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CULTURE ’23-24 Winter SPECIAL] 하루키의 텍스트가 기억될, 미래의 기념관이자 현재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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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3, 2024

글 박혜연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무라카미 하루키(1949년생)의 신작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街とその不確かな壁)>이 지난해 일본에서 단숨에 상반기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얼마 전 필자가 방문한 쓰타야 서점에서도 여전히 상위권에 머무르고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2020년 3월 초, 하루키는 대가답게 ‘위기’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사회적 패닉의 조류 속에서 그는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가 3년에 걸쳐 또 한 편의 장편소설을 쥐고 세상에 다시 나왔다. 그리고 2021년 9월, 그가 한창 글에 몰두할 무렵, 모교인 와세다 대학교 캠퍼스에 세계적 ‘대세’ 건축가 구마 겐고의 설계로 ‘하루키 라이브러리’가 탄생했다. 공식 명칭은 ‘와세다 대학 국제 문학관(早稲田大学 国際文学館)’. 단발적 방문으로 끝나는 기념관이 아니라 누구나 매일 찾을 수 있는 ‘도서관’으로, 하루키의 40년 글쓰기 이력을 담은 기록 보관소이자 번역을 중심으로 한 세계문학과 다양한 문화를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팬데믹이 막을 내린 지금, 누군가는 도쿄로 직접 날아가 이곳에서 ‘하루키’를 만날 수 있겠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의 신작 소설을 넘기며 그가 설계한 텍스트 속 여행을 떠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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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에 걸친 문학 세계를 담은 ‘하루키 라이브러리’

2016년 가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출생지인 덴마크 오덴세에서 두 일본인 거장이 만났다. 안데르센 문학상 수상자인 무라카미 하루키와 안데르센 박물관의 설계자로 선정된 구마 겐고의 만남이었다. 시상식에서 하루키는 안데르센의 <그림자>라는 소설을 인용하면서 ‘그림자’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림자[影]를 배제하면 얇고 평면적인 환상만 남게 됩니다.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 빛은 진정한 빛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림자가 있듯, 사회와 국가에도 그들만의 어둡고 피하고 싶은 그림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부정적인 부분에는 되도록 시선을 두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루키는 우리가 견고하게 입체적인 상태가 되려면 반드시 그림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림자를 배제함으로써 모든 것이 밝아지고 매끄럽게 빛나는 현대를 비판했다.
하루키의 수상 소감에서 깊은 영감을 얻은 구마 겐고는 그가 언급한 그림자를 가슴에 담아둔다. 그리고 얼마 뒤 하루키로부터 와세다 대학 내 도서관 설계 의뢰를 받게 된다. 하지만 새 건물이 아닌 오래된 평범한 건물의 개축 작업이라 미안해하는 하루키의 마음과는 다르게 구마 겐고는 오히려 기뻐했다. 완전한 무(無)에서 하루키의 세계를 지어내는 건 너무 어려운 과제였기 때문이었다고. 일단 하루키가 오덴세 연설에서 언급한 그 건물의 역사와 함께한 그림자를 키워나가보기로 한다. 식물을 가꾸듯 평범한 건물의 그림자를 구마 겐고의 조형언어를 양분으로 삼아 키워나간 끝에 2021년 하루키 라이브러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루키는 수기 원고부터 해외에서 발행한 저서, 그가 참고한 서적, 그리고 재즈 바 ‘피터캣’을 운영할 당시 사용한 수만 장의 재즈 레코드를 이 도서관에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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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비일상을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터널’
하루키 라이브러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터널’ 공간이다. 구마 겐고는 지극히 평범했던 콘크리트 상자 모양의 와세다 대학 4호관의 층을 나누던 내부의 슬래브(slab) 2장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동굴 형상을 한 터널 공간을 만들어 넣었다. 터널 중앙을 잇는 나무 프레임 사이로 원래 자리했던 천장을 노출해, 공간에 깊이감을 부여하면서도 기존 건물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터널은 하루키의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을 갑자기 다른 세계로 끌어내는 공간으로, 이 갑작스러운 전환의 매력이 하루키 소설의 핵심이라고 구마 겐고는 설명한다(구마 겐고가 이끄는 건축 사무소 KKAA 자료 참고). 그래서 터널을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이끄는 체험 공간으로 설계했다. 책장을 넘겨 텍스트가 시각 정보로, 시각 정보가 뇌의 신경 정보로, 신경 정보가 가슴으로 들어온 순간 우리는 이야기 동굴에 완전히 빠져 들어간다. 이처럼 빠져 ‘들어감’이라는 문학적 의미를 조형적 표현으로 시도한 ‘터널’의 배경에서 문학과 건축의 미묘한 교차로 생겨나는 영감이 느껴진다.
건물 내부에 자리한 터널의 존재를 외부에서 암시하기 위해 서쪽 파사드로부터 시작되는 나무 루버 프레임이 건물을 감싸고 있는데, 이 프레임은 각기 다른 폭으로 구성되어 남쪽으로 휘어가고, 마지막은 동쪽 하늘을 향해 사라져가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구조 역시 구마 겐고가 하루키의 문학에서 느껴지는 바를 조형언어로 표현해낸 것으로, 독자는 하루키의 소설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지만, 그 세계 또한 확실한 게 아니라 언제든 윤곽을 잃고 사라질 수 있는 불확실성을 품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건물 파사드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기에, 하루키의 문학에서 느껴지는 모호함과 미지의 여정이 연상되기도 한다. 또 평범함의 대표 격인 박스 형태 건물과 비일상적인 모습인 파사드의 조화는 마치 하루키 문학 속 이항대립의 오묘한 어우러짐을 빚어낸 조형적 변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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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영혼이 깃든 듯한 분위기와 디테일
경사지에 세운 건물은 지하 1층과 지상 1층이 외부와 통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지하 1층에는 하루키의 서재를 재현한 특별한 공간과 와세다 대학생들이 운영하는 카페가 자리하며, 1층에는 ‘갤러리 라운지’와 ‘오디오 룸’이 있다. 구마 겐고가 직접 선택한 덴마크 고가구를 내부 곳곳에 놓아두었는데, 이는 안데르센 마을 오덴세에서의 인연을 은유하는 장치가 되어준다. 실제 하루키가 사용하던 가구들도 배치되어 있다. 갤러리 라운지 가운데에는 열댓 명이 둘러앉아도 넉넉할 것 같은 커다란 원목 테이블이 놓여 있고, 양 벽면에는 하루키의 초판부터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긴 세월 필력을 이어온 작가의 살아 있는 역사를 보존한 공간으로, 한글 번역본도 시야에 들어왔다.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있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오디오 룸에는 그가 평생 모은 LP 레코드 컬렉션의 일부가 진열되어 있고, 언제 들어도 감미로운 재즈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곳에 적용한 사운드 시스템은 하루키의 개인 오디오 어드바이저가 직접 세팅해 작가의 오디오 시스템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또 방문자를 위해 곳곳에 놓인 작은 공간마다 하루키의 세계를 다양하게 녹여내고자 한 건축가의 섬세한 배려가 느껴진다.
익숙한 듯 처음 대하는 듯한, 혹은 낯선 듯 친근하게 느껴지는 하루키 라이브러리는 단순한 도서관의 역할을 뛰어넘어 어디에든 앉아 여유를 부리다 갈 수 있는 공간으로, 모든 설정값이 ‘따뜻함’이었다. 미묘한 기시감과 미시감 사이를 오가며 일상과 문학 속 비일상을 헤매는 재미를 누리거나 재즈 선율을 벗 삼아 쉬었다 갈 수 있는 멋진 공간을 또 하나 발견했기에 ‘도심 속 문학의 오아시스’라는 별칭을 붙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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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 ’23-24 Winter SPECIAL]

01. Intro_다양성의 가치  보러 가기
02. Front Story_타이베이 비엔날레(Taipei Biennial) 2023_<Small World>_나와 너, 그들의 이야기… 우리의 화두  보러 가기
03. 가장 사적인 ‘취향 페어링’을 찾아서  보러 가기
04. A Glimpse into Vienna’s Art Scene _도시 자체로 ‘문화예술 특별구’  보러 가기
05. A Glimpse into Vienna’s Art Scene _#세상의 시선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예술  보러 가기
06. A Glimpse into Vienna’s Art Scene _#고전부터 컨템퍼러리까지 아우르는 월드 클래스 컬렉션과 기획전  보러 가기
07. A Glimpse into Vienna’s Art Scene _#비엔나에 신선함을 불어넣는 새 랜드마크들  보러 가기
08. A Glimpse into Vienna’s Art Scene _#차근차근 보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가는 미술 시장 보러 가기
09. Interview with 마뉴엘 솔라노(Manuel Solano)_이해하고 이해받기 위한 여정 보러 가기
10. 뉴욕(New York) 리포트_지금 우리 미술을 향한, 세상의 달라진 시선  보러 가기
11. 시드니 아트스페이스(Artspace) 재개관을 맞이하며_Reflections on Art and Diversity  보러 가기
12. 하루키의 텍스트가 기억될,미래의 기념관이자 현재의 도서관  보러 가기
13. 마크 로스코(Mark Rothko)_화폭에 담긴 음률  보러 가기
14. 호시노야 구꽌(HOSHINOYA Guguan)__물, 바람이 만나는 계곡의 휴식  보러 가기
15. Exhibition in Focus  보러 가기
16. Remember the EXHIBITION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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