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의 여행을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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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 2015

글 이소영(<사진 미술에 중독되다>, <서울, 그 카페 좋더라> 저자)

우리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것은 아마 여행일 것이다. 특히 아티스트에게 여행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술가의 여행은 작품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낯선 땅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아티스트의 작품을 보며, 올해 여행 스케줄을 새롭게 짜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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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진정한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야를 가지는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술가 한성필은 여행을 통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방법을 선택한다. 작가라면 오지에서 자신을 침잠시켜 극한 상황에 놓이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간 사막과 남극, 북극 등의 척박한 환경에서 삶을 다르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왔다. 최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지극의 상속>에서, 작가는 남극과 북극에서 촬영한 사진 작품을 본격적으로 선보였다. “그간 많은 나라를 방문했지만 언제나 버킷 리스트 1순위는 북극과 남극이었습니다. 대자연의 장엄함과 그 이면에 숨겨 있는 핏빛 역사 때문에 그곳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과거 인간의 필수 에너지였던 기름을 얻기 위해 고래와 물개를 도살하고, 석탄과 석유 개발로 무분별하게 발굴한 극지의 풍경에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촬영을 위한 여행을 준비했지요.” 그렇게 탄생된 작품은 우리가 극지방이라고 하면 떠올리던 빙하와 북극곰의 이미지가 아닌, 인간의 욕심이 휩쓸고 간 숭고하면서도 황량한 풍경이다.
기존 대표작 ‘파사드’ 시리즈 역시 가림막과 벽화와 같은 환상적인 트롱프뢰유(trompe-l’oeil, 눈속임 그림)를 촬영한 것이기에 세계를 여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사드’ 시리즈 초기에는 영국 유학 중이어서 인근에서 소재를 찾아다녔으나, 시리즈가 유명세를 탄 이후에는 리서치뿐 아니라 지인들이 추천해준 국내외 장소를 찾아가 직접 확인하기 위한 여행 아닌 여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촬영을 위한 여행과 여행을 위한 여행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물론 두 종류의 여행에서 모두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하지만 여행을 위한 여행을 갈 때는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여행 중 우연히 근사한 소재를 발견했을 때는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해 작품으로 만든 적도 있을 정도다. 촬영을 위한 여행을 갈 때는 일단 짐부터 엄청나다. 이번 극지방 촬영에는 갑자기 카메라가 고장 날 때를 대비해 대형 카메라 5대, 디지털카메라 3대, 삼각대 2대를 가지고 갔다. 오랫동안 꿈꾸던 극지방에서 새로운 작품을 촬영한 한성필 작가이기에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그의 새로운 여행지는 대형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5월 방문할 쿠바 아바나로 예정되어 있다. 음악이 강물처럼 흐르는 도시에서 그는 또 어떤 영감을 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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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와 히로시 스기모토의 바다

세계를 여행하는 작가라면 단연코 김수자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우뚝 선 김수자는 올해 3월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10월 프랑스 퐁피두 센터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입지를 굳건히 할 예정이다. 그녀를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올린 작품은 ‘떠도는 도시들: 보따리 트럭 2727킬로미터’와 ‘바늘 여인’이다. ‘떠도는 도시들: 보따리 트럭 2727킬로미터’는 산더미같이 쌓인 보따리 꾸러미에 앉아 유년 시절부터 살았던 전국 마을과 도시를 11일간 여행하며 만든 영상 작품이다. ‘바늘 여인’은 작가가 관객에게 등을 돌린 채 대도시 여덟 곳의 군중 사이에 서 있는 명상적 관점의 멀티 채널 비디오 설치 작품이다. 도쿄, 상하이, 멕시코시티, 런던, 델리, 뉴욕, 카이로, 라고스의 거리에서 작가는 때로는 행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가만히 서 있는다. 작가 자신이 바늘이 되어 서로 다른 장소에서의 사회적 맥락을 실에 꿰어 관통하는 것이다. 최근작은 총 6부작으로 구성된 ‘실의 궤적’인데, 제목 그대로 세계 각 지역의 바느질, 직조, 레이스 짜기와 같은 행위를 통해 삶의 궤적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았다. 페루 쿠스코의 성스러운 계곡, 마추픽추, 타킬레 섬마을에서부터 벨기에의 브뤼주, 크로아티아의 레포글라바, 파그, 스페인 알람브라 궁전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광들이 지역 고유의 색조와 건축물, 실 잣는 퍼포먼스와 연결되어 마치 직물처럼 꿰매어진다.
김수자의 작품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간의 마음과도 같은 동적인 비디오 영상 작품이라면, 히로시 스기모토는 오랜 시간을 한순간으로 함축시킨 것 같은 정적인 사진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다. 그의 대표작 ‘극장’ 시리즈는 장노출 기법을 사용해 미국의 아르데코 극장, 시네마 홀, 자동차 극장을 촬영한 작품이다. 한 편의 영화를 한 장의 사진에 담기 위해 영화 상영 시간 내내 렌즈를 노출시켜 스크린은 백색 공백이 되고,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던 극장 내부는 은은하게 밝혀진다. 사진의 숨은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 우아함에 매료당하는 아름다운 연작이다. 또 다른 대표작 ‘바다 풍경’ 역시 제주, 에게 해 등 각국의 바다를 찾아 다니며 장노출로 촬영한 아름다운 작품이다. 해변 마을에서 장기 체류까지 불사한 그의 열정을 담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태고의 바다와 같이 고요한 세계의 바다가 펼쳐지는 전시장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17점의 조각 설치 작품 ‘5원소’에도 각국의 바다 풍경이 담겨 있다. 김수자 역시 바다를 소재로 한 작품을 선보였는데, 나이지리아에서 촬영한 ‘보따리- 알파 비치’가 바로 그것이다. 노예 무역이 성행했던 알파 비치를 촬영해, 하늘과 바다의 상하 구조를 역전시켰다. 푸른 하늘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의 어색한 대비로 노예로 팔려간 원주민들이 느낀 상실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렇게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거장의 시간을 담은 작품들은 완전히 다르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선사한다는 점에서 닮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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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와 프로방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의 인상파

그렇다면 언제부터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 주목받게 되었을까? 전통적으로 신화와 종교를 소재로 한 작품은 높은 평가를 받았던 반면, 풍경화는 심오한 주제 의식이 없다는 이유로 낮게 치부되었다. 하지만 19세기 프랑스 퐁텐블로 숲의 장 프랑수아 밀레·테오도르 루소, 노르망디 해변의 클로드 모네·외젠 부댕·윌리엄 터너 등의 작가들이 태양 아래에서 받은 인상을 표현한 인상주의를 리드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특히 클로드 모네는 노르망디 항구에서 그 유명한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을 그렸는데, 바로 이 그림이 ‘인상주의’라는 단어가 탄생한 계기가 되었다. 미술가들은 아틀리에에서 벗어나 물감과 캔버스를 들고 아름다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고, 하루 종일 야외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는 전성기의 인상파 화가들이 열정을 불태운 곳이다. 앙리 마티스,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등이 노르망디에서 발생한 인상파를 계승해 많은 걸작을 남겼다. 최근 국제갤러리에서 전시를 연 이광호 작가의 ‘그림 풍경’ 시리즈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포함된 숲의 분위기를 묘사했다는 점에서 인상주의의 개념과 연계된다. 제주도 곶자왈 숲의 겨울을 소재로 한 신작들을 공개했는데, 작가는 그간 국내외 여행을 거듭하면서 수많은 풍경을 보았지만 이곳의 풍경처럼 자신을 매혹시킨 것은 없었노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4년 동안 곶자왈을 여러 번 방문하다가 나무줄기와 덩굴의 구조가 드러나는 겨울 숲을 주제로 삼게 된 것이다. 불모지의 용암 지대에 오랜 시간 낙엽이 쌓여 나무가 자라고 덩굴이 뒤엉켜 연출된 원시적 풍경은 작가에게 생명력의 상징으로 느껴졌다.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축축한 덤불 숲, 새벽녘 햇빛이 서서히 새어 들어오는 자욱함 등 날씨와 시간의 변화에 따른 작가의 느낌을 담은 곶자왈의 겨울 풍경이 아름답다.
사진처럼 섬세한 이광호 작가의 사실주의 작품은, 마치 동양화같이 정중한 구본창 작가의 ‘눈(雪)’ 시리즈와 비교할 수 있겠다. 구본창 작가 역시 제주의 겨울에 매료되어 카메라를 들었다. 올레길을 여행하던 중 대평마을 입구에서 이전부터 마음속에 그리던 수묵화 같은 풍경을 발견한 것이다. 누가 큰 붓을 휘두른 듯 검은 화산암에 흰 눈이 쌓인 역동적인 절경은 즐거운 착시 효과를 일으킨다.
반면에 서윤희 작가의 작품은 기억이 만들어낸 풍경화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작품에 여행 하나의 추억을 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기억의 파편을 재구성한다. ‘시간의 간격’ 연작은 태국, 제주, 강원도 등 방문한 장소에서 채집한 수박 껍질 가루와 홍차, 소나무 껍질, 조개 껍질, 치자 등 천연 염료들을 몇 년 동안 숙성시켜 종이 위에 인위적인 얼룩을 만들며 시작된다. 염색한 한지를 뜨거운 물에 쪄내는 번거로운 과정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엷거나 짙게 조성한 농담과 번짐 효과는 심오한 자연 풍경이 되고, 작가는 그 위에 작은 사람과 사물을 그려 넣곤 한다. “오랜 외국 생활에서의 추억과 새로운 환경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던 마음을 넓은 공간 안에 극도로 작은 인물로 묘사해 거리감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 무수한 세월을 견뎌낸 천연 염료들은 과거와 미래, 자연과 인간, 시간과 공간이라는 상징 매체로서의 자격을 갖고 있지요.” 작가의 기억으로 만들어낸 풍경이지만 ‘얼룩’이라는 상상력을 돋우는 존재를 통해 누구나 자신의 기억을 대입해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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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여행, 김영경과 정지현

진정한 여행가는 한곳에 오래 머무르기 마련이다. 아직도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곳을 점 찍으려는 여행가가 남아 있을까? 창작 문화 공간 여인숙에서 첫선을 보인 김영경의 ‘군산 3부작’ 연작은 8개월 동안 군산에서 입주 작가로 여행하며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군산을 사진과 설치 이미지로 표현했다. 1부 ‘퇴적된 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가 서린 철길을 담았고, 2부 ‘안녕, 신흥동’은 자연재해 위험 지구로 지정된 신흥동의 폐허를 멜랑콜리하게 촬영한 작품이다. 3부 ‘오래된 망각’은 과거 영화를 누리던 구시가지의 쇠락과 역사성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단기 관광객이 기억하는 군산의 근대 건축물과 적산 가옥, 일본식 사찰 동국사, 빵집 이성당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가 혼재된 도시 풍경을 담아낸 것이다.
정지현 작가는 영국 템스 강을 가장 오래 바라본 미술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2005년 작가는 레이더를 통해 템스 강을 관찰하고 이를 기록하는 업무를 맡았다. 딱 한 번 흘러가는 통나무를 배로 잘못 기록했던 실수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일은 전혀 없었다. 기록의 용도조차 정확하게 알지도 못했던 작가는 2012년에는 미술가로서 다시 템스 강을 찾았다. 매일 강가에 서서 지나간 배들의 행적과 강물을 종이 위에 연필로 기록했다. 물론 이 수행은 강물의 흐름이 연필보다 빠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작가는 순간을 붙잡으려는 행위가 필연적인 것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며, 침묵의 시간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말한다. 세상의 한쪽을 꾸준히 바라본다는 것의 가치는 얼마만큼 그 순간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중요도가 달라진다.
30년 동안 한곳을 편애한 작가도 있다. 미국 출신의 로니 혼은 30여 년 전 모터 사이클을 타고 처음 여행한 아이슬란드의 자연과 대기에 반해서 1년에 한 번은 꼭 방문해왔다. ‘유 아 더 웨더(You are the Weather)’는 아이슬란드 온천에서 만난 한 여성의 얼굴을 촬영한 시리즈인데,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는 작품.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받은 그녀이기에 앞으로도 아이슬란드는 작가의 작업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여행에서 영감을 받은 작가 몇 명의 작품을 소개했을 뿐인데, 어느새 지면은 남극에서부터 영국, 나이지리아, 페루, 벨기에, 인도, 태국에 이르기까지 데스티네이션 리스트로 빽빽해졌다. 당신을 매료시킨 작품에 영감을 준 장소부터 찾아가보는 것은 어떨까? 가장 이상적인 여행 아이디어는 우리도 그 순간만큼은 아티스트가 되어 과거와 미래를 잊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목적지에 닿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여행하는 그 순간을 즐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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