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벗 삼은 예술, 마르파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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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 2016

글 황다나

사뭇 황량한 풍경이 펼쳐져 있는 미국 텍사스 주에는 한때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던 작은 마을이 하나 있다. 미니멀 아트의 거장으로 20세기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도널드 저드가 화려했던 뉴욕 생활을 과감히 접고 이주해 여생을 보냈던 마르파(Marfa)라는 곳이다. 감성이 아니라 이성을 내세우지만 묘한 비례미의 감동을 자아내는 저드의 걸작들이 대자연과 묘하게, 그리고 어쩌면 가장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이 외딴 마을을 한 아트 애호가가 직접 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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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텍사스 주의 극서부 멕시코 지역을 가로질러 뻗어 있는 치후아후안 사막 한편에 위치한 마르파(Marfa). 2천 명이 채 안 되는 주민들(그나마 그중 일부는 휴가철에만 이곳의 별장을 찾는다)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개인 소유의 전용 비행기가 아닌 일반 항공사 운항편을 이용해 도착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공항인 엘 파소(El Paso) 또는 미들랜드(Midland) 공항에서 각각 자동차로 3시간 이상 떨어진 이곳으로 향하는 여정은 어지간히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휴대폰은 수신 신호를 잃기 일쑤인 데다가 1950년대 영화 <자이언트>를 촬영하던 당시 머물렀다던 주연 배우의 이름을 딴 제임스 딘 룸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스위트룸이 인상적인 호텔 파이사노(Hotel Paisano) 외에는 마땅히 숙박할 만한 곳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주변 지인들에게 이런저런 감언이설로 함께 가지 않겠냐고 운을 떼봐도 별 소용이 없을 가능성이 꽤 크다. 그도 그럴 것이 <자이언트>라면 그야말로 허허벌판을 개척해나가는 영화가 아니던가. 하지만 현대미술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생각을 달리할지도 모르겠다. 마르파는 미니멀 아트(정작 작가 자신은 이런 식의 명명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의 대가로 손꼽히는 도널드 저드(Donald Judd, 1928~1994)가 자신과 동료들의 작품을 영구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 재건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광활한 대지를 품은 불모의 땅에 예술을 심다
미술관이라는 형태적, 본질적 벽에 부딪혀 한계를 느끼고 들썩대던 뉴욕 미술 시장에서 벗어나고자 저드는 1971년 광활한 대지를 품은 마르파를 처음 방문했고, 그 뒤로 틈이 날 때마다 방문해 시간을 보내곤 했다. 걸출한 이론가이기도 했던 그는 회화의 한계성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회화와 조각을 넘나드는 3차원 입방체의 ‘오브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아가 “사물에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외에 어떤 의미도 없다”라면서 기교를 뺀 기하학적인 형태의 작품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했다. 합판, 알루미늄, 래커 칠을 한 아연 도금, 플렉시글라스 등 공업용 재료를 사용해 기계적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는 저드의 작품들. 지극히 이성적으로 배열된 이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건 저드의 작품에 담긴 비례미에 이미 빠졌다는 방증일 것이다.
1981년 아예 마르파로 이주한 그는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뉴욕과 이곳을 오가며 불모의 땅을 비로소 자신의 작품에 딱 어울리는 하나의 전시장으로, 더 나아가서는 하나의 예술 공동체로 일궈내며 평생의 숙원을 이뤘다. 마르파의 황량한 들판에 놓인 저드의 절제미 돋보이는 작품들은 지평선 너머 펼쳐지는 사막, 바람에 흩날리며 춤을 추는 듯한 들판, 그리고 저녁 무렵이면 노을로 물드는 고요한 하늘과 은근히 잘 어우러진다. 이곳을 찾은 관람객이 이런 장관을 바라보며 무아지경에 빠진 순간, 비로소 작품이 완성되는 게 아닐까 싶다. 마르파 곳곳에 저드 재단(Judd Foundation)의 건물이 흩어져 있다. 그 건물들 안에서는 합판, 알루미늄 등 그가 종종 사용하던 재료를 다양한 색상, 길이, 비율로 버무려 나열한 저드의 스튜디오, 그가 직접 디자인한 극도로 ‘미니멀’한 책상, 의자, 침대, 테이블 등 가구, 그리고 그가 생전에 수집한 다른 아티스트들의 컬렉션도 만나볼 수 있다. 마르파가 지금처럼 아트 타운으로 거듭나게 된 데는 뉴욕 시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소도시에 현대미술 거장의 작품을 대거 영구 전시해 미술 애호가들을 사로잡은 디아 비콘(Dia Beacon) 미술관의 지원이 한몫을 톡톡히 했다. 허드슨 강변 북쪽으로 달리는 기차 창 너머 풍광을 즐기며 가는 여정마저도 유쾌한 디아 비콘. 옛 제과 회사의 공장 건물을 개조해 층고가 높고 탁 트인 이 파격적인 공간에 저드 외에도 같은 미니멀리즘 아티스트로 분류되는 댄 플래빈(Dan Flavin), 솔 르윗(Sol Lewitt) 등은 물론,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실험적인 대형 작품이 들어서 있다. 저드는 1979년 디아 재단(Dia Foundation)과 협업해 과거 미군 부대 주둔지로 사용되던 마르파의 한 건물을 사들여 별다른 외형의 변화를 주지 않은 채 미술관으로 개조했다. 바로 1986년 마르파에 문을 연 치나티(Chinati) 재단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움, 형용을 넘어선 감동
치나티 재단의 야외 전시 공간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받은 인상은 뉴욕 인근의 디아 비콘을 처음 방문했을 때 느낀 충격의 몇 갑절이었다. 도서관 사서가 협소한 서랍장에 꼼꼼히 분류해놓은 듯한 전시도, 성전 같은 과다한 건축에 빛바랜 작품도 이곳에는 없었다. 그가 생전에 늘 안타깝게 여기던 예술과 건축의 격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창 안으로 스며드는 자연 채광은 저드 특유의 차가우면서도 장식적인 비례미와 절제된 변주가 선사하는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며, 건물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무엇보다도 1.6km에 이르는, 야외에 설치된 입방체 형태의 오브제 설치 작품이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지평선 너머 드리우는 구름의 아득한 그림자가 펼쳐내는 변주와 묘하게 어우러진 채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 모습은 절로 말문이 막히게 만든다. 자연을 벗 삼은 예술을 앞에 두고, 적적한 사막 한가운데를 달리며 이 머나먼 오지로 가는 여정에서 이미 커질 대로 커져버린 상상 속 경외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한국에 파견돼 군 복무를 했던 경험이 있는 저드가 화려하지 않지만 정갈한 여백의 미를 살린 한국의 전통 조경에서 다소 영감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스쳤다.
아무리 감동이 깊다 해도 그저 작품 감상으로만 마르파 여행을 끝내서는 아쉬울 것 같다. 치나티 재단에서 미술관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이 재단은 칼 안드레(Carl Andre), 댄 플래빈, 존 체임벌린(John Chamberlain), 로니 혼(Roni Horn), 리처드 롱(Richard Long) 등 1960~1970년대 저드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주요 작가들의 작품 역시 함께 전시하고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또 현시대의 유망 작가들을 위한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물론 심포지엄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 일반 방문객에게는 자연과 조화를 이룬 이 방대한 전시장에서 스스로 깨닫고 인식의 범위를 넓힐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결코 과하지 않은 도슨트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저드 재단의 풍부한 아카이브, 치나티 재단의 전시 공간과 프로그램을 접하기 위해서는 사전 예약이 필수다. 또 아티스트가 작업하던 건물과 스튜디오를 비롯해 마르파의 명소를 방문하려고 해도 마찬가지다. 자칫 먼 길을 와놓고도 방문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없도록 필히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공식 홈페이지 www.juddfoundation.org, www.chinati.org 참조). 뭔가 끌리기는 하지만 여전히 마르파로 향하는 머나먼 여정이 못내 망설여진다면 괜찮은 대안이 하나 생겼다. 15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복구 작업을 마친 저드 재단의 뉴욕 소호 전시 공간도 2013년 6월 드디어 일반에 공개됐으니 이곳을 먼저 방문한 뒤에 마르파행을 결정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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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미술의 또 다른 백미, 사막 속 ‘명품 매장’
어떤 이유에서든 마침내 마르파를 찾는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명소가 있다. 90번 국도(U.S. Route 90)에 위치한 마르파 프라다(Marfa Prada)가 그것이다. 사실 공식적으로는 밸런타인(Valentine)이라는 작은 마을의 서쪽 경계를 벗어나 자리 잡은 이 설치물은 베를린을 주 무대로 활동하며, 지난해 서울 플라토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해진 미샤엘 엘름그린과 잉가르 드라그세트(Michael Elmgreen & Ingar Dragset) 듀오가 소비 지상주의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틀어 담아낸 설치 작품이다. 지난 2005년 10월, 명품 브랜드 프라다의 2005년 F/W 컬렉션 제품을 ‘전시’해 설치 작품으로 첫선을 보인 이래 많은 이들이 다녀갔지만, 도난 방지를 이유로 그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바닥이 없는 가방 6개와 오른쪽만 남은 슈즈 20켤레가 가지런히 정렬된 전시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벌레의 천국이 돼가고 있다. 명품을 진열하는 장소로 뉴욕이나 파리 도심이 아니라 황량한 사막을 선택해 ‘탈맥락화’ 과정을 보여준 이 작품은 저드와 닮은꼴이라 흥미롭다. 동시대 미술을 관통하며, 비판적 성찰을 위트 있게 풀어온 이 2인조 아티스트 역시 저드와 마찬가지로 장소적 특수성의 이점을 살려 탈맥락화 과정을 엿볼 수 있도록 한 예술 작품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더욱 인상적이다.
이 작품은 공공 미술을 선보이는 뉴욕 소재의 비영리단체 아트 프로덕션 펀드(Art Production Fund)와 볼룸 마르파(Ballroom Marfa)가 함께 기획해 10여 년 전에 선보이면서 마르파의 새로운 마스코트로 거듭났다. 하지만 플레이보이 잡지사에서 직접 기획해 인근에 설치한 리처드 필립스 작품이 ‘허가받지 않은 광고 아니냐’는 이유로 교통당국의 저지를 받으면서 덩달아 철거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듀오의 설치물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마르파 프라다 살리기(Save Marfa Prada)’ 운동이 일어난 데다, 2013년 11월 플레이보이 소유의 작품이 반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댈러스에 위치한 미술관으로 옮겨지면서 극적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숨 가쁘게 살아가는 도시인들이 저 멀리 마르파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딛는 건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결단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느껴보고 싶다면, 그리고 우연히라도 텍사스 근처에 간다면 저드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마을 자체로 ‘대지 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마을에 꼭 들러보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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