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를 주름잡았던 프랑스의 법관이자 대단한 미식가였던 브리야 사바랭은 도덕적 관점에서 “미식은 조물주의 질서에 대한 암묵적인 인종(忍從)”이라고 했다. 살기 위해 먹어야만 하는 인간에게 조물주는 ‘미식’을 식욕으로 권고하고, 맛으로 지원하며, 쾌락으로 보상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오늘날, 건강에 유익하면서도 맛난, 진정한 미식의 세계를 둘러싼 경제 논리에 자극받아 움직이는 주체들도 반가워할 만한 대목이다. 전 세계적으로 레스토랑과 마켓, 고메 숍을 총망라한 ‘미식의 메카’ 푸드 콤플렉스(food complex)가 각광을 받는 가운데, 국내 주요 백화점이 펼치는 ‘강남 스타일’의 프리미엄 식품관 경쟁이 흥미롭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 욕구에는 한계가 없다. 음식물 섭취량에는 한계가 있지만, 음식물을 둘러싼 문화 체계는 무한하다.”더 맛나고 더 좋은 음식을 끝없이 갈망하는 인류의 허영기 어린 ‘식탐’을 두고 20세기 프랑스의 지성을 대표했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꼬집었다. ‘소비가 현대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동력’ 이라는 전제 아래, 음식도 결국에는 계급을 나타내는 소비 메커니즘에 부속되는 상징물일 뿐이라는 보드리야르의 주장은 분명 일리가 있다. 하지만 ‘살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 사는’ 이들, 아니 이처럼 극단적인 미식가들은 차치하더라도, ‘입에 들어가는 건 함부로 고르지 않는다’는 식철학(食哲學)을 고수하려는 ‘건강한 미식가(healthy foodie)’ 인구가 눈에 띄게 증가하는 배경에는 다른 동인들도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건강의 소중함, 툭하면 불거지는 음식 스캔들에서 비롯된 먹거리에 대한 불신, 눈물 나도록 맛난 요리의 스펙트럼 확대 등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의 ‘미식 소비’는 믿을 수 있는 식료품을 수긍할 수 있는 가격에 사서 즐기고 싶은 바람에서 행해지는 것이지 단순한 과시욕이나 사치 성향의 발현만은 아닌 것이다. 물론 18세기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기 전후로 싹튼 레스토랑 문화는 부르주아들에게 꽤 사치스러운 ‘즐길 거리’였다. 그러나 혁명이 스쳐 지나가도 미식은 남았으며, 곧이어 예술의 경지에 오를 정도의 ‘가스트로노미의 세계’가 찬란하게 펼쳐졌다. 프랑스 미식 혁명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파고든 일본의 저널리스트 나가오 켄지는라는 저서에서 20세기 중반부터 미식 문화가 대중화되면서 상업과 밀접하게 결합된 비즈니스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화려한 장식이나 지나치게 풍성한 메뉴에 대한 각성과 함께 ‘작은 레스토랑의 부상’이나 ‘가정의 조리 문화에 대한 관심’과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를 가리켜 누군가는 ‘가스트로노미의 민주화’라고 부르기도 했다. 보통은 레스토랑에서나 접할 수 있던 파인 다이닝을 ‘작은 레스토랑’에서 간소한 외식 버전으로 즐기거나 가정에서 약식으로 직접 만들 수 있는 인프라가 생겨난 것이다. 세기의 미식가였던 브리야 사바랭은 미식을 식탐이나 대식과 혼동하지 말 것을 권고하며 ‘폭식, 폭음은 미식가의 명단에서 제명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오늘날에도 수백 년 전 기지개를 켰던 방식의 ‘작은 레스토랑’ 문화가 살아 있다. 요리사의 기술과 정성이 농축된 좋은 음식을 안락한 분위기에서 합리적인 가격대에 접할 수 있는 비스트로노미(bistronomie)니 가스트로펍(gastropub)이니 하는 ‘하이브리드 음식점’이 그러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또 대개 선진국일수록 발달한다는 ‘웰빙’에 초점을 맞춘 가정식 조리 문화도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를 한데 모아놓은 ‘미식의 메카’와도 같은 곳이 백화점이나 대형 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푸드코트(food court)’일 것이다. 특히 백화점의 고급 식료품점이 아니라 마켓형 식품관의 ‘일취월장’하는 모양새가 흥미롭다. 산지에서 ‘막 도착한’ 싱싱한 식재료가 즐비한 시장형 슈퍼마켓과, ‘물 건너’ 온 프리미엄 브랜드의 가공품이 그득한 수입품 부스, 엄선된 레스토랑, 조리에 필요한 아기자기한 물품을 진열해놓은 고메 숍 등 식문화에 관련된 최신 트렌드를 집결해놓은 듯한 이른바 ‘푸드 콤플렉스’다. 그야말로 ‘음식 백화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저렴하지도 않지만, 요즘 대세인 ‘로컬 소싱(local sourcing)’ 철학을 바탕으로 신선함을 필요로 하는 재료일수록 지역 산물을 고집한 데 따른 맛과 질의 조화를 고려하면 반드시 비싸다고만 할 수도 없는 ‘합리적인 럭셔리(affordable luxury)’인 셈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최근 뉴욕과 토리노 등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이어가고 있는 이탈리(Eataly). 해산물, 치즈, 델리, 파스타, 베이커리, 와인 등 온갖 산해진미를 모아놓은 듯한 다채로운 푸드 섹션을 자랑하는 이곳에서는 신선한 재료로 버무려진 ‘미각 체험’을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품질 좋은 식료품과 주방·리빙 용품 쇼핑, 그리고 실용성 넘치는 요리 강좌까지 ‘섭렵’할 수 있다. ‘이탈리아’와 ‘먹다’라는 단어를 합친 이름이 암시하듯 프리미엄 ‘이탤리언 퀴진’을 손쉽게 접할 수 있지만 일부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전혀 예약을 따로 받지 않기에 줄지어 기다리면서 먹는 광경이 흔하게 펼쳐진다. 이탈리에 들어선 레스토랑에서 테이블을 얻기엔 1시간이 훌쩍 넘는 긴 시간이 소요되기도 하므로 부카티니 파스타(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는 우동같이 굵은 파스타)와 나르디니 와인과 같은 이탈리아 명물을 ‘획득’한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돌아가는 이들도 많다. 가스트로노미의 민주화란 표현이 나름 와 닿는 장면이다.
이 정도는 아니지만 요즘 국내에서도 유서 깊은 전통의 맛집이 아닌 백화점 슈퍼마켓이나 식품관에서 길게 줄지어 선 광경을 꽤나 자주 볼 수 있다. 신세계 강남점을 예로 들자면 지하 1층 식품관에서 독일 로텐부르크의 전통 과자라는 ‘슈니발렌’을 사고자 북새통을 이루고, 주말에 폴 바셋 커피를 주문하려면 수십 분을 기다리는 일이 부지기수다. “지난 7월 신세계가 ‘프리미엄 푸드 부티크’를 표방하며 청담동에 야심 차게 문을 연 SSG 푸드마켓에는 소위 ‘개장 효과’도 작용하긴 한다지만 일본 명장의 노하우로 유명하다는 베이커리의 케이크와 감칠맛이 일품인 성게 소바 등을 맛보기 위해 방문한 대기 행렬이 길게 늘어서는 바람에 발레파킹이 마비되는 사태도 종종 빚어졌다. 지금도 유기농 사료를 먹고 ‘티 없이’ 자란 토종닭이 새벽에 낳았다는 ‘재래 토종 방사 유정란’과 뿌리째 캔 ‘피트모스 채소’와 같은 품목은 금방 동이 나기 일쑤라고. 최근 대대적인 리뉴얼을 끝내고 다시 문을 연 갤러리아의 새 식품관 ‘고메 494’에 가면 자리가 없어 점심시간이면 1시간을 넘게 기다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운 좋게 자리를 잡아 일식당 스시마츠모토의 인기 메뉴 치라시 덮밥을 시켰다고 하더라도 디저트 코너로 이동해 라즈베리 에클레어를 품절되기 전에 구하는 건 또 다른 ‘타이밍의 미학’이 도와줘야 하는 문제다. 지난해 국내 최초로 식품관의 슈퍼마켓 매출로만 연간 1천억원대를 기록했다는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은 또 어떠한가. 이 동네 주부들 사이에서 소문난 김치 장인을 ‘브랜딩’ 작업을 통해 슈퍼마켓에 들여놓는 등 고객의 수요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월등한 실력 때문에 압구정본점은 ‘반찬의 메카’로 통한다. 이처럼 열광적인 반응에는 호기심도 작용했겠지만 ‘you are what you eat’이라는 의식이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맛나고 건강한 먹거리야말로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이 가치를 두는 품목에 상대적으로 투자를 집중하는 ‘트레이딩업(trading up)’ 소비의 주 대상이 될 만하지 않은가.
pan lang=EN-US>’와 ‘먹다’라는 단어를 합친 이름이 암시하듯 프리미엄 ‘이탤리언 퀴진’을 손쉽게 접할 수 있지만 일부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전혀 예약을 따로 받지 않기에 줄지어 기다리면서 먹는 광경이 흔하게 펼쳐진다. 이탈리에 들어선 레스토랑에서 테이블을 얻기엔 1시간이 훌쩍 넘는 긴 시간이 소요되기도 하므로 부카티니 파스타(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는 우동같이 굵은 파스타)와 나르디니 와인과 같은 이탈리아 명물을 ‘획득’한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돌아가는 이들도 많다. 가스트로노미의 민주화란 표현이 나름 와 닿는 장면이다.
청담동과 압구정동 일대를 수놓고 있는 이들 3인방의 미식 경쟁은 저마다의 특장점이 있기에 더욱 흥미롭다. 갤러리아 명품관 주소의 번지수에서 이름을 착안한 고메 494. 마켓(grocery)과 식음 시설(restaurant)’을 합친 ‘그로서란트(grocerant)’라는 개념을 내세운 고메 494는 상대적인 공간의 협소함을 인식해 ‘바이 빅, 바이 스몰’이라는 효율적인 시스템을 도입했다. 쌀, 기저귀, 화장지처럼 부피가 커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59개 품목의 생활용품을 대상으로 물건 대신 진열된 ‘빅 카드’라는 상품 주문 카드만을 집어 결제하면 포터맨이 차량까지 ‘운반’을 책임진다. 품질 좋다는 계약재배 쌀 1kg짜리와 앙증맞은 미니 버전의 ‘본마망’ 잼이나 ‘기코망’ 간장 등 싱글족이나 단기 체류자를 위한 상품을 구비해놓은 ‘바이 스몰’ 코너의 아이디어도 돋보인다. 바쁘거나 혹은 게으른 현대인의 성향을 고려해 구매한 농산물을 무료로 손질해주고 고구마, 감자 등 ‘영양 간식’을 즉석에서 굽거나 쪄서 판매하는 ‘컷앤베이크(Cut & Bake)’ 코너도 재미나다(실제로 황금고구마는 오후에 가면 떨어질 정도로 인기 만점인 품목). 수경 재배한 친환경 쌈채류를 뿌리째 가져다놓은 ‘텃밭형 진열’도 이채롭다. 갤러리아는 특히 외식업체의 구성이 눈에 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태원의 명소인 비스테까(스테이크)와 디부자(피자)를 비롯해 장안에 소문난 맛집들을 한곳에서 만날 수 있다.
SSG 푸드마켓은 해외에 체류해본 경험이 있다면 향수를 지닌 이들도 꽤 될 법한, 홀 푸즈 마켓(Whole Foods Market)이나 트레이더 조(Trader Joe’s) 같은 유기농 전문 식품 매장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뉴욕의 명물 첼시 마켓의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하면서도 런던 해로즈 백화점 식품관의 룸투룸(room-to-room) 형태의 진열 방식을 도입하고, 구역별로 인테리어에도 차별화를 시도했다. 3백여 개 브랜드를 취급하는 방대한 그로서리 존과 명인들의 손길을 거쳤다는 50여 종의 장류를 모아놓은 ‘장방’, 3백여 종류의 치즈와 살라미를 거느린 ‘치즈 셀러’ 등을 자랑한다. SSG 관계자는 “룸에서 룸으로 이동하는 공간을 넓게 배치한 건 마치 ‘탐험’하는 듯한 느낌을 강조해 고객에게 차별된 경험을 선사하고자 함”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층엔 ‘패스트 슬로푸드’를 내세운 다국적 요리를 선보이는 카페형 레스토랑인 ‘그래머시 홀’과 맞춤형으로 직접 로스팅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베키아에누보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현재 이 상권의 최강자인 현대 압구정본점이 단지 ‘일인자의 여유’로 넋 놓고 있을 리 없다. 구매력을 갖춘 미식가 고객층을 확보하고 있는 이곳은 바이어들이 전국에 숨어 있는 전통 식품 명인과 맛집을 찾아다니는 가운데 발굴하면서 구축한 탄탄한 프리미엄 상품군에 큰 자부심을 품고 있다. 월 1회 VVIP 고객을 5~6명 초청해 한우, 제철 과일, 생선 등 생식품의 맛을 타사 점포의 상품과 함께 블라인드 테스트 방식으로 비교, 평가할 정도로 신선 식품 관리에도 신경을 쓴다. ‘30분 타르트’라 불릴 정도로 금세 다 팔려 나가는 타르트로 유명한 빵집 르알래스카를 지난해 입점시킨 데 이어 올봄엔 독일 천연 식품 브랜드 크레센도, 8월엔 할리우드 배우, 글로벌 기업 CEO 등 유명인들이 애용한다는 페닌슐라 호텔의 푸드 부티크를 들여오기도 했다. 또 얼마 전 3백70여 개 제품을 갖춘 수입 치즈 숍 ‘라 프로마제리’도 개장했다.
이처럼 백화점이 ‘미식 경쟁’에 열을 올리는 건 단지 자존심 싸움이 아니다. 일단은 식품관의 실적 기여도가 높은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 어둠의 터널을 좀처럼 벗어날 것 같지 않는 불황의 늪에서도 현대 압구정본점 식품관의 매출은 지난 수년간 꾸준한 성장곡선을 타왔다. 식품관 내 슈퍼마켓 매출을 보자면, 지난해에는 두 자릿수(14.3%) 성장을 기록해 1천억원을 돌파한 데 이어 올해는 1천1백억원대를 넘보고 있다. 특히 지역 밀착형 백화점의 이점으로 슈퍼 매장의 매출 효율은 압구정본점 평균 평당 매출에 비해 3배 이상 될 정도로 높은 편이라는 통계가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의류, 가방, 보석 등 명품 브랜드가 백화점의 품격과 힘을 좌우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지만, 현실에서는 ‘식품이 명품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이다. 일주일에 1회 이상 식품 매장을 이용한 고객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92.5%라는 위력적인 수치가 말해주는 게 무엇이겠는가. 이에 따라 식품관의 위상이 지니는 상징성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파리 봉 마르셰 백화점의 럭셔리 식료품 매장인 그랑드 에피스리(Grande Epicerie)가 뿜어내는 고급스러운 오라와 이미지를 생각해보라.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관계자는 “내점 고객의 절반 이상이 슈퍼마켓을 다녀가기 때문에 식품 매장은 백화점 전체의 격과 이미지를 좌우한다고 본다”라고 설명했다. 현대카드 출신의 40대 CEO 등용으로 화제가 된 갤러리아의 박세훈 대표는 “식품관은 백화점의 심장”이라고 단언하며 고메 494를 무기로 1990년대의 전성기를 되찾을 수 있는 ‘제2의 성장판’을 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갤러리아는 동종 업계에 입점되지 않은 맛집 브랜드를 유치하면서 본연의 품질을 떨어뜨리기 않기 위한 방어책의 하나로 업체에 인테리어 비용을 지원하고 수수료율을 낮춰주는 등 상생의 전술까지 구사했다. 신세계가 반포 지구의 핵심 상권에 위치한 강남점을 시작으로 미국의 프리미엄 식료품 브랜드인 딘앤델루카(Dean & Deluca)와 영국의 하이엔드 슈퍼마켓 브랜드 웨이트로즈(Waitrose)을 국내에 들여오는 동시에 SSG 푸드마켓과 같은 부티크 형태의 슈퍼마켓에 과감한 투자를 하는 적극적인 행보도 비슷한 맥락에서 풀이될 수 있다.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는 것은 그 사람이 당신 집에 있는 동안 그 행복을 책임진다고 하는 것”이라는 금언이 있다. 확실히 먹거리의 내실과 품격, 그리고 창조성은 소비자에게도, 유통업자에게도, 재배를 하는 농가에게도 ‘풍요와 행복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나 자신의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호스트이며 손님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