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하이퍼카 연대기

조회수: 1018
9월 20, 2023

글 김기범(<로드테스트> 편집장)

비평가이자 소설가 존 버거는 ‘실질적인 것’에 해당하는 ‘의식주형 물건’과 자본주의의 조작에 이끌리는 ‘럭셔리’를 구별했다.
자동차는 당연하게도 두 가지 범주를 아우른다.
이미 상향 평준화된 자동차 생태계에서 ‘가성비’ 빼어난 착실한 이동 수단으로 널리 소비되는 한편, 속도에 대한 욕망, 신분 과시, 심미적 희구 등의 다층적 요구를 품은 ‘럭셔리 모빌리티’로서의 존재감 역시 전혀 시들지 않고 있다. 성능, 가격, 희소성 등에서 최상단에 위치한 하이엔드카를 가리켜 슈퍼카라고 칭했지만 요즘에는 이를 뛰어넘는 하이퍼카라는 용어가 부각되고 있다. 하이퍼카의 역사와 전동화의 물결까지 품은 현주소를 들여다봤다. / 편집자 주

1
2
3
시작은 슈퍼카(supercar)였다. 일반 자동차보다 월등히 비싸고 희귀하며 압도적인 브랜드 가치와 성능을 뽐내는 차를 일컫는다. 명확한 기준은 없었다. 상대적 가치였고, 스스로의 주장이었다. 물론 ‘자격’과 관련한 암묵적 합의는 있었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 가속 시간과 최고 속도가 대표적이다. 기술 발전과 더불어 꾸준히 기록을 경신해왔다. 21세기 초까지만 해도 대략 4초 이내, 시속 300km가 필요조건이었다. 그런데 지난 10여 년 사이 변곡점이 찾아왔다. 엔진을 전기모터로 보완하거나 아예 대체하는 ‘전동화(electrification)’의 물결이 밀려오면서부터다. 전동화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친환경이었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범세계적 움직임이 엔진에 집착하던 자동차업계의 등을 떠밀었다. 테슬라의 도발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자극이었다. 노트북용 배터리를 묶는 등의 황당한 고성능을 구현해 비싸게 팔았다. 기존에 자동차의 성능을 높이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였다. 무게를 줄이거나 엔진 배기량을 키우거나 회전수를 높이는 것이었다. 슈퍼카의 특징과 오롯이 겹친다. 하지만 기록 경신은 더뎠다. 결국 엔진을 키워야 하는데, 배기가스 규제는 나날이 엄격해졌기 때문이다.
모험과 자유를 상징하는 이동 수단
슈퍼카의 뿌리는 레이싱카다. 슈퍼카를 ‘합법적인 도로 주행이 가능한 고성능 차’라고 정의하는 배경이다. 자동차는 1886년 카를 벤츠가 특허를 낸 이후 20세기 초까지 모험의 상징이었다. 말과 마부 없이 기차처럼 정해진 궤도에 묶이지 않은 채 자기 의지와 계획대로 장거리 여정에 나설 수 있는 까닭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비행기보다 진입 장벽도 낮았다. 자동차 여행에 대한 인식은 당시 독일 매체 <여행 문화>의 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자동차 여행은 경이롭다. 긴장 가득한 독립 의식, 진정한 비행의 느낌, 비밀 가득하고 오래된 낭만적 지방 도로로의 회귀, 계속해서 변하는 경치의 풍요로움, 이마와 뺨을 스쳐 지나가는 신선한 공기. 이 모든 것이 주는 느낌은 근사하다.’
물론 상응하는 대가도 뒤따랐다. 각종 위험과 고장, 사고를 각오해야 했다. ‘도로의 폭군’을 증오하는 사람들의 테러도 흔했다. 따라서 운전자들은 무기를 소지하기도 했다. 또 여러 불확실성을 뚫고 쏜살같이 달리기 위해 고도의 집중과 몰입이 필요했다. 그래서 ‘자동차 얼굴’이란 표현까지 나왔다. 긴장으로 눈과 귀, 입 주위의 근육이 팽팽히 당겨진, 단호하고 힘찬 표정을 의미했다. 자동차를 운전하며 느끼는 흥분은 매력적이고 중독성이 강했다. 이동의 자유와 속도에 대한 열망은 장단점이 뚜렷했던 초기 자동차 운전조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오죽하면 당시 백과사전은 위생 항목에서 자동차의 효능으로 ‘모든 유기체의 활발한 사용, 신선한 공기로 피부와 폐 기능 강화, 신경계에 긍정적인 작용’을 꼽았을 정도다.
대중과 부자를 겨냥한 두 갈래 진화
자동차는 예상보다 빨리 대중화의 길을 걸었다. 미국에서 헨리 포드가 1908년 내놓은 모델 T의 성공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포드는 시카고의 도매업자들이 소고기를 포장할 때 머리 위에 매달아 쓰는 수레에서 영감을 얻어 컨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했다. 차 한 대에 근로자 여럿이 들러붙어 완성하지 않고, 벨트에 얹어 움직이며 순차적으로 조립하는 방식이었다. 포드는 미국의 공학자이자 경영학자 프레드릭 테일러의 연구를 참고해 동작 소요 시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측정했다. 생산 비용은 줄고 효율이 높아지면서 직원의 임금을 인상하는 동시에 차 가격은 낮출 수 있었다. 모델 T는 1921년 전 세계 신차의 60%를 차지했고, 1927년 단종 때까지 1천5백만 대가 팔렸다. 영국의 오스틴 세븐, 독일의 폭스바겐 비틀 등의 대중차 탄생에 큰 영향을 미친 원조다.
부자들의 욕망을 자극했던 고성능 차 역시 꾸준히 명맥을 이어갔다. 고객에게 브랜드와 기술력을 알릴 기회는 레이스였다. 당시 자동차 제조업체와 레이싱 팀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았다. 주말에 치르는 경주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이름을 알린 다음, 월요일부터 소식을 듣고 찾아온 부자들에게 경주차를 도로 법규에 맞게 개조해서 팔아 돈을 벌었다. 페라리, 부가티, 벤틀리, 포르쉐 등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소위 슈퍼카 브랜드들이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성장해왔다. 모든 면에서 대중차와 정반대 길을 걸었다. 이를테면 소량 맞춤 생산이 기본이다. 일단 시장 자체가 크지 않다. 또 시트의 위치, 가죽의 컬러와 종류 등 고객에 따라 주문 내용이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수작업 공정의 비율이 높다. 가령 메르세데스-AMG는 1기의 엔진을 1명의 장인이 조립한 뒤 명판을 붙인다. 이 때문에 슈퍼카를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1대 만드는 데 몇 달씩 걸리기도 한다. 게다가 ‘과잉’이 미덕이다. 극한의 성능을 내기 위해 값비싼 소재와 고도의 기술력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이처럼 특별한 차를 소유한 사람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해 교류한다.


4

5
전동화의 물결이 닥친 굿우드 페스티벌
매년 6월 말~7월 초, 영국 남부 웨스트서식스주의 해안도시에서 주말을 끼고 나흘간 치르는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Goodwood Festival of Speed, 이하 굿우드 페스티벌)’는 부유층의 자동차 문화를 엿볼 기회 중 하나다. 참고로 굿우드 페스티벌은 협회나 지자체가 아니라, 리치몬드 공작이라는 영국 귀족이자 지역의 부호가 49km2나 되는 자신의 영지에서 주최하는 자동차 축제다. 1948년 9대 리치몬드 공작이 3.862km 길이의 서킷을 개장하며 모터 스포츠와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1960년대 안전 규정이 까다로워지면서 경기 유치가 어려워졌다. 굿우드 서킷 또한 시나브로 존재감을 잃었다. 1993년 11대 리치몬드 공작 찰스 헨리 고든-레녹스(Charles Henry Gordon-Lennox)가 지금의 굿우드 페스티벌을 기획해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원래 그는 굿우드 서킷 행사를 되살리려고 했지만 허가가 여의치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장소를 저택 입구에서 앞마당까지 오르는 9개 코너, 길이 1.86km의 언덕으로 바꿨다. 굿우드 페스티벌의 상징인 ‘힐 클라임(Hill Climb)’ 경주가 태어난 배경이다. 전설적인 경주차와 드라이버, 최신 고성능 자동차를 보기 위해 연간 30만 명의 관람객이 모여든다.
지난 30년 동안 사진과 영상으로만 접했던 굿우드 페스티벌을 취재하기 위해 올해 처음 방문했다. 지명이 암시하듯 굿우드는 가구 장인으로 유명하다. 1998년 BMW 그룹이 롤스로이스 상표권을 인수한 뒤 생산 거점으로 낙점한 배경이기도 하다. 2층 시외버스는 행사장 입구에 쉴 새 없이 가족 단위 관람객을 쏟아냈다. 예매 표를 받는 부스 옆에는 암표상이 득실댔다. 여기까지는 적당히 느슨한 지역 축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행사장으로 들어서면 확 달라진다. 철저한 상업주의를 등에 업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아우르는 최신 자동차 기술을 만날 수 있는 장이 펼쳐진다. 흥미롭게도 20세기를 수놓은 명차들의 기름 냄새와 연기, 폭발음이 작렬하던 굿우드 페스티벌에도 새로운 변화가 스며들고 있음이 포착됐다. 바로 ‘전동화’다. 활발한 전동화의 물결 덕분에 성능이 수직 상승했고, 신흥 강자가 태어나는 움직임도 보인다. 예컨대 현대자동차는 고성능 전기차 아이오닉 5 N을 굿우드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창사 75주년을 기념해 굿우드의 간판 격인 조형물까지 점령한 포르쉐보다 오히려 더 주목받았다. 아이오닉 5 N은 부스트 모드 기준으로 최고 출력 650마력, 최대 토크 78.5kg·m다. 0 → 시속 100km 가속 시간 3.4초, 최고 속도 시속 260km로 슈퍼카 못지않게 빠르다.


6
7
슈퍼카 압도하는 하이퍼카의 세계
하이퍼카(hypercar)는 기존 슈퍼카의 성능을 압도하는 차를 뜻하는 신조어다. 전동화는 성능 인플레이션에 가속을 붙인 주역이다. 크로아티아의 고성능 전기차 회사 리막의 C투는 각 바퀴에 물린 총 4개의 전기모터로 1,914마력을 내고, 0 → 시속 300km 가속을 11.8초에 마친다. 일본의 아스파크 아울은 2,012마력으로, 0 → 시속 100km를 1.9초에 마친다. 물론 엔진만으로 궁극의 성능을 내기도 한다. 이번 굿우드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부가티 볼리드는 W16 8.0L 쿼드터보 엔진을 얹고 1,850마력을 낸다. 그런데 무게는 경차 수준인 1,240kg에 불과하다. 마력당 무게비가 0.67kg으로 말 1마리로 무게 약 반 근짜리 마차를 끄는 셈이다. 0 → 시속 100km 가속 시간은 2.2초, 최고 속도는 시속 501km 이상이다. 하이퍼카의 세계에서는 가격 역시 화끈하다. 브랜드와 차종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30억~50억원대를 너끈히 아우른다. 게다가 대부분 한정판이다. 예컨대 부가티 볼리드는 40대, 아스파크 아울은 50대만 제작한다. 희소성으로 구매 욕구를 자극하고, 브랜드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가격이 치솟는다. 미술품처럼 투자 대상으로도 인기를 끄는 이유다.
8
9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