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월취(日將月就) 미식 풍경, 식탁의 행복을 곱씹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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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07, 2018

글 고성연

얼마 전 스페인의 기대수명이 2040년께면 세계 1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와 화제가 됐다. 미국 보건계량평가연구소(HME)가 영국 의학 학술지 <랜싯>에 게재한 내용인데,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스페인 국민의 평균 기대수명이 85.8세로 ‘장수 국가’로 유명한 일본(85.7세)을 제치고 최장수국의 자리를 넘볼 것으로 전망됐다(한국의 경우는 83.5세). 영국 더 타임스를 비롯한 언론 매체에서는 ‘그들은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는데 왜 그렇게 장수할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여기에는 올리브 오일, 견과류 같은 지중해식 식습관이 큰 몫을 차지한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었다. 게다가 여러 번 나눠 즐기면서 먹는 식문화도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요즘 ‘럭셔리 고메(luxury gourmet)’가 인기를 얻으면서 날이 갈수록 풍성해지는 미식 풍경을 보면서 라이프스타일의 중요한 부분이자 총체적 서비스 경험으로서의 식문화를 생각해보게 된다.


미식의 럭셔리

‘음식이 사람을 규정짓는다’고 말하려면 음식에 대한 최소한의 선택이 존재해야만 한다. 뉴욕의 저명한 미식 칼럼니스트 애덤 고프닉(Adam Gopnik)은 이렇게 강조하면서 오늘날 식생활을 둘러싼 환경의 발달로 많은 이들이 맛을 상당히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그래서 음식이 우리를 규정한다기보다 우리 자신이 ‘나’라고 정의하는 것을 찾아서 섭렵하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우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보다 다채로운 미식 풍경이 뒷받침되고 환경이나 웰빙 등 생각할 거리가 늘어나면서 확실히 사람들의 취향은 더 까다로워졌다. 단순히 밥 한 끼를 잘 해결하는 수준이 아니라 되도록 최상의 미각적 만족을 추구하는 ‘럭셔리 고메(luxury gourmet)족’을 주변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세상이다. 남들에게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패션이나 리빙만이 아니라 내 안에서 소화되는 식생활, ‘토털 럭셔리’를 지향하는 소비자층도 있지만, 남들이 하나쯤 다 갖고 있다는 명품 브랜드에는 별 관심 없어도 입에 들어가는 것만은 ‘미식’을 고집하는 이들도 많다.
미식의 럭셔리는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어쩌면 그 어떤 범주보다도 섬세하고 수준 높은 호사일지도 모르겠다. ‘식탁의 즐거움’은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느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기쁨의 원천이지만, 실체는 사라지고 순간의 기억과 경험만 남는 문화적인 럭셔리이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작은 사치(luxury)’이기는 하지만(삼시 세끼를 풀코스 정찬으로 챙겨 먹지는 쉽지 않기에) 명품 백이나 구두처럼 적어도 내 소장품 컬렉션에 남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밥 한 끼보다 비싼 디저트, 준수한 스마트폰보다 비싼 한 끼 식사를 기꺼이 택하는 심리는 한 번뿐인 인생의 라이프스타일을 최우선으로 하는 ‘욜로족’이라든가 삶의 질을 위해서는 가격에 상관없이 ‘나’를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나심비’ 같은 키워드가 떠오르는 요즘 트렌드나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더구나 건강이나 웰빙 등이 삶의 주요 가치가 된 오늘날에는 미식이 적어도 특정 품목에 대해서는 기꺼이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트레이딩 업’ 소비의 대상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다양성과 섬세함을 더 짙게 품어가는 미식의 생태계
많은 학자와 지식인이 주장했듯이 취향은 문화적인 속성을 지녔고, 경험에 의해 더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발끝으로 오래 서 있을수록 춤을 쉽게 출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애덤 고프닉은 설명하면서 연습으로 거의 완벽한 경지에 이를 수 있지만, 교습까지 갖춰 연습하면 그보다 더 완벽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식도 제대로 즐기려면 많이 경험하고, 배워야 한다는 얘기다. 요즘에는 소위 ‘먹방’, ‘쿡방’, ‘미식 기행’ 같은 방송 프로그램이나 각종 매체를 통한 정보가 많이 쏟아지기에 대중의 눈높이는 어차피 높아져 있다(물론 때로는 미디어 효과에만 기댄 ‘거품’도 있지만, 머지않아 들켜버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길거리 음식부터, 풀코스로 서빙되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정찬까지 ‘대강’ 해서는 안 된다. 대신 어느 영역에서든 ‘최고’라는 입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미식가들의 인정을 받는 경우에는 불황에도 기꺼이 지갑을 열게 한다. 국밥도 스타 셰프가 운영하는 데다 맛까지 좋다고 소문난 집은 조금 더 프리미엄이 붙어도 사람이 들끓는다(박찬일 셰프의 광화문 국밥 같은 경우가 그렇다). 특급 호텔에서 미슐랭 스타 셰프들을 모셔와 벌이는 최상급 ‘초청 갈라’ 디너 같은 미식 프로모션은 샴페인이나 와인 페어링까지 곁들이면 웬만한 명품 브랜드의 패딩 가격이 드는데도 거의 ‘매진’된다. 지갑을 꺼내 들 의향이 있다 해도 다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봄 한국을 처음 찾은 스타 셰프 알랭 뒤카스의 갈라 디너는 모 브랜드의 VIP 고객만 누렸듯이, 아예 특정한 고객층을 대상으로 ‘기획된’ 만찬도 있다. 단순히 음식만이 아니라 셰프나 레스토랑의 스토리텔링, 혹은 아티스트나 디자이너와의 협업으로 더욱 매력적인 요소를 가미한 ‘문화 상품’처럼 기획되는 경우가 많다. 해외의 유수 글로벌 도시에서는 이미 흔한 풍경이지만, 미술관에서도 스토리텔링을 덧댄 미식을 시도하고 있다. 올가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최정화 작가의 <MMCA 현대차 시리즈 2018: 최정화 ? 꽃, 숲> 전시에 맞춰 그랜드하얏트 서울과 손잡고 ‘애프터눈 티 뷔페’를 판매하기도 했다. 작가의 작품들을 테마로 맛, 색감, 조형 등의 다양한 요소들을 아우르면서 개발한 마카롱, 무스 케이크, 쿠키 같은 디저트 세트다.
미식의 럭셔리 물결은 ‘커피 공화국’이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높은 커피에도 눈에 띄게 번지고 있다. 커피 세계에서 세계적인 브랜드 인지도를 지닌 블루 보틀(Blue Bottle)이 한국에 상륙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 스타벅스는 리저브 바(Reserve Bar) 매장을 계속 선보이면서 프리미엄 전략을 펼치고 있다. 예컨대 리저브 커피를 접할 수 있음을 뜻하는 ‘R’ 마크가 입구에 보이는 한남동 R점에 가면 1백10년 전통을 자랑한다는 블랙 이글 에스프레소 머신을 활용해 최고급 블렌딩 원두로 뽑아낸 수준급 카페라테를 바리스타가 직접 제조해주며, 커피 요소를 가미한 개성 있는 칵테일도 맛볼 수 있다.
주요 백화점들도 식품관의 고급화나 차별된 확장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오프라인 백화점 매장 매출은 주춤하거나 하락세를 타더라도 식품관만큼은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는 효자 사업군인 데다 ‘가성비’ 좋거나 수준 높은 미식을 즐길 수 있는 백화점의 식품관은 구매력을 갖춘 신규 고객을 유치하는 발판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화점들은 프리미엄 식품 PB(자체 브랜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갤러리아백화점의 ‘고메이 494’ 나 현대백화점의 프리미엄 가정 간편식 ‘원테이블’ 같은 PB 브랜드들이 좋은 예다.

 

미슐랭 가이드가 불러온 효과?
외식 생태계에서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진화도 눈여겨볼 만하다. 3년 전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레스토랑 평가서인 <미슐랭 가이드> 서울판이 나오면서 다양한 요리 장르에서 최고 수준의 미식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 20세기 초 자동차를 이용한 여행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타이어 회사에서 선보인 <미슐랭 가이드>는 2017년 판을 시작으로 최근 2019년 판(www.guide.michelin.co.kr에서 목록을 볼 수 있다)을 발표했다. ‘요리가 훌륭한 레스토랑’에 별 하나, ‘요리가 훌륭해 찾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레스토랑’에 별 둘, 요리가 탁월해 특별히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는 레스토랑’에 최고 등급인 별 셋을 준다(이 밖에 별 등급은 아니지만 ‘가성비’가 훌륭한 레스토랑에 주는 ‘빕 구르망(Bib Gourmand)과 좋은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에 부여하는 ‘더 플레이트(The Plate)도 있다). <미슐랭 가이드> 서울판이 한식에만 우호적이라는 비판도 있고, ‘별’을 받은 효과가 지속적이지는 않다는 지적도 있지만, 이 명성 자자한 미식 가이드의 존재는 아직 초기여도 영향력이 있다. 미슐랭의 별은 미식가라면 관심의 촉수가 뻗치지 않기가 힘들고, 이 때문에 이 생태계에 속한 공급업자들도 은근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해외에서는 미슐랭 스타를 받은 셰프들이 강도 높은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을 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미슐랭 덕분에 미식이라는 개념 자체에 사람들이 훨씬 더 관심을 쏟고 있는 게 사실이다.
갑론을박이 있더라도 <미슐랭 가이드>의 기준은 어쨌든 그들의 것이다. 민감성 때문에 미슐랭은 대체로 어떤 논란에도 언급 자체를 삼가는 편이지만, 업계 관계자들이 대부분 동의하는 기준점은 ‘총체적 경험’으로서의 서비스다(물론 본질적인 ‘훌륭하고 창의적인 요리’가 최우선 순위이자 기본 요건이겠지만). 그도 그럴 것이 미슐랭 별을 획득하는 대부분의 레스토랑들이 예약제와 코스 요리로 진행하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푸드 아트’로 대접받을 정도의 콘텐츠(대부분 ‘코스’ 형태라 점심에도 ‘단품’ 요리를 주문할 수 없다는 점은 솔직히 아쉽다)와 서비스를 아우르는 총체적이고 사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음식만이 아니라 페어링 리스트가 잘 구비돼 있고, 커피 같은 마무리도 깔끔해야 하며, 공간 인테리어와 분위기도 나름의 정체성을 띠면서 편안해야 한다. 파인 다이닝만의 독특한 물리적 환경에 대한 경험은 고객을 ‘다시 찾게’ 만드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평균 이용 횟수와 1인당 지출 비용이 높은 충성도 높은 고객일수록 물리적 환경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중 제일 중요한 요소는 쾌적하고 청결하게 관리된 공간이다. 그리고 인테리어와 소품, 건물 외관의 개성과 독특함, 전망 같은 매력이 고객 만족에 큰 영향을 준다(그 밖에도 편안한 좌석, 고객 사이의 독립성, 주차 공간 확보 등 세심하게 신경 쓸 요소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총체적 경험으로서의 미식, 서비스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무엇보다 손님으로서의 나를 대접해준다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드는 진정성 있는 서비스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애초에 레스토랑이라는 공간은 18세기에 프랑스 파리에서 태동할 때부터 타인과 수다를 떨고 토론을 하거나 신문, 책 등 읽을 거리를 가져가는 카페와 달리 나만을 위한 정중하고 따뜻한 서비스를 누리는, 다분히 사적인 성향이 강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하물며 럭셔리 고메를 제공하는 파인 다이닝에서는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의 기준과 기대치가 올라가기 마련이다. 음식이라는 콘텐츠만이 아니라 레스토랑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서비스, 스토리텔링을 함께 접하는 총체적 경험이 럭셔리 고메의 본질이기 때문이다(그게 아니라면 최상의 식재료를 사다가 집에서 요리해 먹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미식 취향이 연습과 경험으로 얻고 다듬어지는 것이라면, 일단은 다시 찾게 만들어야 할 테고 말이다.
한국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도 콘텐츠 자체는 진화했다지만, 이 점에서는 아직 아쉬운 점이 많다. 소위 ‘별’을 달았다는 서울의 유명 레스토랑도 서비스 면에서는 다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경우가 꽤 있다. 결국 서비스의 품격은 서빙을 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물론 서비스를 받는 사람의 기본적인 태도도 중요하다). ‘파인 다이닝’ 공간의 정석대로 메뉴를 설명해주지만, 무언가에 쫓기듯이 빠르게 읊조리고 만다든지, 얼굴이 긴장돼 있거나 굳어 있는 모습이 꽤 자주 눈에 띈다. 손님 입장에서는 극도의 세련됨이 아니라 유쾌하고 정중한 태도와 설명, 상호작용에서 이뤄지는 행복한 교감이 더 중요할 텐데 말이다.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한다는 것은 당신 집에 있는 동안 행복을 책임진다고 하는 것’이라는 금언도 있지 않은가. 사실 이는 서비스 산업 자체의 난제이기도 할 것이다. 서비스업계의 교육과 시스템, 프로페셔널리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든 분식점이든 백화점 식품 코너든 일하는 환경이 기본적으로 ‘수준’을 갖추는 게 선결 과제가 아닐까? ‘식탁의 기쁨’을 곱씹게 하는 서비스에도 직원들의 행복함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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