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뿌연 화면 속에 육중한 몸집의 배가 등장한다. 핀란드 연안의 꽁꽁 얼어붙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쇄빙선. 배 앞에는 검은 실루엣의 남자가 홀로 걷고 있다. 무심히 얼음을 깨부수며 움직이는 쇄빙선의 뱃머리보다 겨우 몇 걸음 앞서 있는데, 일정 거리를 두고 망원렌즈로 촬영한 이 영상에서 인물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힘겨워하는 듯 느껴진다. 그래도 터벅터벅 행보를 멈추지 않고 전진하는 사람은 작가 자신이다. 느린 듯 무감각하게 뒤따라오는 배를 등지고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 것 말고는 별다른 변화 없이 10분 10초가 흐르는 영상의 제목은 ‘Nummer Acht(No. 8), everything is going to be alright’(2007).
●● ‘망망대해의 부서지는 얼음 위에서 위태롭게 걷는 사람’은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듯, 대자연과 기술에 둘러싸인 채 분투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인간의 조건’에 대한 광범위한 사색을 해온 휘도 판 데어 베르베는 특유의 관조적인 시선으로 일종의 모험을 곁들인 ‘스펙터클’을 시적으로 버무려낸다. 대개 무모할 정도로 스스로에게 시련을 주거나 안간힘을 쓰며 한계에 도전하는 모험이다. 거대한 힘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연약한 인간의 투쟁은 숭고미를 느끼게도 하지만, 서사 속 영웅 같은 기개는 묻어나지 않는다. 모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덮칠 듯 따라오는 쇄빙선 앞을 걸으며 자신의 발 앞에서 얼음이 쪼개지는 것을 보거나 24시간에 걸쳐 북극에 서서 추위를 견뎌내려 애쓰는, 매번 검은색 옷을 입고 등장하는 주인공은 ‘스스로 부과한 중압감에 시달리며 세상을 홀로 떠맡는 존재’일 뿐이다.
●●● 자연을 내려다보는 인간 중심적 근대성에서 벗어난 작가는 원대한 꿈을 품은 채 달려가는 ‘수고로움’에 대한 찬사를 건네거나 자잘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저 담담히 지켜본다. 자신이 직접 만들어내기도 하는 클래식 음악과 퍼포먼스, 진지한 표정으로 구사하는 데드팬(deadpan) 유머를 접목하는 그의 영상 작업은 노력의 무의미함을 얘기하지만, 외려 그게 위로가 되는 것도 같다. 어쩐지 무의미를 말하면서도 지독한 회의나 냉소를 뿜어내지는 않았던, 건조하지만 부드럽고 따스한 시선을 지녔던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이다.
글 고성연(<스타일조선일보> 아트+컬처 총괄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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