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때려도 괜찮아, 내려놓기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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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03, 2016

에디터 고성연

많은 이들이 여가의 소중함을 얘기하고 휴식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정작 휴가를 맞이해도 그걸 온전히 즐길 만한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다. 기진맥진해서일까? 잘 놀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일까? 노는 것도 잘해내기 힘들다. 어쩌면 우리는 능률을 위해 무던히도 ‘질주’하는 일상에서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스스로를 보듬을 여유, 그러니까 ‘내려놓기’의 기술부터 습득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멍 때리기나 딴생각 같은 ‘정신의 방랑’을 제대로 허용해야만 오히려 이 사회가 그토록 강조하는 창의성도 솟아난다는 조언에 귀 기울여볼 시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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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속 편하게 노는 것에 대한 수용력이 있었다. 그러나 능률을 숭배하면서 그러한 부분은 사라져버렸다.” _버트런드 러셀


하룻동안 평균 3천 단어의 글을 써 내려갔다는 정열적인 문필가이자 사상가. 철학, 수학, 과학, 사회학, 예술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던 세기의 지성. 거의 1백 세를 채울 정도로 장수한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꽤나 부지런하게 일했을법한 인물이지만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자신의 저서에서 ‘여가의 미학’을 누누이 강조하는 의외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언뜻 듣기만 해도 ‘꿈 같은’ 사회상을 제안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에 4시간만 일하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 말이다. 그는 눈부시게 발달한 현대 기술이 만인을 위한 생활 필수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을 엄청나게 줄였다며, 이제 문명에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정하게 여가를 분배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노동인구의 과로는 과잉 공급을 낳고 생산품의 가치를 떨어뜨려 소수의 배만 불릴 뿐 결국에는 온 사방에 고통을 야기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론적으로’는 짧은 노동시간이 전체적으로 볼 때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왜 늘 바쁘다고 느낄까?

러셀이 주장한 4시간이라는 노동시간은 당시에는 그야말로 이상론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르지만,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이 발달한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이미 엄청난 노동 강도(적어도 물리적으로는)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사람들의 생활과 업무는 날로 편리해지고, 같은 일을 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라(19세기 초만 해도 영국에서는 남성의 평일 근로시간이 15시간이었고, 아이들도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는 게 보통이었다고 한다). 야근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지만 오늘날 상당수 국가에서는 주 5일 근무제가 정착되었으며 각종 휴가를 누릴 수 있는 근무 환경이 구축돼 있다. 그러나 ‘시간이 남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 그럴까?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시간의 가치가 상승해서, 즉 ‘시간=돈’으로 여겨지게 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은 적이 있다. ‘비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인식이 뿌리내렸다는 것이다.
또 경제적으로 부유한 계급, 계층일수록 시간 부족을 호소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돈벌이 때문에 여가를 즐길 시간이 없거나, 여유가 생기더라도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는 사람일수록 시간이 아깝다고 느낀다는 설명이다. 또 스마트폰과 태블릿 기기를 일상적으로 끼고 사는 현대인의 디지털 환경도 여유를 빼앗는 원인이 되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이메일을 주고받고 연락을 취할 수 있기에 근무 시간 외에도 업무가 가능해진 터라 ‘쫓긴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셈이다. 일을 하고 있어도, 쉬고 있어도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 십상이고 말이다. 물론 시간은 소중하다. 하지만 이처럼 ‘시간 예속’형 사고방식에 사로잡히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더 힘든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전 세계적인 분위기가 조금 덜 일하고 더 많이 놀자는 ‘레저 경제’로 전환되고 있다지만, 우리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노라면 여가를 누릴 때조차도 ‘효율’을 따지고, 그래서 ‘금쪽같은’ 시간에는 정작 더 지쳐버리는 경우도 많다.

‘비움의 시간’이 차이를 만든다

‘속 편히 놀기’는 오늘날 우리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지상 과제로 여겨지는 창의성과도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러셀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석학들이 여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창의성이라는 덕목 때문이다. 꼭 필요한 일만 해야 기력을 소모하지 않고 여가를 제대로 즐길 수 있고, 그에 따라 생긴 여유가 자연스럽게 다른 세계와의 소통을 부르고 창의성을 샘솟게 하는 자양분이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창의성은 어쩌면 ‘시간의 효율’처럼 많은 이들의 심신을 짓누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단어다. ‘창의적 발상’을 논할 때 자주 애용되는 표현이 있다. “좋은 아이디어를 얻는 최상의 방법은 많은 아이디어를 얻는 것이다.” 평생에 한 번 받기도 어려운 노벨상을 두 차례나, 그것도 서로 다른 분야(화학상, 평화상)에서 받은 라이너스 폴링 박사의 명언이다. 여기서 아이디어의 원천은 자신의 머릿속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흡수할 수 있는 협업의 힘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기본적으로 노력의 ‘양’이 중요하다는 맥락에서 설명한다. 물론 폴링 박사는 열심히 생각하고, 많은 이들과 어울리면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아이디어 중 ‘진짜’는 쭉정이를 과감히 솎아내는 ‘버림의 과정’에서 건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폴링 역시 아이디어를 많이 흡수하되 ‘나쁜 아이디어는 버리는 일’의 중요성을 부연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려놓기’를 조언했다. 어떤 분야에서든 밤낮으로 멈추지 않고 똑같은 방식으로 매달려서는 오히려 참신한 아이디어가 솟아날 가능성을 차단해 빼어난 통찰력을 얻을 수 없으므로 정신을 자유롭게 풀어놓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니븐의 저서 <나는 왜 똑같은 생각만 할까>에 따르면 폴링 박사에게 위대한 아이디어를 안겨준 곳은 그의 침대였다고. 또 아인슈타인은 수학 공식이 풀리지 않을 때면 바이올린을 연주했는데, 이 시간이 해답 풀이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문젯거리와 거리를 둔 상태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유레카’로 이끄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그저 정신이 스스로 길을 찾도록 맡겨두는 자유의 시간 덕분에 답을 찾았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멍 때리기나 딴생각하기는 가장 창의적인 방랑일 수 있다

<딴생각의 힘>이라는 책을 쓴 캐나다 출신의 심리학자 마이클 코벌리스는 이런 유의 자유를 ‘정신의 방랑’이라고 부른다. 그는 소위 ‘멍 때리기’나 이리저리 ‘딴생각’에 사로잡히는 게 인간의 본성이며 집중 강박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집중, 특히 무아지경에 비할 만한 ‘몰입’의 가치는 많은 이들이 칭송하듯이 엄청나게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뇌 속에서는 딴생각과 집중 상태가 끊임없이 실랑이를 벌이기 마련이고, 몰입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란 힘들다. 집중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뇌에 휴식이 꼭 필요하다. 인간의 집중력은 ‘정신의 메모지’에 해당하는 작업 기억에 달려 있는데, 이 작업 기억이 혹사당하지 않아야 사색이 이뤄지고 사고를 통제하는 능력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딴생각도 나름 위력을 지닌다는 게 코벌리스 교수의 주장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뇌에는 멍하니 있거나 딴생각을 할 때 특히 활성화되는 부위인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가 존재하는데, 이것이 자아 성찰, 사회성, 창의성 등에 영향을 미쳐 더 창의적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돕는다고. 우리가 딴생각을 하더라도 뇌는 나름 ‘열일’ 상태인 데다 때때로 창의적인 발상까지 ‘부화’시킬 수 있으므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정말로 창의적인 인재를 원한다면, 조직 차원에서도 그저 기계처럼 일을 처리하게 하는 게 아니라 직원들에게 딴생각에 빠질 시간을 제공하고 권장해야 한다고 코벌리스 교수는 주장한다. 실제로 ‘딴생각’의 역학에 동의하는 기업 사례가 점점 더 눈에 띈다. 디지털 세상의 선두 기업 구글은 사무실 각 층에 계단 대신 달팽이 모양의 미끄럼틀을 들여놓았고, 공유 경제의 대표 주자 에어비앤비는 파우더 룸을 상상력을 북돋울 수 있도록 동화 속 공간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이동하거나 화장실에 가는 잠깐의 시간만이라도 업무에서 벗어나 ‘딴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또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소개된 삼성전자 미국 법인의 신사옥 디자인 계획 사례를 보면 층과 층 사이에 널찍한 실외 공간이 포함돼 있는데, 여기에는 직원을 공용 공간으로 유도해 서로 부딪히고 담소를 나누는 중에 우연히 싹트는 창의적 발상에 대한 은근한 기대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석된다. 기업들의 이러한 행보에는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면서 집중한다고 해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지는 않는다는 시각이 깔려 있는 셈이다.

일상에서 ‘내려놓기’ 연습하기

최근 서점가에서는 ‘열심히 하지 마라’, ‘너무 노력하지 마라’라는 메시지가 주를 이루는 책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이런 유의 자기 계발서는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초대형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의 변종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 같은 현상이 지나친 ‘달관론’으로 빠져서는 안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심리학적, 과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집단 차원의 목표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때때로 ‘내려놓기’를 하는 편이 결과적으로 더 이득이라는 주장만큼은 되새길 필요가 있을 듯하다. 잘 풀리지 않는데도 눈치 보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빨리 해결하려고 전전긍긍하는 것이야말로 시간 낭비가 아닐까. 포기하라는 게 아니다. 운동이든 산책이든 뜨개질이든 자신이 쉽게 즐길 수 있는 행위를 하거나 일의 속도를 다소 늦춰 다른 시각에서 상황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실제로 창의성을 측정한 한 실험에서 세 그룹의 피험자가 휴식 시간을 제공받으면서 기억력을 요하는 과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과제, 별로 힘들지 않은 과제를 각각 수행했는데, 그중 손쉬운 과제를 수행한 그룹이 결과적으로 가장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고 한다. 코벌리스 교수는 아마도 딴생각을 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했다(흥미롭게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쉬운 과제를 수행할 때 딴생각이나 멍 때리기에 빠질 가능성이 더 크다고). 어느 물리학자는 내려놓기의 미학이 빛을 발하는 장소로 ‘3B’, 즉 버스(bus), 욕조(bath), 침대(bed)를 꼽았다. 휴가철을 맞이해 오랫동안 어디론가 떠날 수 있다면, 그래서 3B를 마음껏 섭렵하면서 주야장천 딴생각과 멍 때리기의 파도에 휩쓸릴 수 있다면 최상일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도 스스로 딴생각에 사로잡힌다는 사실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서, 내려놓기 연습을 꾸준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할 듯하다. 그 과정에서 생각의 널뛰기가 가능한 자신만의 내려놓기 도구와 장소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일상에서 창의적인 해답 찾기에 점차 익숙해지면 휴가 때도 ‘방콕’을 택하면서 뭔가 일을 해결해보려고 버둥거리거나, 아니면 멀리 떠나더라도 찌뿌드드한 심신을 달래느라 외려 더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불행을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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