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자신을 굳이 드러내길 원하지 않고 우리 사회와 조직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소금’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소중한 일꾼들이 있다. 자기 PR이 강조되는 요즘 시대에 은은하게 빛나는 숨은 능력자들이다. 한 작가는 “진짜 전문가들은 스스로 그림자 속에 숨어 있기도 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며 대중이 모르는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기여하는 인재를 가리켜 ‘투명 인간’이라 지칭하기도 했다.‘빛’이 반짝이도록 뒷받침해주는 투명 인간들의 가치를 기억하고, 그런 인재가 ‘조용히’ 만개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소설가 성석제의 신작 <투명 인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되고 도태되어가는, 그래서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한 남자의 비정한 현실을 다룬다. 한 언론사와 나눈 인터뷰 속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존재가 초처럼 닳아버린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고. 이 작품은 허버트 조지 웰스의 SF 소설 <투명 인간>(1897)을 절로 떠올리게 한다. 인체에 화학 처리를 해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초인이 된다는 설정은 과학적 오류에 대한 지적도 받았다지만 착상 자체가 기발한 데다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은 소설이다. 무려 1세기도 더 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주인공이 자신의 ‘투명 파워’를 이용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소외된 인간의 고독을 다뤘다는 점에서는 성석제의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맞닿는 맥락도 살짝 품고 있다.
흥미로운 건 ‘투명 인간’이라 하면 대부분 부정적인 연상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존재감이 별로 없는, 사회나 조직에서 있으나 마나 한 취급을 받는 잉여 인간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분명 타인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욕망,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데 대한 불안감이 동시에 존재하며, 이렇게 상충된 감정들은 한 영혼 안에서 빈번히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 같다. 이러한 욕구들의 조합과 갈등의 강도에도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테고 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세인의 시선을 갈망하는 이들과 자신의 일에 대해서 인정은 받되 화려하게 주목받는 것은 원치 않는 이들도 있다. 최근 후자의 사례들을 심층적으로 다룬 책이 꽤 흥미롭게 다가온다.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는 작가이자 강연가인 데이비드 츠바이크가 집필한 <Invisibles: The Power of Anonymous Work in an Age of Relentless Self-Promotion>이란 작품이다.
우리 사회의 ‘숨은 능력자’에 초점을 맞추는 이 책은 그런 인재들을 가리켜 ‘투명 인간’이라 지칭한다. 자신의 분야에서는 나름 빼어난 전문 역량을 갖췄지만 굳이 이름을 널리 알려 대중의 눈길을 끌거나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업계나 조직의 과도한 관심을 받길 꺼린다는 점에서 얻은 별칭이다. 앞서 언급한 소설들이 풍기는 고전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존재감이 없어서가 아닌 것이다. 너도나도 자기 PR을 극성스럽게 해대며, 그런 풍조를 옆에서 부추기는 시대라지만 우리 주변에는 분명히 화려한 조명을 마다하며 자신이 할 일에만 묵묵히 집중하는 탁월한 일꾼들이 더러 눈에 띄지 않는가? 실제로 츠바이크가 전 세계를 누비며 인터뷰한 결과에 따르면 이런 투명 인간 유형의 사람들이 건축업계뿐만 아니라 실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대개 ‘간판’으로 부각되는 건축가의 그림자에 가려 있지만 고도로 복잡하고 규모 있게 설계되는 건축물들의 토대를 다지는 필수적인 인력인 구조 공학자, 저명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악기를 손보는 피아노 기술자, 스타 작가를 발굴하는 출판사의 능력 있는 편집자, 이름을 앞에 내세우지 않지만 높은 수준의 감정이입으로 필력을 휘두르는 대필 작가, 명품 향수를 만들어내는 조향사 등 그 면면이 꽤나 다채롭다. 지위의 고하도 크게 상관없지만, 투명 인간 중에는 자기 분야에서 정상급에 자리하고 있는 경우도 꽤 많다. 기업의 CEO라고 해도 미디어에 항시 노출되며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유명세를 타는 데 대한 반감을 갖고 웬만하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활동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츠바이크가 세계적인 경영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소개한 대표적인 투명 인간의 예는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브랜드 네이밍과 아이덴티티(BI) 전문가로 활약했던, 지금은 고인이 된 마이클 크로난(Michael Cronan)이란 인물이다. 아마존의 전자책 리더(reader)기에 ‘불을 지피다, 자극하다’라는 뜻의 ‘킨들(Kindle)’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TV 프로그램을 녹화하는 디지털 비디오 리코더의 상표명 티보(TiVo)을 만들어낸 크로난은 이처럼 뛰어난 작명 실력으로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인정받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누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PR에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이런 유형의 일꾼들에게 중요한 건 유명세가 아니라 ‘일을 즐기는 것’이고, ‘나’보다는 ‘우리’를 강조하는 성향이 짙으므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쓸데없는 관심은 업무에 방해가 된다고 여긴다. 그렇다고 무작정 ‘인정’을 꺼리는 건 아니다. 츠바이크는 투명 인간들이 지닌 공통적인 특징으로 자신이 책임을 지는 일을 진정으로 즐긴다는 점, 일 처리를 꼼꼼하게 하는 완벽주의자 성향을 지녔다는 점, 그리고 인정에 대한 이중적인 욕구를 꼽았다. 남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건 꺼릴지라도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받고자 하는 감정이 공존하는 ‘양가감정’을 품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정’이라는 단어에는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성과 덕분에 ‘자신’이 주목을 받는 게 아니라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일’ 자체로 얻는 내적 보상이야말로 이들이 원하는 ‘인정’의 증표라는 점에서다. 다시 말해 이들에게는 자신이 좋아하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지평을 확장하고 기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보상책인 셈이다.
물론 이러한 ‘투명 인간적’ 성향은 상당 부분 타고나는 것이다. 세상에는 TV 스타나 영화배우가 아니더라도 명성을 추구하고, 타인의 선망과 인정 없이는 크게 동기를 부여받지 못하는 유형이 엄연히 존재하며, 그게 나쁜 것도 아니다. 능력치가 비슷한 경우, ‘빛’처럼 존재감을 반짝이며 살다 가고픈데 ‘소금’처럼 묵묵히 무대 뒤를 지켜야 한다면 비극일 테니 말이다. 게다가 그처럼 ‘빛’이 어울리는 이들도 소중한 존재다. 특히 역량과 매력이 뒷받침되는 인재라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선사하는 롤모델이 될 정도로,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나기도 한다. 하지만 기꺼이 소금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투명 인간들은 반대로 빛을 못 받아도 개의치 않거나, 오히려 일에 오롯이 몰입하도록 놔두지 않는 방해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는 타인의 관심과 찬사를 불편하게 느낀다. 이처럼 빛과 소금형 인재들이 잘만 어우러지면 세상을 변화시킬 만큼 막강한 콤비가 탄생할 수 있다. 1984년부터 2005년까지 글로벌 기업 디즈니의 회장이자 최고경영자(CEO)로서 공격적으로 성장을 주도했던 마이클 아이즈너는 자신의 경험을 비롯해 그가 직접 취재하고 인터뷰한 동시대 위대한 리더들의 사례를 직접 녹여냄으로써 절묘한 궁합을 자랑하는 파트너십의 순기능을 다룬 <Working Together>라는 책을 남기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투자가로 자리매김해온 워런 버핏과 그가 이끄는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의 부회장이자 버핏의 단짝 사업 동지이며 ‘숨은 마법사’로 불리는 찰리 멍거, 단순한 부부가 아니라 완벽한 파트너 관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듣는 빌, 멜린다 게이츠 부부 등의 다채로운 얘기가 담겨 있다. 진정한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협업의 미학이 기막히게 작동하는 ‘파트너 조합’이 흥미로운 사례들이다.
그중 저자인 아이즈너 회장의 경우 프랭크 웰스라는 소중한 파트너를 뒀는데, 그가 급작스러운 헬기 사고로 사망하기 전까지 10년을 함께했다. 사실 원래는 둘이 디즈니의 공동 회장직을 제의받았지만 아이즈너가 ‘단독’을 고집하자 웰스가 즉석에서 일인자 자리를 양보하고 자신은 사장이자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맡았다고 한다. 워너 브라더스 사장 출신으로 그 자신도 만만찮은 이력을 자랑했지만 아이즈너의 곁을 지키며 충실한 조력자 역할을 했던 웰스. 그가 늘 자신의 지갑에 지니고 다니던 종이는 포천 쿠키 속에 들어 있던 쪽지였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겸손이야말로 최종적인 성취다.” 독불장군형 리더십으로 유명한 아이즈너는 웰스와 같은 친구이자 파트너는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며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아무런 사심 없이 날 보호하고 후원하며, 내게 조언을 해주는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됐다. 우리는 1+1은 2보다 크다는 걸 배웠다.”
이처럼 환상의 짝궁을 이룬 또 다른 사례로는 샤넬과 펜디의 수석 디자이너로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하는 칼 라거펠트와 종이책을 몹시도 사랑하는 출판업자 게르하르트 슈타이들이 있다. 샤넬의 화보집과 다양한 출판 프로젝트를 통해 20년 넘게 파트너십을 이어오고 있는데, 라거펠트는 자신의 감각을 예술적으로 담아낸 각종 출판물의 세계에 대해서는 슈타이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작년 서울 대림미술관에서는 주로 빛에 가려져온 마에스트로 슈타이들의 창작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를 열기도 했다. 필자는 당시 그가 종이책을 제작해보려는 아티스트나 사진가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1일 워크숍을 참관한 적이 있다. 참가자들에게 그들이 가진 ‘콘텐츠’에 가장 잘 어울린 만한 디자인에 대해 세심하게 조언해주느라 점심시간조차 잊은 듯한 슈타이들의 모습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결코 웃고 있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즐거워 보였다고나 할까.
이 대목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영국의 세계적인 조각가 앤서니 카로 경의 조수 패트릭 커닝엄이 떠오르는 건 아마도 ‘즐거움’이라는 공통된 속성 때문일 것이다. 용접 등 강철을 다루는 솜씨가 일품인 테크니션인 커닝엄은 세속적인 잣대로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카로의 손발이 돼 역사에 남을 조각품을 빚어낸 ‘즐거운 투명 인간’이었다. 아니, 일 자체를 사랑하는 장인의 혼을 지닌 투명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처럼 명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빛을 추구하는 이는 밤에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투명한 존재감에 자족하고,일 자체를 목적이라고 여긴다면 아무래도 행복도가 높을 테니까. 사실 ‘빛’을 사랑하든, ‘소금’을 지향하든, 저마다 이미 내재돼 있는 성향을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스스로 투명 인간을 선호한다고 해도 그 투명함의 정도도 제각각일 테고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가장 완성형에 가까운) 투명 인간의 최대 장점은 누구나 기억해두고 닮아가려 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워런 버핏이 자신의 평생 조력자인 찰리 멍거를 두고 말했듯이, 그건 바로 ‘시기하는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버핏이 자신의 회사 주주들을 모아놓은 연례 회의에서 끄집어내는, ‘7대 죄악’을 두고 한 설명에 잘 나와 있다. “모든 죄악은 잠깐이긴 해도 약간의 즐거움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시기심만은 예외죠.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늘 그 사람을 따라다니며 괴롭힐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