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탐구하는 창의적 해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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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 2024

글 고성연

<와엘 샤키(Wael Shawky)>_대구미술관

여행을 할 때 익숙함을 제공하는 장소에서 느끼는 반가움과 편안함도 좋지만 가끔은 낯선 환경에서 스스로를 옥죄던 틀에서 벗어나거나 시야를 뿌옇게 하던 렌즈를 깨는 경험은 사고의 각성제가 되기도 한다. 비록 짧더라도 나름 밀도 있게 다른 문화권을 경험할 수 있는 여정도 때로는 그런 선물 같은 시간을 선사한다. 아마도 개인적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관광에서는 별로 느끼지 못했던 자극과 감동을 두바이 문화 예술 기행, 샤르자 비엔날레에서 맞닥뜨린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이집트 국가관을 맡기도 한 와엘 샤키(Wael Shawky)라는 작가를 접하고 차츰 발견하게 된 것도 그런 여정의 수확이었고 말이다. 반드시 해당 문화권에 물리적으로 머물지 않더라도, 전시 콘텐츠만으로도 ‘계기’는 될 수 있다. 그래서 대구미술관 2024년 해외 교류전 작가로 와엘 샤키가 초청됐다는 소식이 유난히 달갑다. 국립현대미술관, 바라캇 컨템포러리 등에서 일부 선보인 적이 있지만 미술관 개인전은 최초이니 ‘역사를 파고드는 해석가’라고 소개하는 그의 창조적 세계를 만나보면 어떨까(2025년 2월 25일까지).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다. 얼마든지 이긴 자들의 입맛에 맞게 뒤틀리거나 과장, 혹은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이집트 출신 작가 와엘샤키(Wael Shawky, b. 1971)는 승자의 왜곡을 직접적으로 꺼내지는 않더라도 “기록된 역사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어디까지나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닌가”라는 질문을 품은 채 역사를 들여다보며 새로운 시각의 해석을 시도한다. 와엘 샤키의 작품을 유럽 미술관이나 비엔날레에서 접했을 때도 느꼈지만 여기서 우리는 어쩌면 상당히 편향된 관점이나 세계관을 저도 모르게 품게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볼 법하다. 유럽인이 자기들에게 가까운 쪽을 근동, 먼쪽을 중동, 극동이라고 부르는 표현법을 그대로 쓰고 있지 않은가. 물론 자신의 문명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고를 무조건 힐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중동이 역사의 중심을 달리해 스스로를 ‘중양(中洋)’이라고 부르는 세계관도 존재한다는 다양성의 구도를 무게중심을 유지하면서 바라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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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엘 샤키는 스스로에 대해 ‘어떤 주제에 신선한 창의성을 불어넣는 식으로 그저 (연구를 하고) 해석을 하는 사람(translator)’일 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주입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물론 이집트 우라비 민중 혁명을 와해시킨 영국군의 폭격을 둘러싼 서사를 담은 <드라마 1882>를 선보인 베니스 비엔날레 이집트관의 사례처럼 ‘해석의 가능성’을 위한 이슈 제기는 한다). 해석은 완벽하지 않기에 변할 수도 있다는 전제를 깔고 말이다. 그렇게 정교하게 재구성하고 창의적 해석을 덧댄 작품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는 회화, 드로잉, 조각, 설치,음악 등 다양한 매체를 다루는데, 이런 요소들이 특유의 스타일과 감성으로 버무려진 ‘영상’이야말로 그의 예술 세계를 담아내는 총체적인 그릇이 아닌가 싶다. 영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온 이집트 문화 예술계의 계보를 잇고 있는 총아답다. 대구미술관이 처음으로 영상 분야의 커미션 작업으로 함께한 와엘 샤키의 신작 영상 <러브 스토리> 시리즈에서도 볼 수 있지만 신비롭고 색감 고운 배경에 특유의 인물을 ‘반전’ 처리한 영상에는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서정시’ 같은 심미적 오라가 있다.
그런데 반전 필름을 사용하는 방식도 그렇지만, 이번 대구미술관 전시에도 선보였듯 전문적인 연기를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을 배우로 쓴다든지(<알 아라바 알 마드푸나 I>), 세라믹 도자기 인형 탈을 쓴 배우들을 등장시킨다든지(<나는 새로운 신전의 찬가>) 하는 그만의 방법론은 사실 명확한 의도를 담은 결과물이다. 사람의 얼굴이나 표정 대신 스토리와 주변 풍경에 집중하도록 만든 일종의 장치로 사용된 것이다. 실제로 역사와 신화, 허구와 실재를 넘나드는 폭넓은 주제와 고문헌에서나 볼 수 있는 난해한 용어를 감안하면 관객들은 그가 빚어내는 화면에 집중을 꽤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의외로 우리 전래 동화와 구전설화(<누에 공주>, <금도끼, 은도끼>, <토끼의 재판>)를 판소리로 재해석한 작품인 <러브 스토리>보다 고대 이탈리아 도시 폼페이를 배경으로 한 신화 얘기를 담은 55분짜리 영상 작품 <나는 새로운 신전의 찬가>를 끝까지 보는 관람객이(어린아이들까지) 은근히 많았는데, 이런 몰입은 와엘 샤키가 말했듯 결국 인류의 삶에는 초국가적 정체성과 여러 문화를 관통하는 보편성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그에게 ‘타 문화를 잇는 연결자’라는 수식어를 하나 더 붙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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