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창조혼과 첨단 기술의 유기적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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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06, 2024

글 고성연

BRANDS & ARTKETING_11 협업의 미학_존 아캄프라×LG OLED ART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 인류에게 ‘예술과 기술의 동맹’이라는 문구는 그리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에 첨단 기술은 요긴한 도구이며, 때로는 창조성을 북돋는 영감의 원천이나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디지털 매체를 활용하는 예술가에게는 두말할 것도 없을 테고 말이다. 기술이 진화하는 속도가 무섭도록 빨라졌기에 그 흐름을 이어가는 주체(기업), 그리고 창조혼을 불사르는 주체(예술가)가 만나 시너지를 내는 협업은 단지 ‘아트 마케팅’으로만 치부하기에는 꽤 의미 깊은 조합이 될 수 있다. 노동의 분화와 서로를 채워줄 수 있는 상호 보완성에 바탕을 둔 ‘유기적 연대’를 떠올리게 하는 면모가 엿보여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이어 글로벌 아트 페어 프리즈 런던(Frieze London)에서도 협업의 미학을 펼친 LG 올레드 아트(LG OLED ART)와 영국 영화감독이자 예술가 존 아캄프라(John Akomfrah)의 만남은 창조적 연대의 흐뭇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예술이라는 키워드 앞에서 기술은 그저 ‘귀한 알맹이’를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식의 비유를 당연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부족한 내용도 빼어난 형식의 틀 안에서 빛을 발하는 경우도 있고, 프레임의 변화가 콘텐츠의 결을 바꾸거나 아예 새롭게 빚어내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불세출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악필이었다고 전해지는데, 당시 새롭게 등장한 발명품인 타자기를 사용하면서 그의 문체가 바뀌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원래는 만연체였는데 다른 도구를 쓰면서 보다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를 구사하게 됐다고 하기도 하고, 본연의 스타일을 잃어 좀 안타깝게 여기기도 한다. 우리는 전·후자의 우위를 알 수 없을 테지만, 적어도 니체는 타자기를 애지중지했다.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둘러싼 오랜 철학적 담론은 차치하고,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을 대표하는 작가인 존 아캄프라(John Akomfrah, b. 1957)도 도구의 중요성을 꿰뚫고 있는 예술가다. 다양한 장면과 기법을 버무려 영상을 만드는 ‘브리콜라주(bricolage)’의 대가인 그는 묵직한 메시지를 담으면서도 서정미를 물씬 풍기는 섬세한 작품으로 ‘영상 시인’으로 불리는데, 다채로운 영역의 인재들과 꾸준히 협업을 펼치는 창조적 연대의 실천가이기도 하다. 영상을 다루는 만큼 그 플랫폼에 관심이 큰지라 다국적 아티스트들과 손잡고 결실을 내온 LG 올레드 아트(LG OLED ART) 프로젝트를 우연히 접하고 먼저 관심을 보인 것도 아캄프라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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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에서의 협업이 프리즈 런던으로 이어진 인연
필자가 아캄프라의 LG 올레드 협업 작품을 먼저 접한 건 지난달 9일 프리뷰 행사로 막을 올린 프리즈 런던 전시장에서다. 마크 로스코의 짙은 레드가 연상되는 강렬하면서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단색조로 온통 수놓은 LG 올레드 라운지에 들어서자 관람 인파로 넘실대던 벽 너머 바깥세상은 의외로 금세 잊어버리고 화면에 시선이 꽂힌다. 은은하게 집중을 도와주는 전시 부스 디자인의 도움도 있지만 아마도 영상 자체의 힘이 크리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해변 백사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여드름이 살짝 나 있는 소녀의 피부까지 자연스러운 생생함으로 담아낸 아캄프라의 작품은 기후변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Becoming Wind(바람이 되어)’(2023)라는 5채널 영상 작업이다. 앞서 독일에서 프로젝트 영상으로 처음 공개되었다가 프리즈 런던에서는 LG 올레드(OLED, 자기 발광다이오드) TV로 선보였다. 라운지에 걸린 5대의 커다란 TV는 알고 보니 세계 최대 올레드 TV라고(대각선 길이 245cm인 97형 ‘LG 올레드 에보(evo)’). 인간에게는 빠르게 움직이면서 되도록 작은 발자국을 남기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되는’ 능력이 있다면서 우리 인류가 지구에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하니, 어째서 그에게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지 이해된다.
런던에 이은 짧은 베니스행에서 전시 홍수 속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 작가로 주목받은 아캄프라의 작업을 우선순위 목록에 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사실 아캄프라는 자신의 분야에서 단단한 입지를 다진 예술가지만 그의 배경을 알면 국가관 대표 작가로 선정된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캄프라는 아프리카 가나에서 일어난 쿠데타로 부친이 사망한 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일곱 살에 영국으로 온 정치 난민 가정 출신이다. 낯선 땅에서도 차별을 겪던 그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민자를 비롯해 차별을 둘러싼 이슈를 다루는데, 격렬한 구호를 외치기보다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모두의 영혼을 보듬는다. 베니스 전시도 5대륙에서 채집한 이미지를 아름답게 조합해 떠돌이들의 삶을 조명한다. 커다란 직사각형 스크린이 파사드를 인상 깊게 장식한 영국관 전시는 최초로 건물 뒤쪽으로 들어가도록 동선을 짰는데, 50개가 넘는 올레드 TV 스크린에 선연하게 담긴 영상은 총 8개 공간에 걸쳐 펼쳐진다. 빨강, 보라, 녹색, 파랑 등 다양한 색의 스펙트럼과 음향, 텍스트를 아우르는 전시는 그야말로 ‘토털 패키지’ 예술이다. “멀티 스크린이 서로 얘기를 나누고 그것을 방해하지 않는 환경이 정말로 필요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스크린이 마주하고 병치되는 구도가 마치 ‘대화의 장’ 같았다. 협업을 아는 고수들의 화음이랄까. 시인 소동파(1037~1101)의 시구에서 따왔다는 이란 제목의 전시를 통해 그는 비난의 목소리보다 ‘그때 우리가 귀 기울이며 들었다면 어땠을까?’라는 ‘능동적인 청취(listening as a form of activism)’를 제안했다. 전시실마다 그가 사랑하는 문화 예술인들과 협업한 흔적을 보는 즐거움, 그리고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는데, 신기하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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