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새로운 채식주의에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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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04, 2015

글 이소영(<사진 미술에 중독되다>, <서울, 그 카페 좋더라> 저자) | 일러스트 남대현

채식은 채식주의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채식주의자를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채식에 몰두하는 육식주의자도 많음을 느끼게 된다. 채식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지만 오래된 식습관을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채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현대의 채식은 단순히 개인의 건강과 관련된 식성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과 미래에도 영향을 끼치는 중대한 사안으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폴 매카트니가 비건이 된 이유

우리나라에도 채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채식을 선택하는 이유가 각기 다르며, 채식을 함으로써 세상을 보는 눈이 더 넓어졌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식단을 축소했음에도 어떤 점에서 다른 관점을 갖게 됐다고 자신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채식인이라면 비틀스의 멤버 폴 매카트니를 꼽을 수 있겠다. 그는 잔인한 도축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아 채식을 선언했는데, 2009년 코펜하겐 기후변화 협약 관련 벨기에 토론회에서 ‘고기 없는 월요일(Meat Free Monday)’ 캠페인을 제안했다. 이 흥미로운 캠페인은 현재 세계 각국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주목받았다. 알려졌다시피, 지구온난화의 가장 큰 주범은 육식이다. 햄버거 하나당 1.5평의 숲이 사라지며, 과도한 축산업으로 온실가스가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일주일에 단 하루만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자동차 5백만 대를 운행하지 않는 것과 같은 놀라운 효과를 낸다고 한다. 자동차 사용을 절반으로 줄이는 것보다 고기 소비를 반으로 줄이는 것이 온실가스 감축에 더 효과적이라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폴 매카트니의 딸인 패션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도 부전여전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패션 브랜드 끌로에를 성공시킨 그녀는 구찌 그룹과 자신의 브랜드 스텔라 매카트니 사이에 계약을 체결했다. 놀라운 것은 동물 보호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글로벌 비즈니스에 연결시킨 그녀의 추진력이다. 가죽, 모피와 같은 동물 재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을 것을 계약에 포함시켰고, 인조가죽을 사용한 채식주의자 슈즈와 가방 등은 진짜 가죽보다 더 비싼 가격에 팔리며 그녀의 에코 감각을 입증했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스텔라 매카트니의 가방과 구두를 사용한다면,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도 과시할 수 있을 테니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배우 귀네스 팰트로 역시 채식으로 유명한데, 그녀는 소, 돼지 등 다리가 4개인 동물은 먹지 않는 세미베지테리언(semi-vegetarian)이다. 돼지 뒷다리를 숙성시킨 하몬 요리로 유명한 스페인에서 고교 시절을 보냈고, 심지어 그녀를 스페인에서 돌봐준 분이 돼지 농장을 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소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귀네스는 미국의 TV 시리즈 <스페인, 자동차로 떠나는 요리 여행>에 요리사 마리오 바탈리와 함께 출연해 자신의 음식 취향을 여러 번 밝힌 바 있다. 급기야 요리책 <Notes from My Kitchen Table>, <My Father’s Daughter> 등을 발간했는데, <My Father’s Daughter>는 영화감독인 아버지 브루스 팰트로가 식도암 판정을 받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마크로바이오틱 식이요법을 시도했던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마크로바이오틱과 사찰 음식, 비건의 차이

마크로바이오틱(macrobiotic)과 채식은 공통점이 많다. 미국에서 마크로바이오틱 인스트럭터(Macrobiotic Instructor) 자격을 취득한 <자연을 닮은 밥상>(위즈덤스타일)의 저자 이윤서는 마크로바이오틱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음식과 생활을 좌우명으로 삼는다고 설명한다. 또 제철, 제 지역에서 난 신선한 식품을 섭취하는 것이 중요하며, 공장식 사육으로 잔인하게 도축된 육류보다는 식물성 단백질과 현미, 채식을 권하기에 채식과 공통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마크로바이오틱은 흰 살 생선 섭취를 허용하기에 가장 엄격한 채식인 비건(vegan)은 아니지만 세미베지터리언으로 분류할 수 있다. 또 종교 수행의 전통 속에 발달한 사찰 음식 역시 비건과 흡사한데, 다만 사찰 음식은 타락죽 같은 유제품을 허용하기에 락토베지테리언(lacto-vegetarian)으로 볼 수 있겠다. 아마도 불교가 인도에서 유래되었기에 우유를 허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채식을 하면 얼마나 건강에 좋을까? <자연을 닮은 밥상>의 저자 이윤서는 최근 TV 프로그램 <비타민>에 출연해 우유, 달걀, 생선도 먹지 않는 비건을 대표해 혈액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건선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다 채식을 하며 이를 치유한 비건인 그녀의 혈액은 콜레스테롤 수치와 당 수치가 낮은 정상 판정을 받았다. 채식 레스토랑 ‘뿌리 온 더 플레이트(PPURI on the Plate)’를 운영하는 강대웅 대표는 고교 시절 명상에 입문하면서 자연스럽게 비건이 된 경우다. 15년 동안 동물성 단백질을 먹지 않았지만 그의 건강 상태는 지극히 양호하다. 북미영양사협회의 공식 입장도 균형 잡힌 완전 비건 채식은 모든 연령대 사람에게 적합하다고 인정했다. “이 발표가 중요한 것은 균형 잡힌 채식만으로도 영양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건강한 밥상을 차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동물성 단백질이 포함된 식단이 영양학적으로 꼭 필요하다는 고정관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대웅 대표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알레르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채식 식단이 모든 사람에게 좋다기보다는, 동물성 단백질에 대한 극단적인 추종에 대해 고민해볼 것을 권한다.

채식주의자는 베를린에 가야 된다?

건강한 식단에 대해 고민하며 세계 각국을 여행한 이윤서 씨는 예술가가 많이 사는 도시에 채식 문화가 특히 번성하고 있다고 했다. 독일 베를린, 영국 런던·에든버러, 미국 뉴욕·LA, 호주 멜버른 등에 채식 레스토랑과 채식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다. 젊은 예술가들은 대안적인 삶을 추구하며, 새로운 문물의 유입에 관대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채식 문화에 마음이 열려 있고, 환경과 건강에 대한 관심이 큰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에서는 불교 신자가 많은 대만과 이슬람교를 주로 믿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채식 문화가 발달했다. 인도네시아 발리 중심부에 위치한 우붓은 예술가의 마을로 불릴 정도로 19세기부터 세계의 아티스트들이 몰려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요즘 우붓에서는 명상과 요가를 즐기며 맛있는 채식을 만끽할 수 있는 100% 비건 여행도 가능할 정도다. 재미있는 것은 세계 최고의 맥주와 소시지 소비국인 독일에서도 채식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는 점이다. 2백 년 전통의 옥토버페스트에도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가 등장했으며, 1천여 개가 넘는 채식 레스토랑이 성업하고 있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슈퍼마켓 베간즈(Veganz)와 채식주의 상품 전용 도매상 AVE도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 베간즈는 세계 최초의 비건 전용 슈퍼마켓인데, 동물성 재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아이스크림, 과자, 애완동물 사료까지 없는 것이 없다. 독일의 채식 인구는 10% 정도로 추정되지만, 베간즈와 AVE의 고객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채식주의자만 채식을 즐긴다는 생각은 이제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미슐랭 가이드에 오르는 채식 레스토랑

미슐랭 가이드에도 채식주의자를 위한 레스토랑이 심심치 않게 이름을 올리고 있다. 미식의 도시 파리의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 ‘라르페주(L’Arpege)’와 ‘랑브루아지(L’Ambroisie)’는 엄밀히 말해 채식 레스토랑은 아니지만 비건도 즐겨 찾을 정도로 채식 메뉴가 많고 특별 주문도 가능하다. 특히 알랭 파사드 셰프의 라르페주는 채식 메뉴가 다채롭기로 유명한데, 그는 지금은 세계적 트렌드가 된 직영 농장을 경영하는 셰프의 원조다. 유기농으로 재배하는 농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레스토랑으로 매일 공수되는 신선한 채소에 대한 홍보를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하고 있다. 채소 요리 중심의 메뉴를 선보이지만, 이곳은 파리에서 가장 비싼 레스토랑으로 유명하다. 베르나르도 접시에 담아 서브하는, 구운 비트에 꿀을 올린 요리는 맛있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 그 가격이 80유로나 된다. 하지만 정작 알랭 파사드 셰프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며 고기 요리 테크닉도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채소 소시지와 라비올리 등 채소로 만든 요리를 세계적으로 유행시키며, 자연주의 식단을 이끈 선두 주자가 된 그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뉴욕 역시 최근 채식 레스토랑이 증가하는 추세인데,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인 에릭 리퍼트의 ‘르 베르나르댕(Le Bernardin)’은 해산물로만 이루어진 메뉴 구성으로 세미베지테리언에게 인기다. 우리나라에도 채식 레스토랑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뿌리 온 더 플레이트’는 ‘맛있는’ 비건 요리를 추구하는데, 동물 단백질이 없어도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다채로운 메뉴 구성과 맛이 훌륭하다. 글루텐과 설탕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데, 현미로 만든 디저트가 대단히 달콤하다. 이외에 ‘브라운 라이스’, ‘슬런치 팩토리’ 등의 레스토랑도 추천할 만하다. 미식가들이 좋아하는 이유석 셰프의 레스토랑 ‘루이상크’는 귀네스 팰트로처럼 네발 달린 동물 고기를 먹지 않는 세미베지테리언에게 인기 있다. 이곳의 인기 메뉴는 생선, 메추리, 오리, 닭 등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예약할 때 주문하면 메뉴에는 없지만 비건을 위한 요리를 특별히 만들어주기도 한다. 모던 한식 레스토랑 ‘밍글스’ 역시 하루 전에 주문하면 비건을 위한 메뉴를 제공한다. 이곳의 강민구 셰프는 우리나라의 기본 양념이자 소스인 ‘장’을 활용한 다양한 요리를 선보이는데, 그의 채소 요리는 맛깔스럽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비건 체험하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채식주의자였다는 것을 아는지? <다빈치의 부엌>(빅하우스)에서 저자 데이브 드윗은 다빈치는 붉은 고기를 먹지 않았고, 채소를 많이 섭취했다고 주장한다. “이제 자연은 그대를 만족하게 할 단순한 음식을 더 내놓지 않는가? 그리고 그런 단순한 음식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플라티나와 다른 요리사들이 그랬듯이, 그것들을 혼합해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가?” 다빈치는 노트에 이런 기록을 남겨 후대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다빈치가 동물에 대한 동정심과 전쟁 무기를 만든 공격성, 두 가지 모습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21세기에도 채식주의자임을 선언한다는 것은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시달리며 비즈니스에도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니 다빈치가 살았던 15세기에는 오죽했을까?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가톨릭 정교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동물을 다스릴 지배권을 주었다고 찬미했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었다. 어이없게도, 교회는 채식주의자를 이단아라는 명목으로 화형에 처하거나 교수형을 시킬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다빈치는 결코 자신의 음식 취향을 공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중세에 채소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 몫이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채소가 건강에 좋다는 것이 알려져 부자들도 채소를 선호하게 됐다. 호화로운 연회에서 고기가 아니라 채소와 파스타가 최고급 요리로 추앙받기 시작한 것이다. 다빈치는 신의 존재를 믿었지만 신에 대한 간구보다는 생명 존중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채식주의는 바로 이러한 가치관에서 발현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다만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애잔한 마음으로 소, 돼지 등 주인을 알아보는 동물은 최대한 적게 먹자는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에 가깝다. 채식주의에 관심을 가지면서 비건은 시야가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깊이 동감하게 됐다. 동물 단백질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면 새롭게 먹을 수 있는 음식 가짓수가 많아지고, 환경과 동물 권리 보호까지 생각할 수 있으니 반갑다. 셰프와 미식가에게 채소는 상상력을 돋울 수 있는 최고의 식재료이기도 하다. 여러분도 단기간의 비건 체험으로 새로운 경험을 만끽해보는 것은 어떨까? 폴 매카트니의 제안처럼 일주일 단 하루만이라도 동물 단백질을 먹지 않는 것도 권하고 싶다. 미래의 지구를 위해 건강한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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