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로 가득 찬 세상의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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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 2025

글 김연우(뉴욕 통신원)

뉴욕 휘트니 미술관 김 크리스틴 선 <Christine Sun Kim: All Day All Night>

“소리를 반드시 귀로 들어야 할 필요는 없어요. 촉각적으로 느낄 수도 있고, 시각적으로 경험할 수도 있고, 심지어 하나의 개념으로 여길 수도 있죠.”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김 크리스틴 선(Christine Sun Kim)은 자신의 2015년 TED 토크 <매혹적인 수화의 음악>에서 설명했듯 소리를 비청각적·정치적 차원에서 조명하는 작업을 해왔다. 한국인 부모를 두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자란 그녀의 모국어는 미국 수어(ASL)다. 작가는 수어와 음성언어, 소리의 관계를 탐구하고, 여기에서 불거지는 소통의 복잡성을 다룬다. 그 바탕에는 작가, 이민자, 어머니, 그리고 데프 커뮤니티(Deaf Community)를 대변하는 사회운동가 등 다양한 정체성으로 세상과 소통해온 시간이 담겨 있다. 뉴욕 휘트니 미술관 개인전 <Christine Sun Kim: All Day All Night>(2. 8~7. 6)은 2011년부터 현재까지 제작한 드로잉, 벽화, 영상, 설치 등 작업 90여 점을 선보이며, 소리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는 그녀만의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전시는 먼저 눈으로 소리를 직접 느껴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벽에 그려진 사선과 음표가 공간에 더하는 ‘소리 없는 운율’을 마주하게 된다. 일반적인 악보와 달리, 작가의 오선은 미국 수어의 표현을 따라 ‘사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어에서 악보의 오선은 엄지손가락을 접은 채 나머지 네 손가락을 얼굴 앞에서 가로질러 이동하는 동작으로 표현되며, 4개의 선을 공간에 남긴다. 벽면을 부유하는 음표들은 이 선에 살짝 걸쳐 있거나, 닿지 못한 채 여백을 떠도는데, 이를 실제 연주로 옮긴다면 들릴 듯 말 듯 미세한 소리가 날 것이다. 작품명 ‘고스트 노트(Ghost(ed) Notes)’(2024)는 본래 ‘명확한 음높이가 없어 뚜렷하게 들리지 않는 음’을 뜻하는 동명의 용어에서 따왔다. 작가는 아주 작게 연주되어 거의 리듬으로만 존재하는 이 소리를 ‘고스팅(ghosting, 별다른 설명 없이 갑작스레 소통이 단절되는 상황)’과 연결 짓는다. 이처럼 들리지 않는 음표로 구성된 악보는 청인 중심 사회에서 소외되어온 개인적 경험을 반영한다. 동시에,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관계’와 ‘소통’의 어려움을 암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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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적 언어, 음악과 수어가 전하는 이야기
김 크리스틴 선 작가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음악 기보법을 차용해 소리를 그림으로 기록하거나, 미국 수어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형태를 조형화하는 식이다. 이번 뉴욕 휘트니 미술관 전시의 중심이 되는 ‘메아리(Echo)’ 연작은 후자에 해당한다. 메아리는 소리를 기반으로 하는 용어로, 반사된 소리가 다시 전달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는 소리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세상에서 경험하는 소통 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수어 통역을 거치는 작가의 소통 과정에 존재하는 피할 수 없는 시간차와 반복은 의미가 반향되어 전달되는 메아리와 유사한 구조를 띤다. “지금 제 통역사 베스(Beth)도 제가 하는 말을 메아리처럼 반복해서 전달하고 있죠. 그리고 여러분이 하는 말도 수어로 메아리칠 거예요. 우리 사이의 공간에는 이런 메아리들이 존재해요.” 수어에서 메아리치는 소리의 파동은 반사면을 형성하듯 수직으로 세운 손바닥에 다른 손의 네 손가락이 닿게 한 뒤, 반대 방향으로 부드럽게 움직이며 멀어지는 동작으로 나타낸다. 작가는 이러한 손동작의 궤적이 만들어내는 형태로 전시장 하나를 가득 채웠다. 공간을 집어삼킨 듯 커다란 메아리에 작은 메아리들이 반복적으로 중첩되며 다시 하나의 거대한 메아리를 이룬다.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인포그래픽 또한 문화적, 언어적 장벽을 넘어서는 소통을 위해 작가가 애용하는 방법 중 하나다. 목탄과 오일 파스텔로 그린 드로잉 작품들은 또박또박 적힌 손 글씨, 재료의 번짐과 얼룩, 줄을 그어 실수를 수정한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더 친밀하게 다가온다. 항목별로 적힌 작은 글씨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는 과정은 보다 큰 집중력과 정성을 요하는데,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이들이 객관적 데이터가 아닌,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간결한 문장으로 이뤄져 있음을 알 수 있다. ‘Shit Hearing People Say to Me’(2019), ‘Degrees of Deaf Rage’ 연작(2018) 등 작품명에 등장하는 냉소 섞인 문구는 유머로 희석되었지만, 그 안에는 데프 커뮤니티가 겪어온 결코 가볍지 않은 현실이 담겨 있다(이 커뮤니티는 청각 장애 유무로 특징짓는 게 아니라 ‘미국 수어’라는 공통의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대문자 ‘D’를 사용해 ‘Deaf’로 표기한다).
김 크리스틴 선은 이러한 현실에 맞서면서 세상과 소통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독일 출신 작가로 그녀의 파트너이기도 한 토마스 마더(Thomas Mader)와 협업해 완성한 ‘ATTENTION’(2022)은 주목을 끌거나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수어 동작에서 착안한 키네틱 조각으로, 선풍기로 작동하는 양팔이 쉼 없이 움직이며 부단히 소통을 시도하는 과정을 담았다. 중앙에 놓인 바위의 표면은 이들의 반복적 시도 끝에 점차 닳아가며, 지속적인 노력이 지닌 힘과 그것이 이끌어내는 변화를 드러낸다. 여기에는 작은 울림일지라도 반드시 누군가에게 닿을 것이라는 단단한 믿음이 존재한다. 메아리치는 세상에서 그것들이 언젠가 더 큰 울림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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