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혁명을 회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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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 2016

글 박은주(아트 컨설턴트)

프랑스 건축과 도시계획에 큰 혁명을 선사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그는 공동주택의 개념을 실현한 주인공으로, 아파트를 통해 서민의 주거 문제를 해결했을 뿐 아니라, 인체 비율을 고려한 공간 기준을 만들어 삶의 질을 높였다. 그런 점에서 최근 그의 17개 건축물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프랭크 게리, 안도 다다오 등 많은 건축 거장이 현대인의 삶을 실용적으로 바꿔준 세기의 혁신가 르 코르뷔지에에게 진정한 존경을 표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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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샹 성당에 갈 때마다 감동의 눈물을 흘립니다.”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으로 스타키텍트(starchitect)’의 대명사가 된 프랭크 게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파리 남부에 있는 조소적인 느낌의 예배당인 롱샹(The Chapelle of Notre-Dame-du-Haut, Ronchamp)을 비롯해 위대한 건축물이 프랑스 도처에 남아 있기에 많은 이들이 프랑스인으로 알기도 하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사실 스위스 출신이다. 스위스 라 쇼드퐁에서 태어난 그는 1920년에 건축가로서의 자신에 걸맞은 이름을 스스로 짓기 전까지 샤를-에두아르 잔느레로 불렸다. 피아노 교사인 어머니에게 예술적 자질을 물려받아 어릴 때부터 섬세한 감성을 지닌 소년이었던 샤를-에두아르 잔느레는 아버지와 함께 숲과 계곡을 탐구하며 성장했다.

위대한 근대 건축가의 스승은 자연이었다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는 프랑스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르 아브르에 1만2천 개의 주택과 공공 건물, 상가, 종교적 건축물, 정부 청사 등을 지어 도시를 탈바꿈시킨 건축가였다. 철근 콘크리트가 르 코르뷔지에의 상징적인 건축 재료가 된 것은 1907년 오귀스트 페레의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그 실용성을 깨달으면서부터였다고. 이후 르 코르뷔지에는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의 건축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와 교류했다. 이 모든 만남은 당시 유럽에 막 자리 잡은 새로운 문학, 과학, 음악, 디자인, 장식 예술 등 문화 혁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축가가 되는 발판이 됐다. 하지만 건축학을 정식으로 수학하지 않은 그의 진정한 스승은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등을 여행하며 데생을 통해 건축의 구성과 논리를 해독했다. 쥐라 산맥의 바람을 맞으며 자란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부여한 것은 자신의 고향에는 존재하지 않는 뜨거운 태양이었다. 이렇게 여행은 그에게 새로운 건축의 축을 이루는 기본 요소뿐만 아니라 화려한 색에 대한 향연을 맛보게 해줬다. 그가 언제나 손에서 놓지 않았던 데생 작업은 성실하게 현실을 자각하는 방식이었으며, 회화와 건축 작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불멸의 악기였다.
걸맞은 이름을 스스로 짓기 전까지 샤를-에두아르 잔느레로 불렸다. 피아노 교사인 어머니에게 예술적 자질을 물려받아 어릴 때부터 섬세한 감성을 지닌 소년이었던 샤를-에두아르 잔느레는 아버지와 함께 숲과 계곡을 탐구하며 성장했다.

인체 비율을 건축물에 활용한 혜안과 진취성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체의 비례 규칙을 신전 건축에 적용한 로마 시대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에게 영감을 받아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의 인체 비례도를 탄생시켰다. 르 코르뷔지에는 인간의 신체 척도와 비율을 기초로 황금 분할을 찾아냈고, 그것을 건축적으로 수치화한 것이 ‘모듈러(le modular) 이론’이다. 모듈러는 최소한의 공간 속에서 사람이 움직이기에 불편함이 없는 최적화된 수치와 표준을 제시한다. 르 코르뷔지에 자신이 인생의 걸작이라고 선언했던 약 13.22m2(4평, 3.66X3.66cm)의 작은 통나무집 카바농(1951년)은 이 수치를 건축가 스스로의 삶에 녹인 흥미로운 모델이다. 카바농은 비행기를 타고 니스에 내려 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로크브륀?카프-마르탱(Roquebrune-Cap-Martin)에 위치한다. 차에서 내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모나코가 보이는 지중해 바다가 느닷없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는 모나코가 고향인 아내 이본에게 이 작은 통나무집을 선물했는데, 부부의 별장이었음에도 나무로 만든 침대는 하나뿐이었다. 아내가 침대에서 자고, 건축가는 바닥에 매트리스만 깔고 잠을 잤다.
모듈러는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물 대부분에 적용된다. 거주민 3백 명 이상을 한 건물에 수용하면서 학교, 상가, 스포츠 센터, 공연장 등을 갖춰 건물 내에서 자체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게 한 마르세유의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e´ d?Habitation, 1945~1952), 자연 속에 세운 오브제로 형태와 재료의 관계를 연구한 롱샹 성당(1950~1955) 역시 모듈러 이론을 표준으로 삼았다. 누워서 두 팔을 벌리면 양쪽 벽이 손에 닿는 라투레트 수도원(1953~1960)의 작은 방은 큰 도시의 호화롭고 넓은 아파트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삶을 다시 숙고하게 한다. 2013년 뉴욕 현대미술관과 2015년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전시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었던 건 기능적 공간에 관심을 갖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하는 게 아닐까 싶다. 오는 12월 서울에서 열리는 르 코르뷔지에 전시 역시 건축과 도시계획의 중요성, 집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얼마 전 스위스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또 다른 명작 ‘찬디가르(Chandigarh)’ 전문가인 건축가 레미 파피요 교수를 만났다. 그는 올해 17개의 건물이 유네스코에 등록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핵심 건물이 찬디가르임에도 찬디가르 프로젝트 건축 기획이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은 점에 대해 아쉬움을 품고 있었다. “찬디가르를 만들 때 르 코르뷔지에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인도의 기후와 문화였어요.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이 40℃의 열기도 이겨낼 수 있도록 만들었지요. 단지 바람과 그늘만으로 서늘한 공간을 만들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파리16구에 위치한 르 코르뷔지에 아파트(1931~1934)의 이젤을 보며 그가 남긴 말을 상기해본다. “건축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우주의 법칙으로 세운 기하학으로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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