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도 큰 존재감을 품은 페어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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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04, 2024

글 고성연

아트 컬래버레이션 교토(Art Collaboration Kyoto) 2024

오랫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는 흔히 ‘천 년 고도’라 불릴 만큼 오래된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도시다. 찬란한 문화유산과 전통을 무수하게 품은 고아한 미가 워낙 강렬해 사시사철 찾고 싶어 하는 방문객이 많다. 물론 우리는 그저 오래되었다고 해서, 혹은 희소하다고 해서 다 좋아하지는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교토는 일본 문화 특유의 과거에 대한 존중이 잘 반영되는 도시지만, 동시에 그 콧대 높은 자존심을 맞춰주듯 현대성 역시 과하지 않게, 별 티를 내지 않는 세련된 방식으로 품고 있다. 현재의 교토를 살아가는 이들이 현대미술을 대하고 풀어내는 방식도 ‘교토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아트 페어의 현장을 보며 도시의 고유성과 전시 디자인의 미학을 짚어보게 된다. 올해로 4회를 맞이한 아트 페어로 가을의 한자락을 수놓은 아트 컬래버레이션 교토(Art Collaboration Kyoto) 얘기다.
프리즈 서울의 등장을 비롯해 팬데믹 기간에는 아시아의 미술 지형에 변화의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일본도 빠질 수 없다. 3년 전 가을 ‘소프트 론칭’을 시작으로 해마다 도쿄 곳곳에 있는 여러 미술 공간을 다닐 수 있도록 전용 버스와 앱을 제공하는 쇼케이스형 축제인 ‘아트 위크 도쿄(AWT)’가 열리고 있고, 같은 해인 2021년 교토에서도 일본 갤러리가 해외 갤러리와 짝을 지어 하나의 부스로 참가하는 흥미로운 발상의 아트 페어가 생겨났다. 어느새 교토를 대표하는 글로벌 아트 페어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아트 컬래버레이션 교토(Art Collaboration Kyoto, ACK)’다. 어쩌다 보니 매년 AWT를 찾았던 필자는 그동안 교토 → 도쿄로 이어지는 행사 일정을 소화한 이들로부터(내년에 ACK는 11월 중순으로 날짜를 옮긴다) 늘 ACK 얘기를 듣고는 궁금해하다가 올해 처음으로 현장에 가게 됐다(퍼블릭 데이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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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신선한 플랫폼의 등장, 그리고 교토라는 도시 브랜드의 위력
교토는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외곽에 위치한 국제 컨퍼런스 센터(ICC Kyoto)에 자리한 ACK 전시장은 첫 행보였다. 컨퍼런스 센터는 어디를 가나 크게 새로울 게 없다지만 한적한 동네에 초록이 짙은 배경을 둔 ICC 입구는 초면에도 살짝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운치 있게 천막을 두른 통로를 따라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는데 첫눈에 반했다. 프리뷰 첫날(10월 31일)이라 복작대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각각의 부스를 화이트 큐브 일색이 아니라 격자형 창살 같은 ‘오픈형’ 나무 프레임으로 두른, 전형성을 벗어난 전시 디자인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지점에서 고백하자면, 이러한 ‘반가운 발견’은 공간이든 전시든 작품이든, 우연히 접하는 건 어쩔 수 없다 해도 굳이 ‘이미지 정보’를 미리 찾아보지는 않는 성향의 순기능일지도 모르겠다. 이미지로 현혹하고 또 현혹당하는 이 시대에 되도록 포섭되지 않고 선입견을 차단하려는 의지와 게으름이 섞인 습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덕분에 때때로 남들은 다 아는 풍경을 오롯이 새롭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협업 정신이 모든 것(collaborative spirit is everything)!’이라고 당차게 강조하는 ACK 프로그램 디렉터 야마시타 유카코(Yukako Yamashita)의 말처럼 페어가 내세우는 키워드는 ‘협업’이다. 전 세계 24개 도시(18개 국가/지역)에 걸친 69개 갤러리가 참가했는데, 여기에는 일본에 기반을 둔 27개 갤러리가 ‘호스트’ 자격으로 초청한 29개의 ‘게스트’ 갤러리(하나의 호스트 갤러리가 복수의 게스트를 초청할 수도 있는 구조)를 더한 56개가 포함되어 있고(호스트-게스트는 하나의 부스를 선보인다), 교토와 인연을 맺은 갤러리가 단독 부스를 차리는 ‘교토 미팅(Kyoto Meetings) 섹션에 나온 13개 갤러리도 추가됐다. 올해 ACK를 찾은 한국 갤러리로는 지난해 게스트 갤러리로 나왔다가 이번에는 교토 미팅 섹션에 참가해 월등한 판매 실적을 올린 조현화랑(부산)을 비롯해 도쿄 갤러리 아노말리(Anomaly)와 청두 기반의 갤러리 어 사우전드 플라토 아트 스페이스(A Thousand Plateaus Art Space)와 짝을 지은 N/A(서울), 그리고 도쿄 갤러리 CON_과 함께 부스를 차린 WWNN(서울)이 있다. 사실 엄연히 작품을 판매하는 상업 페어임을 감안할 때는 ‘협업’이 자칫 이상적인 구호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갤러리 비즈니스나 그 장터인 현대미술 페어가 꼭 서로를 갉아 먹는 경쟁 구도로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새겨둘 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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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업’ 정신과 영민한 전략이 묻어나는 ‘열린’ 디자인
갤러리업계의 ‘동료’들이 손을 잡는 협업이라는 키워드도 그렇지만, 각각의 부스가 합판과 철제 지지대로 만든 온기 어린 감성의 프레임 사이로 작품들이 열린 방향에서 보이고 이 사이를 흐름에 쓸리듯 이동하며 감상하는 구조가 윈-윈을 소구하는 페어와 결을 맞추는 듯한 전시 설계도 인상적이었다. 가로, 세로가 칼같이 짜인 배열이 아니라 중간중간 좁은 통로와 널찍한 공간도 아우르는 살짝 미로 같은 동선이라 의외로 나름 역동적인(?) 전시 탐험을 즐길 수 있다. 건축가 다카시 스오가 설계를 맡았다는 ACK의 전시 디자인은 ‘열린 협업’이라는 키워드와도 잘 맞아떨어지지만 크지 않은 페어의 규모와 더불어 입이 벌어지는 고가의 작품을 자주 내놓는 메가 갤러리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참가 갤러리 명단에도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트 바젤이나 프리즈 페어에서 자주 접하는 구미의 명성 높은 갤러리와 일본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갤러리의 이름은 보이지만 아무래도 개성 있는 자국(일본)의 중소 갤러리가 더 많이 눈에 띄고 대형 고가 작품보다 중저가 소품이 전시 작품의 주를 이룬다. ‘호스트-게스트’라는 특유의 구도가 어느 정도는 하나로 브랜딩하는 효과도 있는 상황에서, 여러 방향으로 동선이 ‘열린’ 전시 디자인은 페어 방문객들이 새로운 발견을 하도록 유도하고, 업계의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소통과 교류를 하는 ‘우연한 충돌’을 염두에 둔 영리한 설계라고 느껴진다. 실제로 필자에게는 이미 익숙한 이름인 실력파 갤러리 가오코유키(도쿄)와 상파울루 기반의 멘데스 우드 DM 갤러리, 타로 나스(도쿄)와 매슈 마크스 갤러리(뉴욕), 유미코 지바 어소시에이츠(도쿄)와 카스텔리 갤러리(뉴욕)의 협업 등도 눈여겨봤지만 도쿄 갤러리 쇼 + 1(Sho + 1)이라든가 교토 기반의 카네게(Kanegae) 갤러리가 가장 즐거운 발견이었다. 폐가전 등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어번 마인드’에 입각한 진취적이고 재치 있는 작품을 내놓은 카네게의 경우에는 ‘연필로 그렸다고 믿기 힘든 세밀화 같은, 비인간적인 수준의 기술(inhumane skills)’을 지닌 다양한 작가들에게 관심 있다고 하는데, 교토 시내에 있는, 공예를 병치한 전시 공간도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아직 젊은 페어지만 ACK 참가를 원하는 갤러리들의 러브콜이 곳곳에서 쏟아지고 있다는데(미술 시장은 하향세지만 ACK의 경우 참가 신청이 35% 증가했다고), 그래도 주최 측은 참여 갤러리 수를 70개 이상으로 확대하지 않고 ‘작은’ 페어의 미학을 유지하겠다는 방침이다. 확실히 페어의 규모가 크지 않은 데다 전시장 곳곳에 조각과 설치, 그리고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의 영상 작업을 감상할 수 있는 ‘퍼블릭 프로그램’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어 ‘발품’을 파는 피로감을 덜어준다. 어차피 페어 규모는 유지하되 공공 미술 프로젝트를 비롯해 아예 전시장 바깥에서 열리는 장외 전시 콘텐츠로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은가(이미 정원을 낀 고택이나 사찰 등 교토만의 로컬리티를 활용한 장외 전시가 갈수록 보폭과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협업’이라는 사랑받는 키워드를 다면적으로(기관-민간의 협업, 상업 브랜드와 미술계의 협업 등) 유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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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셉트의 명확한 장단점, 어떻게 진화해나갈 것인가?
물론 어느 일에나 그렇듯 당장은 우려가 되는 한계점도 보인다. “교토라는 도시도 그렇고, 호스트-게스트라는 콘셉트와 구도도 분명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계속 지속될 수 있는 모델인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업계 관계자의 말처럼, 적어도 ‘게스트’는 매번 달라지는 현 구도라면 타 아트 페어처럼 꾸준한 참가를 유도할 수 있을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또 전혀 다른 지리적 배경과 성장 과정을 거쳤는데 아주 잘 어울리는 경우도 있지만 호스트-게스트의 ‘합’이 어색한 경우도 더러 눈에 띄었듯, 주제나 물성, 색감 등으로 엮는 ‘짝짓기’ 구성이 언젠가는 힘겨워지는 모습도 예상할 수 있다. 이를 상쇄하기 위한 역할을 단독 부스로 꾸리는 ‘교토 미팅’ 섹션이 어느 정도 해주고는 있지만, 차라리 이 섹션이 주가 되고 다양한 협업을 꾀하는 여러 섹션을 두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들린다. 글로벌 미술 거점으로서의 더 나은 성장과 진화를 위한 모색은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틈틈이 도시 산책을 하다 보니 이 협업이라는 그럴듯한 키워드를 둘러싼 진짜 주인공은 ‘교토’라는 생각이 스친다. 아직은 현대미술 시장 규모가 작다지만 전통이 남다르고, 취향과 자금이 있는 컬렉터들이 배경에 있으며, 도시 자체의 팬이 부지기수로 많은 교토, 이 매혹적인 도시를 위한 창의적 협업이라면 누가 쉽게 마다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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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작고도 큰 존재감을 품은 페어의 미학 아트 컬래버레이션 교토(Art Collaboration Kyoto) 2024 보러 가기
02. 시간을 멈추게 하는, 천 년 고도 속 공간의 마법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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