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단이 지겨워진 남자를 위한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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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 2012

글 신동헌(<레옹> 부편집장)

이제 세단을 버리자는 황당한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SUV건, 쿠페건, 왜건이건 품위 있으면서도 개성이 넘치는 자동차가 있다면 그 누구에게나 매력적이지 않을까? 단정한 수트 차림이 무난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가끔씩 피크트 라펠의 더블 재킷으로 나만의 멋과 개성을 표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처럼. 자동차야말로 당신을 드러내는 취향이자 스타일이니까.


세단만 자동차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가용’이라고 하면, 앞부분에는 기다란 보닛이 있고 승객이 타는 부분이 불쑥 튀어나왔다가 뒷부분으로 가면 다시 보닛과 같은 높이로 차체가 푹 꺼지면서 트렁크가 나타나는 ‘세단’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아이들에게 자동차를 그리라고 하면 십중팔구가 아니라 거의 100퍼센트 세단을 그린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세단을 자동차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어쩌면 여기에서 ‘우리나라는’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럼 다른 나라에서는 자동차라고 하면 트럭을 떠올리나?” 하면서 헛웃음을 터뜨리는 분이 계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자동차’라는 말에 트럭을 떠올리는 나라도 있다. 바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미국이 그런 나라다.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자동차는 포드의 F-150 픽업 트럭이다. 이 트럭은 매년 미국에서만 60만 대 가까이 팔리는데, 한 차종만으로 현대자동차 전체 차종의 미국 판매량을 파는 셈이다. 두 번째로 많이 팔리는 차는 쉐보레의 실버라도 트럭으로 약 40만 대가 팔린다. 기아차의 전 차종 연간 판매 대수와 맞먹는 수치다. 이 두 트럭이 매년 미국에서 팔리는 양은 토요타 캠리, 혼다 아코드, 닛산 알티마, 현대 쏘나타 등 우리가 흔히 ‘자동차’라고 생각하면 떠올리는 패밀리 세단 네 종류의 판매량을 합친 것보다 많다.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은 픽업 트럭이 팔리는 것일까?

미국에서 트럭은 ‘자가용’의 대명사다. 물론 농부나 자영업자가 짐을 싣거나 뭔가를 배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요도 있지만, 수트를 입고 도심의 직장으로 출근하는 화이트컬러 직장인들이 픽업 트럭을 자가용으로 사용하는 예가 훨씬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국 드라마 <CSI 뉴욕>에서 맥 반장은 흰 셔츠에 넥타이 차림으로 쉐보레 아발란쉬 픽업 트럭을 운전하고, 한국계 미식축구 선수인 하인즈 워드는 슈퍼볼 MVP로 뽑혔을 때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EXT 픽업 트럭을 부상으로 받았다. 미국에서 트럭은 농부나 자영업자만을 위한 차가 아니라 영화배우나 뮤지션, 연봉 수백만달러의 뉴요커들까지 사랑하는 자동차다. 그 이유는 빈 화물칸이 가져다주는 ‘가능성’ 때문이다. 지붕을 고치거나 애견에게 새 집을 만들어주기 위한 도구와 목재를 실을 수도 있고, 오프로드용 모터사이클이나 제트스키를 실을 수도 있으며, 몇 달 치 캠핑용품을 싣고 훌쩍 여행을 떠날 수도 있는 다양한 가능성. 게다가 거대한 픽업 트럭이라면 오토 캠핑용 트레일러나 요트를 끌고 다닐 수도 있다. 꼭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 내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자를 매료시키는 것이다. 신대륙이 발견된 이래 개척자들이 일군 미국은 누구나 모험과 도전을 꿈꾸며 살아가고, 그런 그들에게 세단은 생활의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나는 탈것이다. 연비도 중요하고 승차감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게 낭만과 꿈이다.

미국의 남자 고등학생들은 면허를 따면 픽업 트럭을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도 흔하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일제 소형차를 타면 ‘면허를 갓 딴 어린아이’ 취급을 받지만, 픽업 트럭을 운전하면 비로소 한 사람 몫을 하는 남자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이 같은 예는 사실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자가용이라고 하면 작은 경차를 주로 떠올린다. 일본의 경차 규격은 우리나라보다 더 작고, 배기량도 660cc로 더 적다. 일본의 좁은 도로와 우리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린 차량 흐름 속도에서는 그 정도로도 전혀 지장이 없다. 유럽에서는 그보다 조금 큰 1.6~2L급의 해치백을 자동차의 대명사로 여긴다. 해치백이 아니면 왜건 형태의 차를 즐겨 타기 때문에 뒷좌석에서 트렁크로 이어지는 부분이 경사지며 내려오는 세단 형태 뒷모습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해치백이나 왜건은 뒷문이 위로 열리는 것이 특징인데, 트렁크와 승차 공간이 뻥 뚫려 있어 긴 사다리나 냉장고처럼 부피가 큰 짐도 실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일본과 유럽 사람들이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이유도 미국 사람들이 픽업 트럭을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좀 더 실용적인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주말 여행을 가거나, 이사를 갈 때도 짐을 싣고 내리기 편하며, 뒤 유리창이 차체 끝에 있기 때문에 좁은 도로에서 주차할 때 뒤쪽 상황을 좀 더 수월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차들이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다.

세단 이외의 자동차들

물론 “이제 세단을 버리고 픽업 트럭을 탑시다!” 하는 황당한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자동차=세단’이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기 위한 준비운동으로 다른 나라의 예를 들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일반인이 개인적으로 이용하는 ‘자가용’으로서 받아들여져온 차종은 세단과 SUV뿐이었다. 그렇다면 대안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문이 2개인 쿠페는 스타일리시한 외관과 경쾌한 달리기 성능으로 스포츠카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차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문이 2개여서 불편하다’는 너무나도 단순한 이유로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다. 쿠페는 원래는 문이 2개이기 때문에 멋진 차다. 30평대 아파트에 4인 가족이 살면 평범해 보이지만, 혼자 살면 뭔가 여유로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거대한 차에 커다란 문을 2개만 달아놓고 혼자, 혹은 가끔 여자 친구와 함께 타기 위해 사용하는 건 자동차라는 물건이 발명된 이래로 주욱 귀족들의 특권이자 남자들의 로망이었다. 1백 년 전, 자동차가 아직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었을 때는 ‘쿠페=자동차’였다. 뒷좌석 전용차만 만들 것 같은 롤스로이스나 벤틀리 같은 대형 고급차 메이커들이 다양한 쿠페 모델을 선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품위를 중요시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노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세컨드 카를 구입하는 사람들도 꺼리는 일이 많다. 그리고 뒷좌석에 타려면 앞좌석을 접은 후 몸을 숙이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불편해하는 사람도 많다. 쿠페의 멋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도 매번 뒷자리에 사람을 태울 때마다 “차값이 얼만데 문이 2개뿐이야” 하는 질문에 “원래는 쿠페야말로 귀족들에게 사랑받던 차고, 혼자 타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하는 식의 설명을 하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이다.

그다음은 왜건. 원래는 SUV가 인기를 끌기 전 미국의 사커맘 사이에서 각광을 받던 차다. 유럽에서는 지금도 그 실용성과 낭만적인 요소 때문에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영구차 같다면서 꺼리는 사람이 많다. 세단보다 구조적으로 더 비쌀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몇백만원을 더 주고 “짐차 샀느냐”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슷한 형태라면 차체가 더 커 보이고, 비포장도로에서도 부담이 적은 SUV를 사는 게 낫지 않느냐는 사람이 많다. 외국에서의 경험 때문에 왜건에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몇백만원 더 비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일이 많다. 1998년 기아에서 나왔던 크레도스의 왜건형 모델 ‘파크타운’은 국산차인데도 우리나라에서 8백 대도 안 팔렸다. 이후 폭스바겐이 왜건 시장 개척을 꾀하다가 포기했고, 지금은 현대가 유럽 전략 모델인 i40를 출시하고, 볼보와 BMW가 왜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라이프스타일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긴 하지만, 왜건 열풍이 부는 날이 올 것 같지는 않다.

세단 왕국, 대한민국에서의 대안

그러나 자동차로 개성을 표출할 방법이라곤 전혀 없이 천편일률적으로 세단을 타는 우리나라 문화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도 사실은 꽤 많았다. 튀는 것보다는 무난하게 섞여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상 조용조용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 지나치게 튀지 않으면서도 개성이 넘치고, 딱딱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품위 있어 보이는 차를 만들어준다면 당장이라도 구입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많이 있었다. 그게 증명된 ‘사건’이 바로 BMW가 2010년 출시한 변종 모델 ‘그란투리스모’의 대성공이다. 그란투리스모(Gran Turismo)란 ‘장거리를 빠르고 쾌적하게 달릴 수 있는 대배기량 스포츠카’를 뜻하는 말이다. 철도가 발달하기 이전인 17~18세기에 유럽의 귀족들이 자제들의 시야를 넓혀주기 위해 보내주는 유럽 일주 여행 ‘그란 투리스모’에서 따온 이름인데, 당시에는 자동차는 물론이고 철도도 없던 시절이다 보니 빠르고 쾌적하게 이동할 수 있는 품질 좋은 마차와 건강하고 지구력 좋은 말 여러 마리가 필요했다. 말 몇 마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유럽을 얼마나 빨리 돌았는지가 귀족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경쟁이 붙으면서 지금껏 ‘고성능 스포츠카’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BMW의 그란투리스모는 겉보기에는 전혀 스포츠카답지 않다. 뚱뚱하고 거대한 것이 첫인상은 날렵한 말보다는 뚱뚱한 돼지에 가깝다. 그러다 이 차의 진가는 타보면 비로소 느낄 수 있다. 세단과 SUV의 중간 높이인 차체는 오르내리기 편하고 승차감이 단연 뛰어나다(이 차의 뒷자리는 퍼스트 클래스를 연상케 한다). 왜건처럼 처리한 뒤태 덕분에 많은 짐을 편하게 실을 수 있지만, 지붕 라인은 쿠페의 그것을 따와서 매우 스타일리시하다. 뜯어보면 뚱뚱하면서도 섹시한 것이 마치 글래머 미녀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세단과 SUV, 쿠페와 왜건을 합친다는 발칙한 시도는 유럽과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대성공을 거뒀고, 특이한 차종임에도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차가 됐다. 세단이 편하고 좋지만, 좀 더 개성적인 차를 원하는 마음도 버릴 수 없는 욕심쟁이들을 위한 차는 이후에 엄청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편리하고 안락한 세단과 날렵하고 스타일리시한 쿠페의 장점만을 결합한 쿠페형 세단은 지금 유행의 중심에 있다. 우선 처음으로 세단과 쿠페의 융합을 시도했던 메르세데스-벤츠의 CLS 클래스는 지난해 모델 체인지를 거쳐 2세대 모델로 태어났다. 첫 번째 세대는 세단을 쿠페처럼 날렵하게 다듬는 데에만 치중한 나머지 도어와 유리창 면적이 작아 실내가 어둡고 좁게 느껴지는 등의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2세대는 비례가 좀 더 좋아져서 남성적인 쿠페의 매력과 4개의 도어가 가져다주는 편리함이 잘 융합됐다. E클래스가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느껴지지만 메르세데스-벤츠의 삼각별을 포기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대안이다.

아우디는 디자인의 선두 주자답게 1970년대의 직선적인 패스트백(현대 포니처럼 뒷부분이 쐐기꼴로 떨어지는 스타일)을 새롭게 재해석한 디자인을 A7에서 선보이면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A7은 세단과 쿠페의 이미지를 동시에 풍기면서 실루엣은 마치 클래식한 패스트백처럼 쐐기꼴로 처리해 유례없는 독특한 멋을 풍긴다. 콰트로 시스템의 안정적인 주행 감각과 세련된 인테리어가 어우러지면서 패셔니스타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란투리스모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연 BMW는 좀 더 날렵한 스타일의 쿠페형 세단인 6 시리즈 그란쿠페로 굳히기에 나섰다. 이 차의 흐르는 듯한 스타일링은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개인적인 취향 차이야 있겠지만, 문 4개 달린 차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루엣을 자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쿠페처럼 윈도 프레임이 없기 때문에 문을 열고 내릴 때는 매우 우아해 보이며, 나지막한 차체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스포츠 쿠페다. 우리는 옷을 고를 때도 유행에 따르면서도 개성을 표출하길 원한다. 스타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작은 액세서리나 다양한 옷을 조화롭게 입는 노하우가 커다란 차이를 낳는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단정하게 떨어지는 수트 차림으로도 무난한 평가를 받을 수는 있지만, 피크트 라펠 더블 재킷을 멋지게 소화하면 품격과 센스를 동시에 표출하면서 감각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세단이 감색 수트라면, 쿠페형 세단은 피크트 라펠의 더블 재킷이다. 턱시도도 아니니 한 번쯤 시도해봐도 좋지 않을까?

세단이 지겨워진 남자를 위한 자동차”에 대한 1개의 생각

  1. 한국의 경우는 세단에 적응이 된상태이고 그게 무난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지요. 쿠페는 아직은 선택의 폭이 좁고 대중화가 덜 되어서 그런지 가격부분에서 참 선택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래도 A7은 가장 갖고 싶은 차 중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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