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ng your Body to Pres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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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5, 2023

글 김연우(독립 큐레이터)



도나 후앙카_<BLISS POOL>展

볼리비아계 미국인 작가 도나 후앙카(Donna Huanca)는 느리고 명상적인 움직임이 주가 되는 퍼포먼스를 바탕으로 페인팅, 설치, 조각 등의 장르를 아우르는 고유의 시각언어를 선보인다. 화려한 색채의 보디 페인팅이 시선을 사로잡는 퍼포먼스의 주체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은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 여성의 신체를 다뤄온 기존 미술사나 문화사에 반(反)한다. 하나 이러한 여성주의적 제스처를 넘어 감각과 기억으로 이뤄진 인간의 ‘몸’ 자체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후앙카의 작업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피부, 머리카락 등 자신을 감싸고 있는 신체의 감각으로 시간의 흔적을 더듬고, 삶과 존재의 순간과 영원이라는 역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간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인식하고 이해함으로써 존재하는 인간에 대해 다룬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떠오르기도 한다. 도나 후앙카의 국내 첫 개인전 <블리스 풀(BLISS POOL)>은 서울 마곡동 스페이스K 서울에서 6월 8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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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 후앙카의 전시는 공간 전체를 하나의 신체적 추상화로 삼는 거대한 스케일의 콜라주 작업과도 같다. 한때 전시 준비를 위해 비워뒀을 공간은 작가가 ‘살아 있는 예술(living art)’이라 칭한 모델들의 퍼포먼스부터 압도적인 대형 페인팅, 신체의 형태를 모방한 조형물, 향과 사운드 등 다양한 형태의 작업으로 수놓아진다. 모든 작품은 과거 작업의 흔적과 상호작용을 이루며 이전 전시의 순간을 담은 채 서로 연계되며 존재하는데, 후앙카의 작업 방식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순환성은 그녀의 작업을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에 대한 콜라주로 여겨지게 한다. 스페이스K 서울 개인전의 경우에도 전시장 양측에 각각 커다란 벽을 이루며 마주 보고 있는 대형 페인팅 연작은 지난 퍼포먼스를 기록한 이미지를 기반으로 제작됐다. 작가는 확대 인쇄한 모델의 신체 사진을 밑바탕 삼아 안료에 모래, 커피 같은 자연 재료를 섞어 만든 두꺼운 유화층을 바른다. 짙은 파란색이나 주황색, 다홍색의 색상 팔레트는 자연과 주변의 환경에서 영감받았다. 확장된 이미지는 형태를 잃는 대신 강렬한 색상에 덮여 고요하면서도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는 거대한 추상화로 재생산된다. 물감이 단단하게 굳은 캔버스 위에는 브러시를 대신해 물감을 바르고 긁어낸 손 자국, 피부 표면의 질감, 체취, 땀 같은 몸의 흔적이 그대로 흡수되어 있다. 이미 휘발된 퍼포먼스가 페인팅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시간의 흐름 속에 흘러간 흔적을 붙잡아 그 존재를 영속하게 하는 후앙카의 예술적 실천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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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를 경험하는 시공간으로의 초대
선명하고 생동감 넘치는 색채가 돋보이는 후앙카의 전시장 풍경은 언뜻 ‘인스타그래머블 (Instagrammable)’하다는 표현을 절로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사실 존재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하는 그녀의 작업은 오히려 관객을 살아 있는 현실로 불러들이는 ‘안티-스크린적’ 플랫폼에 가깝다. 후앙카는 자신의 ‘명상적 의식’에 참여하는 관람객들에게 미디어와 인터넷을 통한 감상과는 차별되는 감각적인 경험을 선사하고자 향기와 소리라는 장치를 더한다. 소리와 향이 인간의 기억에 핵심적인 작용을 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 대다수에게 어떠한 향을 맡거나 소리를 들을 때 특정한 시간으로 소환되는 경험이 낯설지 않듯 말이다. 보다 강렬한 관람을 위해 후앙카는 전시마다 새로운 향을 사용해왔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팔로 산토 표백제에 머리카락을 태워 제조한 향을 첨가했다. 전시장을 조용히 감싸는 사운드는 전시명인 ‘BLISS POOL’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 물이 내는 다양한 소리로 이뤄져 있다. 가만히 집중하다 보면 관객은 작가의 바람대로 ‘살아 있는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추상적인 시공간에서 신체의 여러 감각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
현재(現在)의 반영을 위해 후앙카는 전시를 펼칠 공간이 위치한 장소의 자연적 특징이나 공간의 크기, 형태, 색상, 빛 등 건축 요소를 작업에 섬세하게 녹여낸다. 전시장 가운데 놓인 타원형의 ‘연못(Pool)’도 스페이스K 서울의 건축물의 유려한 곡선에서 영감받아 탄생했다. 호(弧) 형태의 가벽으로 둘러싸인 연못은 조각들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동시에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주무대로 기능한다. 유광의 매끈한 표면은 마치 연못의 수면에 풍경이 투영되듯 주변 환경과 대기, 관람객과 모델들의 모습을 비추며 몰입감을 더해준다. 작가의 보디 페인팅과 장신구, 옷가지를 걸친 모델들은 거울 면으로 이뤄진 조각 사이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거나 자세를 바꾸어 가며 스스로를 배치하는, 느리고 강조된 몸짓을 선보인다. 스스로 정적이고 명상적인 순간을 경험하는 주체인 이들의 느릿한 움직임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소중한 현재 시간의 흐름을 늘리고 붙잡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강렬한 존재감의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퍼포먼스가 끝나면 모델들의 몸에 그려진 보디 페인팅은 씻겨 사라지지만, 한때 존재했던 곳에 묻은 푸른색 안료나 머리카락, 발자국 같은 움직임의 흔적은 공간에 배어 있다. 그들의 감각적 에너지가 남은 전시장에서는 복잡한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잠깐의 여유를 누릴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전시가 막을 내리고 다음 전시를 위해 벽과 바닥이 새 페인트로 덮일지언정 눈에 보이지 않는 땀과 체취, DNA 같은 잔해 역시 어딘가에 깊숙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존재란 일시적이지만 결코 없던 일이 될 수 없으며, 나아가 누군가의 경험이나 기록으로 어딘가에서 영원히 살아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덧없이 끝나버린 이러한 시간은 작가에 의해 다시 어딘가에서 펼쳐질 다음 작업에 겹겹이 쌓이며 새로운 시간층을 형성해갈 것이다. 도나 후앙카의 작업이 지금까지도 늘 그래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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