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02, 2025
글 고성연
밀라노의 아트 스페이스, 피렐리 안가르비코카(Pirelli HangarBicocca)
조상이 남긴 눈부신 문화유산과 다채로운 얼굴을 지닌 천혜의 자연 덕에 부러움을 사는 나라를 꼽자면 이탈리아는 둘째 가라면 서럽다 못해 분노를 토해내지 않을까. 누구보다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로마를 비롯해 베니스, 나폴리, 피렌체, 포시타노, 시실리…. 대체 이 아름다운 나라의 어느 도시에 엄지손가락을 들어줄지에 대한 논쟁(?) 역시 만만치 않다. 그렇지만 가장 세련되고 현대적인 도시로서 ‘행사의 메카’라는 수식을 붙일 만한 최적의 도시는 밀라노라는 데 이견을 표하기는 힘들다.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 축제인 살로네 델 모빌레를 비롯해 패션 위크, 엑스포 같은 대형 행사를 펼쳐내는 도시 아닌가. 최근에는 아트 신도 더 풍부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이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대개 분, 초를 다툴 정도로 여정이 빡빡한 행사 기간을 소화하다 보니 정작 버킷 리스트에만 소중히 담아둔 아트 스페이스가 있었다. 마침내 발길이 닿은, 밀라노 외곽에 위치한 피렐리 안가르비코카(Pirelli HangarBicocca). 방대한 면적(15,000㎡)에 펼쳐진 단층 건물과 현대미술의 조화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이 비영리 아트 스페이스는 적어도 당분간은 필자의 ‘최애’로 머무를 듯하다.
밀라노 외곽에 있는 비영리 아트 스페이스 피렐리 안가르비코카(Pirelli HangarBicocca, 이하 PHB) 정원에 있는 파우스토 멜로티(Fausto Melotti, 1901~1986)의 조각 작품. Fausto Melotti, La Sequenza, 1971-81, Installation vie wat Pirelli HangarBicocca, 2024. Courtesy Pirelli HangarBicocca, Milan and Fondazione Fausto Melotti, Milan © Fausto Melotti, by SIAE 2024 Photo by Agostino Os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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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름 키퍼를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피렐리 안가르비코카(Pirelli HangarBicocca, 이하 PHB)라는 고유명사를 처음 접하면 십중팔구는 ‘이게 미술관 이름이라고?!’라는 반응을 보여왔던 것 같다. 피렐리는 타이어 브랜드이자 기업명이고, 안가르는 격납고를 뜻하고, 비코카는 밀라노 외곽의 지역명(Bicocca district)이자 유서 깊은 15세기 빌라 이름이기도 하다. 설립 시점(2004년)으로부터 20주년을 맞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아트 스페이스는 과거 공장 지대를 동시대 미술을 품어내는 커다란 ‘예술 격납고’로 탈바꿈시킨 성공 사례다. 특히 2012년 런던 테이트 모던 출신인 비센테 토돌리가 합류하면서 토대를 다졌는데, ‘성공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이 시대의 걸출한 다국적 작가를 소개하고, 그들이 새로운 시도를 펼칠 수 있는 전시 미학을 실천하면서 미술계의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을 비롯해 누구든 입장료 없이 관람할 수 있어서다. PHB가 추구하는 강령인 ‘make art open and accessible to everyone’과 맞닿은 지점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독일 출신 현대미술가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걸작이 PHB의 한 전시 공간에 영구히 터를 잡고 있기에 늘 기회를 엿보다가 지난가을 드디어 발걸음을 했다.
PHB 야외 공간에 있는 벽화. eL Seed, Waves Only Exist Because the Wind Blows, 2024. Courtesy eL Seed and Pirelli HangarBicocca, Milan, 2024 © 2024 eL Seed / SIAE Photo by Lorenzo Palmieri
이미지 제공_Pirelli HangarBicocca |
PHB의 서점에 있는 전시 도록 모음. Courtesy Pirelli HangarBicocca, Milan Photo by Lorenzo Palmieri |
20년에 걸쳐 진화한, 독특하고 출중한 현대미술의 보금자리
우버 택시를 타고 PHB에 도착하자 건물 윤곽이 보이고 입구에서는 갈대로 뒤덮인 옥외 정원 속 조각 작품이 반겨준다. 밀라노 출신의 조각가 파우스토 멜로티(Fausto Melotti, 1901~1986)가 만든 ‘La Sequenza(Sequence)’(1971~1981)라는 7m 높이의 철제 조각으로 연갈색 정원의 색조와 하늘빛을 배경으로 한 적색의 실루엣이 유난히 눈길을 잡아끈다. 작가의 딸이 기증하면서 2010년 이 정원의 수호신처럼 자리하게 됐다. 안으로 들어서면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키즈 룸과 비스트로, 왕성한 ‘출판력’을 자랑하는 재단에서 펴낸 도록을 볼 수 있는 서점 등이 위치한 홀을 지나, 전시 공간으로 이어지는 동선으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실내 전시는 개인전을 여는 세 공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주로 떠오르는 신진 작가를 소개하는 ‘셰드(Shed)’, 그리고 이를 지나면 PHB의 넉넉한 공간을 활용해 대형 프로젝트를 얼마든지 시원하게 펼칠 수 있는 ‘나바테(Navate)’와 ‘큐보(Cubo)’가 나온다. 현재 셰드에서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영화감독이자 영상 작가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사오다트 이스마일로바(Saodat Ismailova, b. 1981)의 개인전 <A Seed Under Our Tongue>이 열리고 있다(1월 12일까지). 20년에 걸친 작가의 작업 세계에 대한 서베이 성격의 전시로 이탈리아에서 첫선을 보였는데, 중앙아시아의 사회, 정치, 문화를 아우르는 복잡다단한 현실을 시적 정서를 품으면서도 강렬함을 지닌 자신만의 스타일로 풀어냈다. 간만에 설렘을 안겨준 보석 같은 작가다. 주로 미술사에서 인정받을 만한 작가의 회고전을 다루는 나바테에서는 스위스 예술가 장 팅겔리(1925~1991) 전시가 열리고 있다(2월 2일까지). 키네틱(kinetic) 아트로 알려진 그는 폐품을 모아 ‘메타메카닉스’라는 기계 조각을 제작해 현대 산업사회의 물질 문명에서 비롯된 비인간성을 풍자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키퍼’의 공간_독보적인 오라가 느껴지는 영구 설치
여기에서 살짝 더 들어가면, 안젤름 키퍼의 존재감 남다른 영구 설치 작품이 기다리고 있다. 어두운 공간에서 묘한 오라를 뿜어내는 ‘The Seven Heavenly Palaces’(2004~2015)라는 장소 특정적 작업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7개의 기다란 타워 형태의 콘크리트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높이는 13~19m 정도에 이른다. 안젤름 키퍼는 1945년생으로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독일에서 태어나 냉전기를 겪으면서 자란 세대로(1990년대 초반 프랑스로 이주했다) 모국의 참혹한 역사적 기억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아우슈비츠’를 다룬 시를 소재로 삼는다든지 하면서 자민족의 아픈 상처와 인간의 본성을 작품에 담아왔다. PHB에 설치한 작품의 제목도 유대인 신비주의 카발라 문헌인 (The Book of Palaces)에서 차용한 것이다. 키퍼의 작업이 자주 그래 왔지만 이 아트 스페이스에서 더 특별한 이유는 그가 공간의 시작점이었기 때문이다. 비코카 지역의 문화적 재생 논의가 일던 무렵, 재단은 키퍼를 이 부지에 초청했고, 그는 이 기개 넘치는 콘크리트 타워 작업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당시 피렐리의 CEO였던 마르코 트론케티 프로베라는 반색하면서 거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키퍼의 ‘수작 목록’에 오르게 된 영구 설치 작업이자 PHB 공간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당시에는 이 작업을 위주로 작은 전시만 진행하다가 비센테 토돌리가 아티스틱 디렉터를 맡으면서 PHB는 진취적이고 실험적이면서도 심층 이론을 바탕으로 한 기획전, 출판,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진정한 ‘아트 스페이스’로서 성장해오고 있다. 어쩌면 흔한 메세나의 궤도처럼 보여도 그 면면을 살펴보면 다분히 참신하게 느껴지는데, 아마도 사리(私利)에 덜 얽매이는 구도와 현대미술에 대한 진정성 덕분이 아닐까 싶다. 밀라노가 낳은 20세기의 창조적 지성 조 폰티도 흐뭇해했을 만한 ‘공간의 예술화’ 사례다.
1 우즈베키스탄 출신 영화감독이자 영상 작가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사오다트 이스마일로바(Saodat Ismailova, b. 1981)의 개인전 <A Seed Under Our Tongue>이 열리고 있다 (1월 12일까지). Exhibition view at Pirelli HangarBicocca, Milan, 2024. Courtesy the artist © Saodat Ismailova and Pirelli HangarBicocca, Milan. Photo by Agostino Osio
2 사오다트 이스마일로바 개인전 모습. Photo by 고성연
3 PHB에 자리한 독일 거장 안젤름 키퍼의 영구 설치 작품. Anselm Kiefer, The Seven Heavenly Palaces 2004-2015. Courtesy Pirelli HangarBicocca. Photo by Agostino Osio
4 스위스 예술가 장 팅겔리(1925~1991) 회고전 풍경(2월 2일까지). Jean Tinguely, Requiem pour une feuille morte, 1967. Installation view, Pirelli HangarBicocca, Milan, 2024 Collection Fonds Renault pour l’art et la culture, France Courtesy Pirelli HangarBicocca, Milan Jean Tinguely: © SIAE, 2024 Photo by Agostino Osio
※ 1,3,4 이미지 제공_Pirelli HangarBicocca
2 사오다트 이스마일로바 개인전 모습. Photo by 고성연
3 PHB에 자리한 독일 거장 안젤름 키퍼의 영구 설치 작품. Anselm Kiefer, The Seven Heavenly Palaces 2004-2015. Courtesy Pirelli HangarBicocca. Photo by Agostino Osio
4 스위스 예술가 장 팅겔리(1925~1991) 회고전 풍경(2월 2일까지). Jean Tinguely, Requiem pour une feuille morte, 1967. Installation view, Pirelli HangarBicocca, Milan, 2024 Collection Fonds Renault pour l’art et la culture, France Courtesy Pirelli HangarBicocca, Milan Jean Tinguely: © SIAE, 2024 Photo by Agostino Osio
※ 1,3,4 이미지 제공_Pirelli HangarBicoc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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