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s Soul in Casa Az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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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05, 2015

글 김미리(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갈매기 날개처럼 생긴 새까만 눈썹, 깊고도 우울한 눈빛. 그녀, 프리다 칼로가 요즘 다시 대세란다. 뉴욕에서, 런던에서, 급기야 서울에까지 그녀가 왔다. 평생 서른두번의 수술이 헤집고 간 상처투성이 몸, 남편의 끊임없는 외도로 만신창이가 된 일생. 그녀가 대체 뭐기에, 피카소부터 마돈나까지 그녀를 칭송한 것일까. 누구는 말한다. ‘나쁜 남자’ 디에고 리베라의 희생양이라고. 또 누구는 말한다. 남편 유명세를 이용한 ‘신데렐라 스토리’일 뿐이라고. 과연 프리다 칼로의 진짜 모습은 어땠을까. 그녀가 태어나 평생을 보내고 생을 마감한 멕시코 코요아칸의 ‘파란 집’에서 ‘칼로’란 성을 또렷이 지닌 혈육이 전하는 생생한 그녀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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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1907~1954)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비행기를 두 번 바꿔 타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도착한 멕시코시티, 거기서도 차를 타고 30분간 교외로 나가야 그녀가 평생 살던 동네 코요아칸이 나온다. 코요아칸을 향해 달리는 자동차 안, 운전기사 살바도르의 프리다 예찬이 끊이질 않는다. “인생도, 그림도, 한참 앞서간 여성이었어요. 늘 담배를 뻑뻑 피우는 것만 봐도 그렇잖아요. 그 시대에! 멕시코 남자들이 얼마나 마초에다 가부장적인데 그 앞에서 보란 듯이 담배 피운 거잖소.” 아, 맞다. 그제야 사진 속 그녀가 늘 손가락에서 놓지 않았던 불 붙은 담배가 떠오른다. 연인이었던 사진가 니콜라스 머레이와 작업실에서 찍은 사진에서도, 뉴욕의 어느 고층 빌딩 옥상에서 찍은 사진에서도, 그녀는 늘 담배를 놓지 않았다. 한때 페미니스트들이 그러했듯, 당시의 그녀에게 담배는 마초적 사회를 향한 저항의 표시였으리라. 끽연의 순간만은 온갖 장애와 병마가 스친 육신의 시름을 잠시나마 내려놓았으리라. 책에선 볼 수 없었던 프리다의 담배 이야기가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되는 듯 한참 동안 그녀에게 감정을 이입한다. 어느덧 프리다가 태어나고, 살고, 죽은 집, 그리고 죽은 뒤엔 박물관(Museo Frida Kahlo)으로 바뀌어 프리다 팬의 성지가 된 ‘카사 아줄(Casa Azul, 파란 집)’에 도착했다. 멕시코의 쪽빛 하늘색을 똑 떼어 풀어놓은 듯(실은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권유로 이곳에 망명 와 한때 프리다의 연인이었던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를 위해 담을 높이 쌓으면서 파란색을 칠했다지만) 눈부시게 시린 블루가 외벽을 휘감았다. 안으로 한 발짝 내딛자 프리다의 그림에 늘 등장하는 선인장 사이로 ‘그녀’가 걸어 나왔다. 150cm 남짓한 자그마한 체구, 새까만 눈썹, 부리부리한 눈매. 게다가 프리다처럼 절뚝절뚝 한쪽 다리를 전다. 프리다와 너무도 똑 닮은 그녀. 프리다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의 손녀, 크리스티나 칼로다. 크리스티나 칼로가 누군가. 형부 디에고와 불륜을 저질러 언니 프리다가 이혼하게 한 장본인 아닌가. 그녀의 손녀다. 이름마저 같은. 그녀는 ‘칼로’라는 성을 지닌 유일한 칼로가(家) 사람이다. 프리다는 자매만 뒀는데, 동생 크리스티나만이 결혼해 아이를 뒀기 때문이다. 칼로 집안의 예술적 재능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그녀는 사진가이자, 프리다의 사진 전시를 담당하는 큐레이터다. 그녀와 프리다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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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노래한 자화상

“제가 몇 년 전부터 다리를 절어요. 몰랐는데 제 주치의가 유전적 요인 때문인 것 같다네요. 이런 증상이 독일계에서 많이 나타난다는데, 아시잖아요. 저희 증조할아버지(프리다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가 독일계인 거요. 프리다도 그 영향을 받은 것 같고요.” 가족력이라니, 이 또한 어디서도 듣지 못한 얘기다. 칼로의 아픈 몸, 그녀의 성장 배경 얘기로 대화가 흘러갔다. 흔히들 프리다 칼로 앞에 ‘절망’이란 단어를 붙인다. 이 절망의 큰 부분은 신체의 고통이다. 독일에서 이민 온 아버지와 메스티소(스페인과 인디오 혼혈)인 멕시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프리다는 여섯 살에 소아마비를 앓는다. 왼쪽 다리보다 한참이나 짧고 가는 오른쪽 다리를 감추려 늘 바지를 입었다. 열여덟 살, 에스쿠엘라 국립예비학교에 다니던 시절 하굣길. 첫사랑과 함께 탄 버스는 애꿎게도 전차와 정면 충돌한다. 척추는 으스러지고 골반은 세 조각 났다. 버스 손잡이 쇠봉이 자궁을 관통했다. 상처투성이 자궁은 세 번의 임신을 세 번의 유산으로 막 내리게 했다. 평생 서른두 번의 수술이 그녀의 작은 몸을 헤집었다.
그림은 통증을 덜어주는 진통제이자, 새 삶을 찾기 위한 돌파구였다. 처음 그림을 만난 건 전차 사고 직후 꽤 오랫동안 침대 생활을 해야 했을 때다. 딸의 고통을 그저 바라만 보던 아버지는 딸을 위해 침대에 특수 고안한 이젤을 설치해줬다. 침대 캐노피엔 거울을 붙여 자기 얼굴을 보게 했다. 소일거리로 화구를 안겨준 아버지는 딸이 훗날 세계인이 사랑하는 화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파란 집’엔 프리다가 누워 그림 그린, 덮개에 거울이 달린 침대가 그대로 있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하는 동안, 줄곧 병마에 시달리며 결국 말년에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 그녀에게 거울은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였으리라. 거울 속에 비친 괴로움과 외로움은 고스란히 그녀의 이젤에 담겼다. 그토록 유명한 프리다의 자화상이다. 맞닿은 시커먼 눈썹과 때론 강렬하게 때론 우울하게 쳐다보는 눈빛을 멕시코의 민속적 부속물과 함께 몽환적으로 그렸다. 평생 회화 1백43점을 남겼는데 그중 55점이 자화상이다. 언뜻 자기애가 지나친 것처럼 보이나, 이 자기애는 여타 화가들의 그것과는 달리 몸의 장애에서 온 것이라는 점에서 프리다의 자화상은 처절하다. 프리다는 말했다.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라고. 그녀의 슬픔을 고백한 일기장 같은 자화상 앞에 서서 이 문구를 되뇐다. 온몸이 침대에 묶인 채 고독에 휩싸여 거울을 보며 붓을 잡던 그녀가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애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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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 남편 디에고는 원수? 백마 탄 왕자?

“우리 할머니가 몹쓸 사람이었다고요? 억울해요. 프리다는 어땠는데요. 서로 자유를 인정했던 거예요.” 신체의 고통과 함께 프리다의 절망을 말할 때 늘 등장하는 게 ‘나쁜 남편’ 디에고다. 오죽하면 프리다가 “인생에 두 번 대형 사고가 있었는데 하나가 전차 사고, 다른 하나가 디에고였다”라고 말할 정도였을까. 스물한 살 연상의 남편 디에고는 예술적 동지이자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었으나 주체하지 못하는 바람기로 그녀를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렸다. “프리다가 어디가 어때서 그 뚱보 바람둥이랑 산 거야”라고 씩씩대는 프리다 칼로 팬, 여럿 봤다. 물론 디에고는 나쁘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벽화가이자 혁명가이며 시대를 대변하는 지성이었지만 여성 편력에 대해서라면 따라올 자가 없었다. 식인귀(食人鬼)란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의 외도를 눈감아주던 프리다(이미 그의 바람기를 너무나 잘 알고 결혼했기에)도 사랑하는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디에고의 불륜 앞에선 참지 못했다. 사랑하는 남편과의 이혼을 감행할 정도로 절망스러웠을 것이다(물론 2년 뒤 재결합했지만). 둘의 관계를 알고서 느낀 분노와 절망은 칼에 찔려 선혈이 낭자한 자화상 ‘몇 번 찔렸을 뿐’(1935년 작), 심장에서 시뻘건 피가 흐르는 자화상 ‘두 명의 아픔’(1939년 작) 같은 명작을 낳았다.
이 사건을 두고, 크리스티나는 외할머니를 두둔했다. “자유연애는 디에고만 한 게 아니에요. 프리다와 연인이었던 트로츠키, 이사무 노구치(일본계 미국 조각가), 니콜라스 머레이(미국 사진가)의 편지를 받아준 게 저희 외할머니였어요. 디에고가 혹여 알까, 프리다는 러브 레터를 우리 외할머니한테 보내게 했어요. 그들의 사랑의 메신저가 우리 외할머니였어요. 그 관계들을 알았기에, 외할머니가 양심의 가책을 덜 느꼈을지도 모르죠.”
프리다는 비련의 여주인공만은 아니었다. 당대 가장 유명한 멕시코의 문화·정치계 셀러브리티이자 국제적 인사였던 디에고를 차지함으로써 프리다는 ‘마담 리베라’의 지위를 십분 활용했다. 디에고를 따라 프랑스, 미국을 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그곳의 예술가와 교류했다. 앙드레 브르통에게 ‘폭탄을 둘러싼 리본’이라는 찬사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디에고를 통한 그들과의 교류에서 비롯됐다. 프리다를 남편 디에고의 명성을 이용해 성공한 ‘신데렐라’로 폄하하는 일부 시선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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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그라지지 않는 ‘프리다 마니아’

“칼로는 여러 가지 스토리를 지닌 인물이에요. 신체적 고통, 남편의 불륜, 유산, 게다가 동성애까지. 그런 복잡한 인생을 산 여인이지만 결국 사랑받고 성공했어요. 고통받는 이들, 특히 여성들이 공감할 요소가 많다는 거죠. ‘프리다 마니아’가 괜히 생긴 게 아니에요.” 크리스티나가 파란 집 정원을 오가는, 프리다 칼로 복장의 관람객을 가리키며 말했다. 화가의 그림을 보러 가면서 그 화가의 복장을 코스프레하다니. 다른 화가들에게선 볼 수 없는 일이다. 고흐 미술관에 고흐 옷을 입고 간다? 피카소 미술관에 피카소 옷을 입고 간다? 상상도 못할 일. 이러니 프리다가 특별할 수밖에. 파란 집에서 만난 브라질 관광객은 프리다가 즐겨 입던 멕시코 민속 의상인 테우아나 차림을 하고 있었다. 출산 도우미라는 그녀는 1년 치 봉급을 모아 파란 집에 왔단다. 그녀에게 여기까지 온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프리다는 ‘여전사’죠. 제 롤모델이에요.” 갑자기 정원에 까만 선글라스 쓴 경호원이 몰려들었다. 예니 하우키오 핀란드 대통령 부인이 남편을 따라 멕시코에 왔다가 꼭 프리다를 보고 가겠다며 들렀단다. ‘오늘의 프리다’를 꿈꾸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 하기야 마돈나도, 레이디 가가도 프리다를 오마주하지 않았던가. 마돈나는 그 비싼 프리다의 자화상을 소장하기까지 했다.
크리스티나의 말대로, 여러 빛깔 아픔을 지녔기에 현대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그녀의 그림에 사람이 몰리는 이유다. 프리다의 매력은 그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프리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아이콘이다. 대개의 프리다 전시에는 그림보다 많은 수의 사진이 등장한다. 프리다가 찍은 사진이 아니고, 프리다를 찍은 사진이다. 프리다는 다른 예술가, 특히 사진가들의 뮤즈였다. 니콜라스 머레이, 롤라 알바레스 브라보, 플로렌스 아르퀸 등 유명 사진가가 그녀를 담았다. 심지어 자화상 속 그녀보다 사진 속 그녀가 더 예쁘다. 프리다가 매력적인 피사체였던 데엔 여러 이유가 있다. 아버지 기예르모가 유명 사진가여서 어렸을 때부터 카메라 앞에 섰다. 많이 찍힐수록 어떻게 포즈를 취해야 예쁘게 나오는지 아는 법. “사진 속 그녀의 손을 보세요. 보통 사람들이 사진 찍을 때 제일 어색해하는 부분이 손 처리예요. 그런데 프리다는 어디에 어떻게 손을 둬야 할지 정확히 알았어요.” 그렇다. 사진 속 그녀의 손은 매우 자연스럽다. 다소곳이 모으고 있거나, 담배를 단단히 쥐고 있다.
독특한 민속 패션도 예술가들에겐 큰 영감을 줬다. 프리다는 남편 디에고와 함께 ‘멕시코 정체성’을 평생 강조했다. 당시 여인들은 프랑스풍 의상에 빠져 있었지만 프리다는 멕시코 인디오의 의상에 눈을 돌렸다. 식물이나 리본을 넣어 장식한 머리도 인디오 전통의 소산이다. 같은 시대 멕시코 여인들이 ‘모던 걸’을 향할 때, 그녀는 ‘멕시코 인디오 여인’을 향한 것이다. 이것이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이 됐다. 그녀를 본 외국 예술가들은 이국적 분위기에 매료됐다. 당대 얘기만이 아니다. 그녀의 패션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친다. 지방시, 꼼 데 가르송, 장 폴 고티에 같은 패션 브랜드에서 그녀를 오마주한 의상을 발표했다.
프리다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특히 올해 그 인기가 더하다. 미국 뉴욕 브롱크스의 뉴욕 보태니컬 가든에선 <프리다 칼로: 아트, 가든, 라이프>전이 한창이다. ‘파란 집’의 정원을 재현한 독특한 기획이다. 생전 프리다 칼로가 정원에서 기른 멕시코의 동식물을 식물원으로 옮겨두고 부속 갤러리에선 그녀의 작품을 선보인다. 미술사학자 아드리아나 자발라가 기획하고, 토니상 수상자인 유명 무대 디자이너 스콧 패스크가 디자인을 맡아 인기몰이 중이다. 뉴욕 스록모턴 갤러리에선 유명 사진가들이 프리다 칼로를 모델로 찍은 사진을 전시한 <미러 미러(Mirror Mirror)>전이, 프리다가 디에고의 벽화 일 때문에 잠시 머무른 미국 디트로이트의 디트로이트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에서는 <디에고 리베라-프리다 칼로 부부전>이 열린다. 유명 사진가 지젤 프로인트가 프리다 부부의 말년을 밀착해 찍은 사진집도 최근 발간됐다. 일본 사진가 이시우치 미야코는 프리다 칼로의 옷, 척추 교정용 코르셋 등 패션 소품을 찍어 사진집을 냈다. 이 작품은 영국 런던의 마이클 호픈 갤러리에서 전시 중이다.
때마침 서울에도 프리다 그림이 와 있다. 서울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에서 9월 4일까지 열리는 <프리다 칼로-절망에서 피어난 천재 화가>전에선 ‘원숭이와 함께 있는 자화상’(1943년 작), ‘땋은 머리의 자화상’(1941년 작) 등 그녀의 대표작을 볼 수 있다. 프리다의 그림은 멕시코 정부가 국가 재산으로 특별히 관리해 해외 반출이 어렵다. 그만큼 국내 관람객으로선 다시 만나기 어려운 귀한 기회이니, 프리다 팬이라면 무더위 속 미술관 피서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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