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게 일렁이는 변화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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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03, 2024

글 김연우(뉴욕 통신원)

2024 TEFAF 뉴욕 & 휘트니 비엔날레

연초록 잎사귀와 피어나는 꽃송이가 서서히 도시를 물들이는 계절이 오면 ‘봄은 마치 손길 같다(Spring is like a perhaps hand)’던 미국의 화가이자 시인 E. E. 커밍스(E. E. Cummings, 1894~1962)가 떠오른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봄은 어딘가에서 나와 여기저기에 낯선 것과 익숙한 것을 놓고, 이리저리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을 움직이며,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변화시킨다. 미술계의 관점에서 올해 뉴욕의 봄은 좀 더 역동적이었다. 지난 3월 막을 올린 휘트니 비엔날레가 일찍이 계절의 시작을 알렸고(오는 8월 11일까지), 5월 들어서는 프리즈(Frieze)를 필두로 1-54, 나다 등 여러 아트 페어가 하루 이틀 간격으로 문을 열었으며, 차주에는 인디펜던트와 TEFAF가 바통을 넘겨받아 열기를 이어갔다. 이 기간을 놓칠세라 옥션하우스에서는 메이저 경매를, 미술관과 갤러리에서는 주요 전시를 선보이며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미술계 종사자들과 애호가들을 분주히 맞이했다. 세계 미술의 중심지에서 이렇듯 동시에 열리는 행사를 둘러보는 일은 늘 설렌다. 시장이 밀고 있는 트렌드와 컬렉터들의 취향부터 동시대 작가와 기획자의 관심사가 작품, 전시로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기에 이만한 기회의 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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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인 아트 페어의 진화 제10회 TEFAF 뉴욕(5. 9~14)
1백5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맨해튼의 랜드마크인 파크 애비뉴 아모리 건물과 페어장 가득 봄을 채우는 화려한 생화 장식, 샴페인과 생굴을 즐길 수 있는 오이스터 바까지. 낯설 만큼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TEFAF(The European Fine Art Foundation, 이하 테파프)의 첫인상을 짧고 굵게 표현하자면 ‘클래식의 전형’이 아닐까 싶다. 미술사 수업 시간의 슬라이드에서 봤음직한 고대 이집트 조각상 같은 고미술품부터 동시대에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의 작업까지 한눈에 둘러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리는 ‘패션계 슈퍼볼’이라 불리는 멧 갈라(Met Gala)에서 클로에 세비니가 착용해 화제가 된 아나 코우리(Ana Khouri)의 다이아몬드 골드 목걸이, 미드센추리 건축가 장 푸르베(Jean Prouve′)의 빈티지 가구도 모두 예술의 맥락에 놓인다. 그야말로 장르를 초월하는 ‘미의 역사’가 담기는 장이다. 테파프는 이처럼 7천 년 미술사를 대표하는 아트 페어로 자부심을 갖고 ‘예술을 판매할 뿐 아니라, 미래를 위해 이를 보존하는’ 데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다. 주체적으로 미술관 소장품의 보존·복원을 지원하는 미술관 펀드나 미술품 복원 전문 인턴십 등의 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며, 페어 기간에는 문화유산의 보존과 미술품 복원을 주제로 한 심도 있는 토크를 선보인다.
원래 테파프 뉴욕은 현대·동시대 미술과 고미술로 구분된 두 번의 페어를 봄과 가을에 별도로 개최했지만, 팬데믹 이후 이를 통합한 연 1회의 페어로 변경되었다. 본진인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Maastricht)와 뉴욕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점차 기존의 전통을 벗어나 현대·동시대 미술로 확장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올해는 같은 시기에 열린 다른 아트 페어들에 비해 여성 작가의 작품이 주를 이뤘다는 평가가 나왔는데, 그 중심에는 그동안 미국 미술사에서 저평가되어온 조앤 스나이더(Joan Snyder)나 레베카 살스버리 제임스(Rebecca Salsbury James)를 재조명한 타데우스 로팍과 살롱 94, 그리고 여성 작가들로 3인전을 꾸린 스프루스 마거스 등의 갤러리들이 있다. 아예 여성 작가의 작업으로만 구성된 살롱 스타일 초상화 전시 를 마련한 갤러리 블럼(Blum)의 전시도 눈길을 끌었다. 테파프 뉴욕의 디렉터 리앤 자그티아니(Leanne Jagtiani)는 “올해 딜러들의 작품 선정은 미술 시장에서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 뛰어난 여성 작가들의 존재감을 시사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최근 몇 년간 발간된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까지 10년간의 경매 기록에서 여성 작가의 작품 비중은 단 6%에 불과했으며(2023년 아트시(Artsy) 자료), 아트 페어에서의 판매 비율도 고작 2%에 불과했다(2019년 아트넷(Artnet) 자료). 이러한 미술 시장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여성 작가들을 주목하고 이들의 작품 판매를 강조하는 테파프의 행보는 고무적인 한 걸음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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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고민을 비추는 창 제81회 휘트니 비엔날레 (2024.3.20~8.11)
올해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는 ‘실제보다 더 나은(Even Better Than the Real Thing)’이라는 부제에서부터 현재 직면한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제시하는 비엔날레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공동 큐레이터 크리시 아일스(Chrissie Iles)와 메그 온리(Meg Onli)는 “‘현존’에 대한 개념을 고민하며 과거를 돌아보고, 변곡점에 놓인 이 시대와 공간의 변화를 탐색하고자 했다”라며, 특히 많은 작가들이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고찰하고, 이를 통해 ‘불안정성’에 대처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고 밝혔다. 사실 지난 몇 년간의 미국 사회 양상을 돌아보면 그리 놀랍지 않다. 전국적으로 반(反) 성 소수자 법안이 급증하고, 임신중절을 헌법상의 권리로 보장했던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1973)’ 판례가 대법원에서 전복되는 등 신체의 자율성이 정치와 권력에 의해 위협받고 있으며, 사회적 약자인 유색인종, 원주민, 이민자, 성 소수자 등에 대한 배려도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올해 휘트니 비엔날레 참여 작가들은 이러한 현실에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다채로운 작업을 선보였다. 카르멘 위넌트(Carmen Winant)는 미국 내 임신중절 클리닉과 병원 관계자들의 평범한 일상을 담은 2천7백 장의 사진으로 전시장 벽 하나를 가득 채웠다. 이들의 집단 초상은 종종 피 흘리는 산모나 태아로 묘사되는 ‘임신중절’에 대한 기존 이미지를 대신할 새로운 시각언어를 제안한다. 토크웨이스 다이슨(Torkwase Dyson)은 테라스에 설치된 장소 특정적 작업은 관람객들이 직접 작품을 만지고 앉아볼 수 있는 촉각적인 경험을 선사하며 ‘해방은 모든 단계의 움직임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작가의 신념을 은유적으로 내비쳤다.
휘트니 비엔날레는 올해 처음으로 참가자들의 인칭대명사를 공개 프로필로 제공했는데, 작가군이 대체로 더 젊고, 국제적이며, 다양해진 경향을 보였다. 비록 초유의 일은 아니더라도(휘트니 비엔날레에서는 2010년 최초로 여성작가의 참여 비중이 근소하게 더 컸고,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는 참여 작가의 대부분을 유색인종 여성 작가로 선정했던 바 있다) 전체 71명의 작가/팀에서 절반 이상이 여성이며, 1981~1996년 출생의 이른바 MZ 작가 비중이 전체의 60%를 차지했다는 점은 단연 주목할 만하다. 직전 비엔날레에서 오히려 중견 작가를 대거 소개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풍경이기도 하다. 지역 스펙트럼 역시 더 넓어졌다. 본래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미션 아래 시작된 휘트니 비엔날레는 점차 ‘미국에서 태어난 작가’에서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로 ‘미국 미술’의 범위를 확장해왔다. 올해 미국 태생의 작가는 53%에 불과하다. 영상 작업의 비중을 늘리고 미술관 밖으로 필름 프로그램을 확장한 것 또한 흥미로운 시도다. 이를 위해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5명의 필름 큐레이터를 이례적으로 추가했으며, 스트리밍 플랫폼 MUBI와 제휴해 영상 작업 8편을 온라인에서 상시 상영하도록 했다.야외 작품을 관람하러 테라스로 나가자 겨우내 차갑고 시렸던 강바람은 온데간데없고, 부드러운 온기만이 얼굴을 어루만졌다. 다시 한번 계절이 바뀌고 봄이 왔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겨울이 아무리 길게 느껴지더라도 결국 변화의 시간은 온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개인적으로 올해 비엔날레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전시 기간 동안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태가 변하는 설치 작업이었다. 호박으로 제작해 중력과 온도에 의해 점차 녹아내리는 조각, 주변의 빛에 노출됨에 따라 색이 바래는 천장에 매달린 필름지, 무너져가는 검은 흙덩어리로 만든 백악관 파사드까지. 소재의 유동성을 내세운 이들 작품은 마치 현실을 비추며 끊임없이 진화해나가는 비엔날레의 속성을, 나아가 예술의 본성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은 관람객들에게 묻는 것만 같다. ‘실제보다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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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


01. Intro ECOSOPHIA  보러 가기
02. Front Story  미래를 달리는 현실적 몽상가, 노먼 포스터 보러 가기
03. ‘Do more with less’를 위한 여정   Interview with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 보러 가기
04. 자연에 오롯이 기대어 생각에 잠기다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의 미 보러 가기
05. 백색의 3중주  아그네스 마틴, 정상화, 리처드 마이어 보러 가기
06. 예술로 동시대와 공명하는 법  Interview with 캐롤 허(Carol Huh) 큐레이터(스미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 보러 가기
07. 부드럽게 일렁이는 변화의 바람  2024 TEFAF 뉴욕 & 휘트니 비엔날레 보러 가기
08. 영화 속 예술, 예술 속 사유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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