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노을(紫霞) 품은 동네의 남다른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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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03, 2021

글 고성연 | 자료 제공 가나문화재단, 자문밖문화포럼, 종로구청

자문밖 미술관 프로젝트_가나아트센터에서 Part II 전시도 열려…(2021.03.05 ~ 03.28)


요즘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는 ‘동네 아티스트(?)’들을 그러모아 소개하는 의미심장한 현대미술 전시가 열리고 있다. 여기서 ‘동네’라 함은 ‘자문밖’ 일대를 말한다. 종로구에 속한 부암동·신영동·구기동·평창동·홍지동을 한데 묶어 부르는 명칭이다. 원래는 한양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의 별칭이 자하문(紫霞門)이어서 ‘자하문 밖’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사람들이 이 일대를 점차 ‘자문밖’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자문밖 동네와의 인연을 공통 분모로 하는 가나아트센터 전시 작가 명단을 훑어보노라면 눈썹을 절로 치켜올리게 된다.
박서보, 김창열, 유영국, 김구림 등 거장들을 위시해 미술계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작가들이 포진되어 있어서다. 이 일대에 문화·예술 자산이 풍부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동네의 위용이 새삼 달리 느껴진다. 자문밖의 풍부한 인적·물적 자산을 바탕으로 진정한 ‘아트 밸리’를 조성하고자 나선 당찬 행보에도 눈길이 간다.
이름하여 ‘자문밖 미술관 프로젝트’! 전시명이기도 한 이 프로젝트는 자문밖 사람들과 비영리재단, 그리고 종로구청이 함께하는 민관(民官) 협업형이라 더욱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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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모든 이에게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는 도시가 모든 이의 참여로 창조되었을 때만 발현된다.”_제인 제이컵스(Jane Jaco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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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만 가까운 인구를 거느린 서울 같은 ‘메가 시티’는 늘 난제가 들끓는 애증의 대상이다. 아마도 그 주된 이유는 대다수가 도시를 열망하기 때문일 터. 갖은 푸념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꿈을 위해, 필요에 의해 꾸역꾸역 도시로 모여든다. 20세기 초에는 세계 인구의 10분의 1가량이 도시에서 살던 데에 비해 오늘날엔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할 정도의 고밀도화가 전개되는 상황인데, 이 같은 ‘도시화’ 현상은 갈수록 심해질 전망이다. 도시경제학 권위자 에드워드 글레이저(Edward Glaeser)가 집필한 스테디셀러의 제목처럼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라 일컬어지는 ‘도시의 승리’는 불가피한 셈이다. 그런데 도시는 승리할지 모르지만, 도시민들은 거센 도시화, 산업화, 기능화의 물결에 휩싸여 지나칠 정도로 자주 실패를 맛본다는 그의 부연 설명이야말로 엄연한 우리네 현실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개발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를 삼키며 씁쓸히 살아간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너도 나도 도시를 훌쩍 떠나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문화, 예술, 창의적인 기술에 투자해 다양한 구성원들이 어우러져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창조 도시론’이 부단히 거론되고, ‘소프트 시티’ 같은 다분히 인간 친화적 도시 재생이 키워드로 부각되는 것일 테고 말이다. 더구나 온 지구에 피멍이 들 정도로 강타를 날린 팬데믹을 계기로 우리 대다수가 주거지와 가까운 동선에서 일상을 보내면서 ‘우리 동네’, ‘나의 집’은 한층 소중하고 애틋한 삶의 터전으로 여겨지게 되지 않았는가.


‘도시의 승리’가 드리운 그림자를 극복한다
이제 문화·예술을 매개체로 도시 재생을 꾀하는 시도는 지겹게 느껴질 정도로 흔하다. 그런데 사실 여러모로 박자가 골고루 맞춰진, ‘지속 가능한’ 전범이 될 만한 사례가 많지는 않다. 수요층이 얇은 데도 그저 낙후된 곳에 자본을 밀어 넣어 억지로 끌어 올리려다 활력 없는 인프라만 남기고 예산을 낭비한다든지, ‘개발’이란 명목으로 지역이나 동네를 지나치게 ‘소비’함으로써 정작 거주민들에게 피로감과 짜증을 안겨준다든지, 아니면 효율적으로 ‘기획’은 했지만 뭔가 급조되고 획일화된 모습이라 별 재미는 없다든지 하는 식으로, ’도대체 누구를 위한 변화’인지 모를 회의감을 빚어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물론 도시는 점진적으로 형성되고, 변화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유기체 같은 존재이긴 하다. 그러나 다각적으로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는 데도 ‘밀어붙이는’ 방식에는 늘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출간된 지 무려 반 세기가 지났지만 도시계획·재개발 분야에서 여전히 뜨거운 고전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1961)을 남긴 제인 제이컵스가 강조했듯이 자생적인 발전 가능성이 무시된 계획은 반도시적이고, 반인간적인 헛수고이자 낭비로 끝날 수 있다. ‘자문밖 미술관 프로젝트’나 ‘자문밖 문화축제’ 등을 중심으로 한 ‘아트 밸리’ 만들기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자못 기대감이 드는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우선, 자문밖 일대는 이미 자생적으로 빚어진 풍요로운 예술 자원을 품고 있다. 이 동네에서 거주하거나 활동하는 미술인, 문학인, 음악인, 출판인 등 문화·예술계 인사가 200명을 훌쩍 넘는다 하니 가히 ‘예술인 마을’이라 할 만하다. 또 크고 작은 미술관이나 문학관, 갤러리, 공방 등 다채로운 문화·예술 시설도 100여 개나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예를 들자면 가나아트센터, 김종영미술관, 서울미술관, 삼성출판박물관, 영인문학관, 토탈미술관, 환기미술관 등이 터를 잡고 있고 서울예고, 국민대, 상명대 등의 교육기관도 함께 자리한다. ‘신선이 사는 곳에 서리는 보랏빛 노을’을 뜻하는 자하(紫霞)라는 아름다운 이름에 잘 어울리듯, 이 동네는 도심에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지만 북한산, 북악산, 인왕산 등 명산과 유적으로 점철된 빼어난 환경 덕분에 한적한 전원 마을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 2를 보면 저자 유홍준 교수가 자신을 서울 청운초등학교 출신이라고 소개하면서 이렇게 회상하는 대목이 있다. “해마다 자문밖으로 소풍 갔지만 내 기억에 남은 것은 우리가 뛰놀던 계곡과 바위, 그리고 멀리서 바라본 능금밭뿐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천연’의 느낌은 덜해지고 점차 평창동과 구기동의 산비탈이 고급 택지로 개발되면서 모양새가 달라졌다. 심지어 일부는 다소 번잡스러워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교외의 근사한 시골 마을이 연상되는 구석이 많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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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가 참여하는 민관 협업형 행보들
어쨌거나 이처럼 질적, 양적으로 풍부한 콘텐츠와 인프라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자문밖 일대는 서울에서 예술과 문화, 자연이 어우러진 보기 드문 자산을 보유한 동네가 됐다. 2013년부터는 매년 가을, 지역 주민들이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자문밖 문화축제’와 포럼도 진행하고 있다. 그토록 가치 있는 동네의 정체성을 되새기고 문화·예술을 매개로 의미 있는 소통과 느슨한 연대를 꾀하자는 차원에서다. 또 작년부터는 신진 작가나 성장기의 문화·예술인을 위한 창작 플랫폼 ‘자문밖 아트 레지던시’도 발족했다. 그리고 올봄 가나아트센터의 전시를 앞세워 본격 시동을 걸게 된 ‘자문밖 미술관 프로젝트’는 이 일대를 더 짜임새 있고 생기 있는 ‘아트 밸리’나 ‘아트 타운’으로 만드는 증폭제 역할을 하지 않을까 기대된다. 특기할 만한 점은 자문밖 미술관 프로젝트가 양질의 풍부한 콘텐츠를 바탕으로, 한층 더 차별화된 미술관과 행사, 프로그램 등 ‘소프트+하드웨어’를 다채롭게 쌓아 올리는 ‘상향식(bottom-up)’의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술관의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논의되고 있다. 종로구 구유지에 한국 근현대 화단을 대표하는 거장들의 미술관을 신축하거나, 자문밖 소재 작가의 자택과 작업실을 개조하는 아카이브형 기념 미술관을 만들거나, 현재 활동 중인 작가들의 작업실을 활용하는 ‘아뜰리에 미술관’을 꾸미는 것이 그것이다. 행정기관인 종로구청(김영종 구청장),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이 출범시킨 비영리재단인 가나문화재단, 사단법인 자문밖문화포럼이 총대를 메고 든든한 지원군으로 나서고 있다. 이 동네와 연이 있는 미술가들이 재능이든 자산이든 프로젝트를 위해 선사하는 ‘기부 대열’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글로벌 무대에서도 ‘브랜드’로 발돋움하며 ‘미술 한류’를 이끌고 있는 박서보를 비롯해 지난 1월 타계한 김창열 그리고 김구림, 최종태 같은 거목들이 작품이나 공간 등을 기꺼이 내어주겠다는 의지를 표명했고, 다른 원로 또는 후배 작가들까지 합류하고 있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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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밖 ‘아트 밸리’와 ‘미술관 프로젝트’의 의미
“미술관이 이미 많은데, 굳이 또?” 어쩌면 이 지점에서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초기에 투입되는 자본도 그렇지만 추후에도 유지·관리 비용이 필요한 성격의 프로젝트라 더욱 그렇다. 하지만 고즈넉한 동네에 휘황찬란한 랜드마크를 박아놓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는 작가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크고 작은 공간이 다채롭게 펼쳐진다면 환영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촘촘히 들어선 아트 공간들을 잇는 거리와 골목에는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테고, 그렇게 되면 어느새 ‘노령화 되어버린’ 이 일대에 생동감이 깃들 것이다. 그리고 삼청동, 서소문 일대에 자리 잡은 국공립 미술관들과 갤러리들을 거쳐 자문밖 거점으로 이동하는 ‘미술 산책’ 루트로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매력을 더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또 당장은 스타 작가들에게 눈길이 쏠린다 해도 마땅히 재조명받아야 할 자문밖 일대의 원로 작가나 소외되기 십상인 젊은 작가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열릴 수 있을 테고 말이다(1백50명이 넘는 자문밖 작가들의 연령대는 20대에서 105세까지 아우른다).
아직 초기 여정이지만 나름 성과도 있다. 구기동에 지어질 예정인 박서보 단색화 미술관은 빠르면 내년께 선보일 수도 있다(작가가 1백 점 이상의 작품을 기증할 예정이다). 각각 1백50점, 1백 점 이상의 소장품을 기부할 예정인 김구림과 최종태 작가를 기리는 미술관도 건립이 정해졌다. 김창열기념미술관은 고인의 평창동 자택을 기반으로 하기에 이르면 올 하반기에 문을 열 가능성도 있는데, 작가 소장품 1백80여 점을 기부하기로 했고, 귀한 사료도 공개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현재 논의 중인 추상화가 윤명로, 한국 판화의 선구자 이항성 등 이 지역의 다른 원로 작가들을 둘러싼 움직임도 활발해질 듯하다. 가나아트센터의 3월 전시 <자문밖 미술관 프로젝트> 2부(Part II)에 참가한 안규철 작가는 “마침 아카이브와 연구에 초점을 맞춘 서울시립미술관(SeMA)의 분관도 평창동에 들어설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작가들이 평소에 쓰던 작업실이 미술관으로 보존될 수 있다면 예술가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장소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구기동에 머물다가 평창동으로 2015년에 이주해 자문밖 문화축제 때 오픈 스튜디오 등에 동참해온 그는 설치, 영상, 퍼포먼스처럼 ‘기록’으로만 남곤 하는 현대미술의 경우엔 ’아카이빙’의 중요성이 점점 더해지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개인적으로 관심 가는 건 동시대 작가와 소통할 수 있는 아뜰리에 미술관이다. 아직 100% 확정은 아니지만 이수경, 박영남, 임옥상 등의 작가들이 물망에 올라 있다. “(작품도 전시되지만)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와, 그들과 함께 작업도 할 수 있는 공간을 두고, (아마 2층이 될 텐데) 한 층은 제 작업실로 쓰는 구도를 그려보고 있어요. 어린이를 대상으로 놀이를 통한 미술, 심리상담 등에 관심을 두고 있거든요. 미술은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다고 봐요.” 2005년부터 부암동에서 거주해온 이수경 작가의 설명이다. 언젠가부터 사회에 기여할 방법을 고민해왔다는 이 작가는 “정말 좋은 프로젝트인데, 스스로는 진지하게 임하는 큰 숙제처럼 여긴다”면서도 설렘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의 바람대로 부디 이 프로젝트가 그들의 일상 풍경만이 아니라 다른 동네나 지역에도 긍정적인 파장을 미치는 사례로 꽃피우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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