요.” 그녀는 물감을 엷게 여러 겹 칠하고 각 층의 유분으로 빛을 굴절시키는 바로크 회화 기법처럼 빛을 내는 효과를 만든다고. 실크에 그린 그림들이 마치 거친 파도를 항해하는 배 위 돛처럼 전시장 한가운데 7m 길이로 걸려 있는데, 그 사이를 걸어 다니다 보면 위태롭고 섬세한 바다 위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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