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없이 있던 것 (Ce qui fut sans lumiè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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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07, 2025

글 고성연

기획전_김리아갤러리(Kimreeaa Gallery) X 스타일 조선일보


2025년 봄 한가운데, 김리아갤러리에서는 이은영, 오다교, 박예림 등 3인의 작가와 함께하는 기획전 <빛 없이 있던 것>이 펼쳐집니다(2025. 4. 25~ 5. 24). 자연, 시간, 존재와 같은 추상적 개념을 저마다의 조형 언어로 꾸준히 버무려온 세 작가는 ‘흙’을 느슨한 공통분모로 지닌 채 자신만의 영감과 호흡으로 온전히 공간을 채우면서도, 전시 풍경을 전체적으로 보노라면 마치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된 반짝이는 대화의 고리처럼 유기적 공감대가 은은하게 엿보입니다. 이는 작가들의 부단한 창조적 여정이 인간이 본능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진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의 본질에 가까이 가려는 ‘몸짓’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물의 보이는 면은 그저 하나의 단면일 뿐이고 흩어지는 심상으로 점철된 우리네 기억은 결코 완전하거나 순수한 회상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자신들이 마주한 어떤 순간에서 비롯된 무형의 감각과 추억을 바탕으로 형상을 빚어내려는 몸부림에 다름 아닙니다. 안쓰럽도록 무한히 되풀이되는 존재의 근원을 향한 꿈과 회상을 주제로 삼은 프랑스 시인 이브 본푸아(1923~2016)의 시집 <빛 없이 있던 것(Ce qui fut sans lumière)>에서 이번 전시 제목을 가져온 배경이기도 합니다. ‘현존(présence)의 시인’이라는 수식어를 지녔던 이브 본푸아는 사물의 심층에 닿을 수 없는 회상의 무력함에도 ‘현재’의 어느 순간에 순수하게 다다르고자 애쓰는 ‘오래된 꿈’을 노래하며 시 안에서 자신의 몸짓을 이어나갑니다. “존재의 심연을 단순히 꿈꾸는 대신, 행동으로 실천하고 상상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시인처럼 이은영, 오다교, 박예림은 영원을 향해 거듭나는 ‘찰나’를 시공간에 조각하듯 창조적 모색의 몸짓을 펼쳐나갑니다.


바람이 단숨에, 저 아래, 닫힌 집 위로 휘감아 올린 그 추억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을 거쳐 나온 화포의 커다란 소음,
지금 막 색채의 직물이 사물의 바닥까지 찢어진 듯하다. 추억은 멀어져가다 되돌아온다. _이브 본푸아(Yves Bonnefoy)의 시 ‘추억’ 중에서



이은영 Eun Yeou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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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갤러리 1층 전시 공간에서는 천장부터 부드럽고도 강렬하게 드리운 천에 목탄으로 그린 설치 작품이 차분한 존재감을 발하는데, 시적 은유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작업해온 이은영 작가의 신작 ‘소음의 팽창’입니다. 이 작업을 지나쳐 다다르는 한쪽 벽에 걸려 있는 도자 작업 ‘아주 짧은 산책길에 본 얼룩들’과 재미난 조화를 자아냅니다. “결국 개념의 끝에 남는 것은 이미지인지, 이미지가 불러오는 텍스트인지 모르겠지만, 부산물이 사라지고 남은 이미지와 텍스트, 재료적 감각의 형식을 이어보고 싶었습니다. 재료와 형태가 ‘낱말’이 되어, 작품은 시 전체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문장’을 만들어내고, 공간에 놓여 ‘조형시’가 됩니다.” 한때 존재했으나 사라진 것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관찰하고, 이 과정에서 비롯된 심상의 정수를 조형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이은영은 회화를 전공했지만 가장 드로잉적인 재료라고 느낀 흙을 주재료로 사용하며 입체 작업을 자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녀의 가마를 거쳐 나온 도자 작업들이 조형시의 ‘낱말’처럼 1층의 또 다른 공간을 아기자기하게 수놓고 있습니다. “재료를 만지며 감각하는 동안 머릿속 이미지가 변화하고, 그에 따라 작품의 형태도 바뀝니다”라는 작가의 설명은 예술에서 ‘진실’은 사용하는 재료에 대한 신의를 뜻한다는 문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박예림 Yelim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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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주 전시 공간에서는 박예림과 오다교의 작품이 서로 마주 보면서 흥미로운 앙상블을 선사합니다. 두 작가는 같은 물성의 흙과 모래로 빚어낸 커다란 평면 작업을 선보였는데, 저마다의 결이 실린 존재감을 뿜어내는 설치 풍경이 절로 시선을 잡아끕니다. 2024년 마지막과 2025년 시작에 걸쳐 산행을 즐긴 박예림 작가는 이번 전시에 ‘겨울’을 담아낸 작업을 내놓았습니다. 작가 이력의 초기부터 쓴 재료인 모래는 알갱이가 모여 단단한 암석을 이루기도 하고, 솟아오르는 물줄기가 되기도 하고, 과거의 시간을 가져오는 바람이 되기도 했는데, ‘겨울’의 희뿌연 산을 통해서도 다채로운 변주를 이어갑니다. “겨울의 모습은 늘 가까이 있지만 복제하기 쉽지 않은 대상인 것 같습니다. 금방 쌓이다 녹아버리고, 살갗을 스쳐 지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되어 맺히지요. 빠르게 변주하는 특성을 형상화하는 데 집중했고, 이러한 자연의 표면적 형상과 더불어 산행을 하면서 생겨난 이야기도 함께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서리(Hoarfrost)’, ‘흰 막이 닿는 자리’, ‘아침에 뜬 겨울’ 같은 제목의 서늘하고도 다정한 느낌을 품은 작품이 탄생한 배경입니다. 모래 알갱이들이 붙고 떨어져나간 흔적, 먹을 머금은 장지 뒷면의 표현, 소금으로 피어난 형상 등 우연히 생겨난 모습이 겨울의 일면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줬다는 작가의 설명처럼 자연의 신비는 화가의 몸짓과 만나 화면에 순간의 인상과 감각을 붙잡아두는 마법을 부리는 듯합니다. 눈에 덮인 반투명한 지대, 소원을 빌기 위한 발걸음, 정상으로 안내하는 무리 속 깃발 등 작가가 접했던 곳곳의 모습을 다시 꺼내 시간과 기억의 흐름을 비구상적으로 담아낸 이 시적인 시리즈는 작가가 고민을 살짝 두고 올 수 있었다던 겨울 산행을 둘러싼 감각과 경험,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상상하게 만들고, 어느덧 사색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오다교 Dakyo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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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물성을 살린 탐스러운 질감과 도톰한 덩어리감이 화면을 감싸는 작업으로 자연의 무궁무진한 스펙트럼과 깊이를 탐구해온 오다교 작가는 작고한 이브 본푸아의 새로운 시집을 보는 듯한 작품 목록을 내밉니다. 장지에 모래와 숯을 재료로 쓴 ‘빛 없이 있던 것’이란 제목의 작품을 비롯해 ‘꿈의 미광’, ‘어떤 돌 하나’, ‘오늘 저녁보다 많은 빛’ 등 신작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흙으로 작업하게 된 계기는 일상의 한 순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어느 날 원형 화분의 흙을 유심히 보다가 그 안에서 모든 생명이 탄생하는 우주를 만나게 되었고, 이 조우는 흙의 방대한 에너지와 상징적 깊이를 탐구하는 작업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특히 오다교 작가는 자신의 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자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는 흙 특유의 질감과 촉각을 작업에 짙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 은은하고도 역동적인 조화를 통해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며 만물에 방대한 영향을 미치는 땅의 엄청난 에너지입니다. 구체적인 계획 아래 움직이기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주시하며 그에 대한 반응에 예민하게 깨어 있으려 한다는 오다교는 ‘흙의 미학’을 이렇게 말합니다. “땅의 에너지는 우주의 텅 빈 공간이 지닌 힘과 닮았고 서로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흙이라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재료로 가장 위에 있는 우주를 표현했을 때, 그것이 결국 같은 모습이 되는, (궁극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2층의 또 다른 전시 공간에서는 스케일이 상대적으로 ‘작은’ 세 작가의 작품이 어우러집니다. 존재의 근원을 떠올리게 하는 대지에서 비롯된 물성을 조형 언어로 삼지만 전혀 다른 창조적 소산으로 빛을 발하는 이들의 작업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공간입니다.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신념이고, 나아가 예술에 대한 신념이라는 한 문학가의 절도 있는 문장이 떠오르는 전시 풍경입니다. 그리고 그 신념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 감각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말을 가만히 곱씹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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