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미디어 시대를 열어가는 현대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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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 2022

글 고성연

<이안 쳉: 세계건설>_리움미술관


언젠가부터 동시대 미술을 다루는 공간에 가면 느끼는 건 그다지 새로운 게 없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심미적, 지적 수준이나 감동과는 별개의 문제다(아름다운 완성도를 품은 작품은 많다).
그러나 자주 접하다 보면 뇌리를 때리는 ‘참신함’은 별로 찾기 힘들고, 뭔가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 같은 절박함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 건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한때 예술가에게 창작 충동이 되었던 현대성은 이제 공허한 원칙이 되어버리면서 ‘현대병’이 되었다는 문필가 가오싱젠의 진단과 맞닿는 지점일 것이다. ‘새로움’은 그에 걸맞은 독특한 조형 수단이나 표현 수단, 개념을 찾아야 하는데,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어찌 그리 쉬이 찾아지겠는가. 그래서 동시대의 새 물결을 예리하게 반영할 수 있는 최적의 수단으로 ‘첨단 기술’은 매력적인 도구임에 틀림없다. 밀도 높은 ‘게임 인류’ 유전자를 지닌 예술가가 인공지능(AI)을 만났을 때 잉태된 결과물이 몹시 흥미로운 이유다. 리움미술관의 전시 작가 이안 쳉(Ian Cheng)이 제안하는 ‘새로운 예술’을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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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그저 단편 애니메이션이나 세련된 게임 화면 같은 느낌이 든다. 다분히 미래적으로 보이는 가상 공간에 캐릭터들이 꼬물꼬물 움직이고, 사건이 일어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묘하게 생동감 있는 화면이 이어진다. 이렇듯 리움미술관의 블랙박스 전시장에 들어가면 우선 결이 비슷한 영상들이 4개의 스크린을 수놓고 있는데,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인 이안 쳉(Ian Cheng) 작가의 ‘사절(Emissaries)’ 3부작 시리즈다. 1984년생으로 아직 30대인 이안 쳉을 처음으로 세계 미술계에 알린 연작인데, 가상의 생태계에서 인공지능(AI)를 지닌 등장인물과 자연환경이 서로 교류하고 반응하면서 늘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라이브 시뮬레이션’ 형식의 작품이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원히 플레이되는 비디오게임’ 같은 것으로, 스토리의 중심축인 ‘사절’이 임무에 성공하거나 실패하면 새 ‘판’이 시작된다. 다시 말해 작품은 끝나지 않는다. 사실상 혼자 알아서 무한 작동하는 불사신 같은 게임이나 마찬가지다.
인지과학과 미술을 전공한 이안 쳉은 ‘사절’ 시리즈 1부를 2015년에 내놓은 데 이어 에피소드를 달리해가며 2017년까지 3부작을 완성했고 AI로 움직이는 디지털 유기체를 미술계에 작품으로 선보였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원래는 별다른 스토리가 없는 시뮬레이션 작업을 했는데, 등장인물들이 서로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펼치도록 만들기 위해, 그리고 메시지 전달을 위한 유인 장치로 ‘내러티브’가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진화를 꾀한다. 전시명처럼 그만의 ‘세계건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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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3.0 세상의 디지털 생명체_AI와 게임 엔진의 ‘침투’

‘사절’ 3부작과 더불어 이번 리움미술관 전시에서 선보인 ‘BOB’(2018~2019)은 이안 쳉의 철학적 사유와 기술적 시도를 관람객 입장에서 볼 때 훨씬 더 흥미롭게 반영한 작품이다. 뱀을 닮은 인공 생명체인 BOB(밥)은 영어로 ‘신념이 담긴 가방(Bag of Beliefs)’이라는 말의 알파벳 첫 글자인 B. O. B를 따서 만든 줄임말로, 우리 자신이 여러 신념으로 뭉친 복잡다단한 존재라는 뜻을 품고 있기도 하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은’ 인간처럼 BOB도 서로 다른 욕구와 신념을 지닌 여러 개의 AI로 이뤄져 있다. 작지만 역동적인 이 디지털 생명체 속에서도 각각의 AI가 저마다 주도권을 잡으려고 경쟁을 한다. 관람객이 ‘BOB Shrine’이라는 앱을 내려받아 접속하면 ‘영혼의 양식’을 골라 먹이처럼 줄 수 있고, 이는 BOB의 신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마치 부모와 친구, 주변인들이 한 인간의 가치관 형성과 성장에 큰 몫을 담당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건강하지 않은 신념이 많이 쌓이는 식으로 악역향을 미치게 되면 심지어 BOB이 죽어버리는 상황도 발생한다(물론 ‘불사신’ 게임 같은 속성을 지녔으므로 부활한다). 단순하고 귀엽기도 하지만 나름의 사유를 이끌어내는 작품이다.
이안 쳉은 이후 내러티브를 한층 강화한 작품을 신작으로 내놓는다. ‘BOB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Life After BOB: The Chalice Study)’(2021)라는 48분짜리 중편 애니메이션이다. 뉴욕의 더 셰드(The Shed), 프랑스 아를에 있는 루마 재단(LUMA Foundation), 베를린의 라이트 아트 스페이스(LAS)가 공동 커미션 작품으로 의뢰했고, 리움미술관까지 지원을 더해 탄생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신경공학자 아버지의 프로젝트로 뇌에 인공지능 BOB을 이식한 소녀 찰리스(Chalice)로 인생의 길잡이 같은 역할을 하는 AI와 공존하면서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성장기를 담았다. 2074년 시점에서 열 살인 찰리스에게 BOB은 ‘최적의 인생 경로’를 시뮬레이션하면서 그에 부합하는 선택을 내리도록 이끈다. 48분의 시간이 속도감 있게 잘 흘러가는 이 작품에서는 인터넷이 세상의 모든 컴퓨터를 연결하듯이 인간의 신경계로 연결되는 ‘웨이비버스’라든지 인터넷 방송처럼 웨이비버스상에서 이뤄지는 방송인 ‘웨이브캐스팅’ 같은 작가가 만들어낸 개념이 나와 앞으로 펼쳐질 웹 4.0, 웹 5.0 시대를 둘러싼 상상력을 자극한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이 작품을 상영하는 무대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옆 공간에는 ‘월드워칭’이라는 모드를 체험할 수 있는 상영관이 하나 있는데, 현장에서 링크를 통해 접속하면 작품 세계를 더 깊이 탐험할 수 있다. 멈춤, 재생 기능으로 관람 속도를 조절하고, 캐릭터 정보를 상세히 볼 수 있는 재미를 선사한다(‘MBTI’ 정보까지 나온다). 전시장이라는 공간적 제약, 그리고 한 번에 1명만 접속 가능하다는 점에서 인원 제약도 있긴 하지만 약간의 ‘개입’이 가능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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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이 ‘개입’하는 쌍방향 콘텐츠 시대를 꿈꾸다

‘BOB 이후의 삶’을 비롯해 이안 쳉의 ‘디지털 생명체’ 같은 작품에 대한 반응은 한마디로 단정하기 힘들다. 게임 메커니즘이나 ‘마블 유니버스’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세계관에 노출되어왔다면 친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도대체 뭐지?’ 하는 어리둥절한 반응도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형식도, 내용도 ‘신선하다’는 점에는 대다수가 동의하지 않을까 싶다. ‘BOB 이후의 삶’의 경우, 실제로 게임 엔진으로 이처럼 어느 정도 길고 내러티브까지 갖춘 작품을 내놓은 건 이안 쳉이 처음이다. 팬데믹 기간과 맞물려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는데, 영화계의 제작비와 비교해 월등히 저렴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작업을 마쳤다고.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은 이안 쳉 작가는 어째서 예술 작품을 하는 데 게임 엔진이라는 수단을 활용했냐는 질문에 “쉬운 방식으로 일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경향이 있다”고 미소 지으며 “(그처럼)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제작 과정을 버텨낼 힘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디어의 경계가 없어지고 있는 시대를 만나 ‘타이밍도 좋았다’고 자평했다. 게임 엔진을 활용한 작품이 후에 메타버스, NFT,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등 다른 플랫폼에서 변형되고 새롭게 보여질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또 아직은 제한적이지만, 미래에는 하나의 콘텐츠가 여러 미디어 플랫폼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분화되고 확산되는 진정한 트랜스미디어 단계로 진화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품게 한다. 관람객이 참여하는 ‘월드워칭’ 모드 같은 경우에도 “지금은 웹으로 설명을 띄우고, 멈춤, 재생을 조절하는 수준이지만 나중에는 캐릭터들 안에 AI를 심어 관람객과 상호작용을 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이안 쳉은 설명했다.
이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하며 그가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뭘까? “인공지능이 나보다 내 삶을 더 잘 살아낼 수 있다면, 인간인 내가 할 일이 남아 있기는 할까?” ‘BOB 이후의 삶’에서 주인공 찰리스가 던지는 이 질문을 위시해, 이안 쳉의 철학적 탐구는 계속 곱씹어볼 만한 면이 있다. 심리학을 가까이 접해온 그는 모든 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부모나 지인의 영향력 아래 형성된 ‘인생 각본’을 갖고 살아간다는 이론에 관심이 많았는데, 성인이 된 어느 시점에서 ‘유지할 것’과 ‘버릴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자아 성찰을 하는 과정에 대해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싶었다고 한다. SF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더해가는 그가 어떤 차기작을 내놓을지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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