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Mending
고약한 바이러스가 세상을 휩쓸지 않았더라도 인간에겐 치유가 필요하다. 욕망이 커서든, 분노가 터져서든, 우울이 깊어서든 저마다 고단한 삶의 순간을 견뎌내고 있기 때문이다.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란 존재하기 힘들지만, 각자의 아픈 부위나 치유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치유를 바라보는 미술의 시선도 다채롭다. ‘고독의 위로’ 같은 일상 산책에서 건진 ‘몰입’의 산물을 그림으로 녹여내기도, 자연과의 공존을 앗아가는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을 강렬한 디지털 영상에 담아내기도 하며, 역사적 비극이 개인의 트라우마로 이어진 애달픈 상흔을 과거와의 연결 고리를 통해 보듬는 작업을 애니메이션으로 선보이기도 한다. 또 원대한 꿈을 향한 인간의 야망 어린 몸짓과 그 같은 노력의 무의미함을 아름답게 풀어내는 ‘영상 시인’도 눈에 띈다. 4인 4색, 그 치유의 여정을 따라가보자.
● 독일어 ‘waldeinsamkeit(발트아인잠카이트)’는 번역하기가 까다로운 단어다. 이는 숲속에 홀로 있는 듯한 감정을 의미한다(‘wald’는 숲, ‘einsamkeit’는 고독으로 번역한다) 자연에 안겨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린다는 의미다. 이는 어떤 상태를 비유적으로 묘사하는 단어지만 독일인들은 “나는 푸른 waldeinsamkeit 속으로 사라졌어”라고 말할 때 마치 실재하는 장소가 있었던 것처럼 이 단어를 사용한다. 압도적이고 경이로운 어떤 것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본질적으로 온전하게 해석할 수 없는 오롯한 ‘숭고’의 경험처럼, 이는 독일 낭만주의 전통에서 유래한 다른 감각에 반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 삼림이 빈우혁에게는 불안함의 근원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베를린에서 생을 마감한 유명한 그림 형제의 우화인 <그림 동화>를 생각해보자), ‘waldeinsamkeit’는 회복적 상태를 의미한다. 스스로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되레 불안감이 사그라든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작가에게 베를린의 공원과 숲을 거닐고 탐구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그 그림은 더 많은 산책을, 더 많은 산책은 또 더 많은 그림을 낳았다. ‘베를린 풍경’ 시리즈가 된 작품은 전적인 몰입의 결과물이다. 아마도 이것이 그의 회화 자체가 확장적이고 몰입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 어쩌면 빈우혁 회화의 기저에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스스로를 찾기 위해 자신을 잃어버리는, 어딘가 잘못된 의식의, 혹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본질이 다른 여러 가지에 대한 방향감각을 상실하는 양가적인 즐거움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결국 가장 좋은 예술이 아닌가?
글 에이미 셜록(Amy Sherlock, 미술 비평가·<프리즈 매거진> 부편집장)
2 ‘Sanctuary 104’(2021), 리넨에 유채, 160 X 190cm. 이미지 제공_갤러리바톤
1,2 서울 한남동에 자리한 갤러리바톤에서 오는 7월 23일까지 열리는 빈우혁 개인전 <프롬나드(Promenade)> 출품작들.
3 ‘Weißenseer Park 66’(2017), 캔버스에 유채, 193 X 259cm. 이미지 제공_갤러리바톤
[ART + CULTURE 2021 Summer SPE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