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그려지는 한국의 문화 예술 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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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1, 2026

글 양혜연(객원 에디터)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스페인의 쇠락한 공업도시였던 빌바오는 ‘구겐하임 미술관 빌바오’를 품에 안으며 문화 예술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다. 나오시마, 데시마, 이누지마를 포함한 일본 세토우치 3도는 ‘베네세 아트 사이트 나오시마’ 프로젝트를 필두로 현대미술의 성지로 거듭났다. 현재는 불안정한 세계 정세로 주춤하는 모양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동에서는 세계적인 미술관과 아트 페어 유치를 앞세워 이 지역의 ‘미술 허브’ 자리를 두고 각축전을 펼쳐왔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부다비는 2017년 문을 연 ‘루브르 아부다비’와 더불어 개관을 목전에 둔 ‘구겐하임 아부다비’를 전면에 부각시켰고, 카타르 수도 도하는 ‘카타르 국립박물관’과 ‘이슬람 예술박물관’ 등을 중심으로 문화적 존재감을 확장해왔다. 올해 2월 도하에서는 세계적인 아트 페어 브랜드를 내세운 ‘아트 바젤 카타르’가 성공리에 개최되었다. 당초 예정된 11월 개막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아부다비에서 ‘프리즈 아부다비’가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전략적으로 설계된 미술관과 아트 플랫폼은 도시의 흐름에 스며들어 문화적 거점 역할을 하며, 지역의 정체성을 조용히 빚어내는 장이 된다. 빠르게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아시아 문화 예술의 중심으로 부상한 서울과 한국 역시 위상을 더욱 견고히 하며 문화 예술 지형을 새롭게 재편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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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스며드는 예술,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이하 서서울미술관)’의 개관 기자 간담회 일정을 안내받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드디어 금천구에 공립 미술관이 개관하는구나’였다. 사실 서서울미술관 건립 논의는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다.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한 이후 금천구는 독자적인 문화 공간 조성을 꾸준히 바라왔고, 2015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미술관 사업을 추진했다. 2022년 착공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지만, 서울 중심부에서 벗어난 금천구에 미술관이 들어선다는 사실은 여전히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 사이 대다수 기자들은 이 소식을 기억 저편에 미뤄둔 채, 미술관과 갤러리가 밀집한 삼청동·한남동·청담동 일대를 주로 드나들며 취재를 이어왔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에도 서서울미술관은 차근히 형태를 갖춰갔고, 마침내 지난 3월 12일, 문을 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이하 SeMA)의 일곱 번째 분관인 서서울미술관은 서남권 첫 공립 미술관이자 서울시 최초의 공공 뉴미디어 특화 미술관이다. 건축은 코스모스 울릉도로 유명한 더_시스템 랩의 김찬중 건축가가 맡았다. 고층 아파트가 밀집한 주변 분위기와 달리, 주차장을 포함해 지하 2층과 지상 1층, 옥상으로 이루어진 연면적 7,186㎡(2천1백73평) 규모의 저층형으로 설계해 보는 이의 숨통을 틔워준다. 문화 소외 계층도 편히 오갈 수 있게 하겠다는 미술관의 지향점을 반영하고자 금나래중앙공원의 중심 보행로를 따라 개방형으로 건물을 배치해 접근성을 높인 점도 눈에 띈다.


개관 특별전으로는 SeMA 퍼포먼스 <호흡>, 건립 기록전 <우리의 시간은 여기서부터>가 진행 중이며 오는 5월 중에는 뉴미디어 소장품전 <서서울의 투명한 |청소년| 기계>를 개최할 예정이다. <호흡>은 총 27명(팀)의 작가가 참여해 ‘호흡’을 주제로 신체와 사회, 예술의 교차점을 탐구하는 퍼포먼스 작품을 선보인다. 김태동, 무진형제, 브이엔알, 신지선, 컨템포로컬이 참여한 <우리의 시간은 여기서부터>는 사진, 설치, 증강현실을 포함한 뉴미디어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미술관 건립 과정과 서남권 지역(민)에 새겨진 시간의 서사를 조명한다. 작품은 전시장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배움 공간, 로비, 잔디마당 등 미술관 곳곳에 포진해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을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한편 잔디마당에서는 미술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SeMA 프로젝트V의 첫 번째 결과물인 얄루 작가의 비디오 설치 작품 ‘신인호 랜딩’을 만날 수 있다. 팔각형으로 배열된 LED 패널에서 86세 K-팝 아이돌이자 (작가의 외할머니이며) 데이터 뱅크를 침략하는 ‘할머니 해적’ 신인호가 서서울의 시공간적 데이터 위에 착륙하며 생성하는 다성적 오페라 작품이다.


이제 막 문을 연 서서울미술관이 국내 미술계에서 어떤 위상을 갖게 될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다만 현재의 모습을 보면, 뉴미디어에 중심축을 두고 새로운 매체와 언어를 실험하려는 의지, 그리고 개관 특별전에서 퍼포먼스 아트를 전면에 내세워 다양성을 꾀한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일단 지역 주민들의 반응은 고무적이다. 기자 간담회 당일 오전, 대중에게 개방되기 전이었음에도 유모차를 끌고 공원길을 따라 주변을 산책하는 이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미술관 인근을 서성이는 어르신들이 눈에 띄었다. ‘신인호 랜딩’을 감상하는 동안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는데, 이는 잔디마당과 마주한 초등학교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펜스나 경계 없이 열린 미술관은 이처럼 일상 속 풍경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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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활성화를 도모하는 효과적인 방법, 신안 1섬 1뮤지엄 사업과 두손갤러리
서서울미술관이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역할을 한다면, 전남 신안에서 진행 중인 ‘1섬 1뮤지엄’ 사업은 ‘빌바오 효과’, ‘나오시마의 기적’을 기대해볼 수 있는 사례다. 1천 개 이상의 섬으로 이루어진 신안은 섬마다 대표 박물관과 미술관, 문화 시설 등을 조성하는 1섬 1뮤지엄 사업을 진행 중이다. 총 30개 소 오픈을 목표로 20개 소는 조성을 완료했고, 7개 소는 형성 중, 3개 소는 조성 추진 예정이다. 그중에는 올라푸르 엘리아손, 안토니 곰리, 마리오 보타 등 세계적인 크리에이터들과의 협업으로 선보이는 미술관과 설치 작품 등이 포함된다. 글로벌 작가의 참여 소식에 쏠린 대중의 관심에 가장 먼저 화답한 것은 2024년 말 공개된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숨결의 지구(Breathing earth sphere)’였다. 6년에 걸쳐 도초도에 조성된 이 작품은 과거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도초도의 독특한 지형에서 영감받아 자연의 생명력과 에너지를 시각화한 작품이다. 벽, 천장, 바닥이 존재하지 않도록 구형의 공간으로 조성한 작품 안에 들어서면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하고 있음을 감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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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2026년 하반기 준공 예정인 ‘플로팅 뮤지엄’과 ‘인피니또 뮤지엄’에 대한 관심도 꾸준하다. ‘이누지마 아트 프로젝트’를 이끈 야나기 유키노리가 참여한 플로팅 뮤지엄은 김환기 화백의 고향인 안좌도에 조성 중이다. 신촌저수지 위에 7개의 큐브 건물이 떠 있는 수상 미술관 형태로 1섬 1뮤지엄 사업 중 가장 혁신적 시도로 평가받는다. 거울처럼 안좌도의 하늘과 저수지의 물결을 반사해 주변 풍경과 함께 숨 쉬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물 외벽이 인상적이다. 총 7개 동 중 4개 동은 야나기 유키노리의 상설 전시로 채워질 예정이며, 나머지 3개 동은 기획 전시와 영상 기록실, 운영을 위한 기능적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조각가 박은선과 리움미술관을 설계한 것으로 잘 알려진 건축가 마리오 보타와의 협업으로 탄생하는 인피니또 뮤지엄은 자은도에 들어선다. 이름처럼 무한(infinite)이라는 주제 아래 자연과 예술이 경계 없이 영원히 이어지는 공간으로 꾸려지게 된다. 미술관은 아니지만 침체된 지역을 활성화한다는 맥락에서 ‘두손갤러리’의 행보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 2월 말 두손갤러리는 답십리 고미술 상가로 이전 개관했다. 답십리 고미술 상가는 어지간한 미술 애호가들에게 미지의 영역인 터라 이 같은 결정은 많은 이들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그러나 1969년 김양수 대표에 의해 황학동과 충무로에서 고미술상으로 출발한 두손갤러리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두손갤러리는 이전 개관 행사로 고미술과 앤티크, 공연과 야간 개장을 결합한 행사 ‘케데헌의 고향 – 답십리 엔틱 야시장’을 이틀간 진행했는데, 당시 취지문에서 ‘답십리 고미술 상가를 대한민국 전통문화의 중심 상권으로 재정의하고, 나아가 세계가 찾는 전통문화의 거리로 도약시키고자 그 의의를 공표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전 개관 후 첫 공식 전시로는 미켈레 데 루키 개인전 을 선보이고 있다(4월 30일까지).
필자 역시 낯선 고미술 상가를 헤매다 도착한 두손갤러리의 새 공간에 전시 작품과 갤러리 소장 고미술품이 조화롭게 진열된 모습을 보며, 고미술품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이 한층 허물어지는 경험을 했다. 게다가 지난해 초부터 답십리 고미술 상가에는 소품 상점 ‘고복희’, 젊은 감각의 고미술품 큐레이션 상점 ‘오브(of)’, ‘호박포크아트갤러리’ 등이 입점하며 조금씩 주목받고 있는 터. 모두의 행보가 모여 내는 시너지 효과로 답십리 고미술 상가가 어쩌면 ‘제2의 을지로’, ‘제2의 성수’로 거듭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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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주는 존재감, 퐁피두센터 한화와 박서보미술관
서서울미술관 개관 이후, 가장 빠른 시일 내에 문을 열 예정인 미술관으로는 ‘퐁피두센터 한화’와 연희동 ‘박서보미술관’이 있다. 여의도 63빌딩 내 약 3,000㎡(약 9백 평) 규모로 들어서는 프랑스 퐁피두센터의 분관인 퐁피두센터 한화는 6월 오픈을 목표로 현재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다. 개관전으로는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등을 필두로 20세기 입체주의를 훑어보는 전시가 준비됐다. 퐁피두센터 소장품의 걸작을 중심으로 연대기와 주제에 따라 8개의 섹션으로 나눠 보여줄 예정이다.


박서보 화백이 살아생전 머무르며 작업실과 전시실로 운영하던 연희동 기지 건물 옆에 조성 중인 박서보미술관은 오는 8월 중순 이후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4개 층, 5개 주요 전시 공간으로 구성할 계획이라고. 9월 초 ‘프리즈 서울’ 직전에 전모를 드러낼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페어 기간 한국을 방문할 예정인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까지 한 몸에 받고 있다.


사실 ‘이름’의 힘이 강력한 문화 공간 오픈 소식은 늘 큰 기대를 모으는 동시에, 방식과 규모,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도 함께 불러온다. 정확한 평가는 베일이 걷히고 나서야 가능하겠지만,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긍정적 효과는 ‘예술과 거리를 두던 이들까지도 시간을 내 찾아가게 만든다’는 점이다. 미술관은 예술 애호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며, 예술과 무관했던 삶에 작은 균열을 만드는 것 또한 그 역할의 일부다. 그런 점에서 대중의 발걸음을 이끌어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 공간의 존재 이유는 어느 정도 확보된다. 또 이는 곧 이제 막 윤곽을 드러내며 각자의 방식으로 국내 문화 예술 지형을 다시 그리고 있는 이 공간들에 우려보다 설렘이 앞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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