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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04, 2021

글 고성연 |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대구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크리스티(경매업체)

‘이건희 컬렉션’ 신드롬과 수집 미학

이 정도면 ‘신드롬’이라고 해야 할까. 올 들어 미술계, 아니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가장 뜨거운 화두로 단연 ‘이건희’라는 이름 석 자가 꼽힌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유족이 2만3천여 점에 이르는 미술품을 국가에 기증하기로 하면서 ‘이건희 컬렉션’을 둘러싼 관심이 여러 각도에서 폭발했다. 최근에는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대구미술관 등 몇몇 미술관에서 삼성 일가가 기증한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가 잇따라 열리고 있어 그 관심은 이제 ‘관람 열풍’으로 번졌다. 고인이 됐지만 기업가 ‘이건희’의 커다란 존재감과 유명세로 빚어진 열기임이 분명하나, 업계 차원이나 미술품 애호가라면 소장품 목록의 면면에 대한 관심도 솟아날 수밖에 없다. ‘이건희 컬렉션’을 계기로 미술품 수집의 미학을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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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은 ‘중고’의 몸값이 예측 불가능한 잠재 성장력을 지닌 희소한 존재다. 그저 포장을 뜯지 않은 채 오래 모셔둔 수준이 아니라 엄연히 벽에 걸었던 ‘중고’인데도 가격이 치솟을 수 있을뿐더러 창작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리고 소장가가 누구냐에 따라서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기도 한다. 물론 둘 다 남다른 명성을 지녔다면 당연히 그 가치가 고공 행진을 하게 된다. 단순한 판매 가격뿐 아니라 상징적인 가치가 크게 높아질 수 있다. 여기에 그럴 듯한 스토리텔링까지 덧붙여진다면 금상첨화일 테고 말이다.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은 모든 요소를 가진 사례가 아닐까 싶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유족이 여러 국공립 미술관을 통해 국가에 기증한 문화재와 미술품이 대중에 공개되자 바로 전시장 티켓이 동날 정도로 전국적으로 불거진 작금의 관심은 그 같은 존재감을 입증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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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벗은 ‘이건희 컬렉션’의 면모

팬데믹의 여전한 공세에도 ‘이건희 컬렉션’의 위력은 감탄할 만하다. 대구미술관은 지난 6월 29일 ‘이건희 컬렉션’ 21점을 공개하는 특별전 <웰컴 홈>을 열었는데, 2주 만에 관람객 1만 명을 돌파했다. 이 중 상당수는 타 지역에서 발걸음을 했다고 전해진다. 지난 7월 21일 나란히 개막한 국립중앙박물관과국립현대미술관(MMCA)의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은 기간제 예약이 진행되면 바로 마감되는 모양새다. 강도 높은 거리 두기의 여파로 시간당 허용 관람객 수가 적은 탓도 있지만 워낙 관심도 자체가 높다. 제주 이중섭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등도 오는 9월 이건희 컬렉션 전시를 각각 시작하고, 11월 개최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박수근 회고전에도 일부 기증품을 선보이는 등 한동안 우리나라 곳곳의 전시 풍경에서 이건희의 자취는 눈에 띄게 두드러질 전망이다. 이건희 기증품을 따로 모아 별도의 미술관을 짓는다는 구상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와 별도로 ‘작품’의 면면을 궁금해하는 대중의 발길은 그 목적지가 어디가 됐든 뜨겁게 이어질 것 같다.
아무래도 ‘이건희 컬렉션’의 하이라이트는 국보급 문화재를 포함한 국립중앙박물관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오는 9월 26일까지)과 20세기 대표 작가들의 명작을 엄선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전(내년 3월 13일까지)일 것이다. 청동기부터 조선까지 아우르는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에는 겸재 정선(1676~1759)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가 단연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이 회장이 처음으로 수집한 것으로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 공개한 작품 수는 77점. 예약에 성공한다면 삼국시대 금동불의 섬세함을 보여주는 ‘일광삼존상(국보 제134호)’, 고려시대 사경(寫經) ‘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국보 제235호)’, 단원 김홍도(1757~1806?)가 말년에 그린 ‘추성부도(보물 제1393호)’, 청동기시대 ‘붉은 간토기’와 미려한 청백자들, 그리고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 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와 ‘수월관음도’ 같은 빼어난 14세기 고려 불화의 형용하기 힘든 매력에 빠져볼 수 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34명의 1920년부터 1970년대까지 주요 작품 58점을 선보인 MMCA 서울의 ‘이건희 컬렉션’ 전시는 크게 3개 주제로 나누어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새 문물이 유입된 시기를 다룬 ‘수용과 변화’,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은 1945~1950년의 격동기를 조명한 ‘개성의 발현’, 그리고 전후 국내외에 정착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찾아나간 작가들을 소개하는 ‘정착과 모색’. 일단 전시장에 들어가면 8폭 병풍에 펼쳐진 유채화인 백남순의 ‘낙원’(1936년경)이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데, 작품명처럼 동양의 무릉도원과 서양의 아카디아가 섞여 있는 듯 독특한 느낌의 풍경화다. 서양화를 공부한 1세대 여성 화가의 대표 주자인 백남순은 이중섭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이중섭의 1950년대 명작 ‘황소’와 ‘흰 소’도 이번 전시에 출품돼 있다). 권진규와 김종영의 조각, 장욱진, 박수근, 유영국, 이성자, 류경채의 회화 등 빼놓을 작품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백미는 한 벽을 채운 김환기의 대작 ‘여인들과 항아리’(1950년대). 김환기 작품 중 가장 큰 그림으로 그가 끔찍이 아꼈다는 백자 항아리 이미지와 더불어 반라의 여인들, 학, 사슴, 새장 등 여러 모티브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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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광’이라 할 만한 전설의 컬렉터들

올해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의 감정가만 3조원에 이른다는 얘기도 있지만 금액보다는 시대를 아우르는 한국의 미술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더 주목된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로라하는 자산가들은 ‘예술’에 탐닉했다. 크리스티 경매 중에서도 전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던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가 남긴 컬렉션 경매(2009), 록펠러 가문의 컬렉션 경매(2018)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자신의 취향과 안목, 권력을 뽐내기 위해서든 재테크와 절세, 상속의 수단이든 그 기저에는 대부분 예술에 대한 사랑도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수집광’은 많지만 세인들이 미술관급 ‘컬렉션’이라 명명할 만큼 소장품 목록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돈뿐 아니라 열정과 노력, 지식, 네트워크 등 많은 요소가 필요하다. 이건희 컬렉션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전설의 컬렉터들이 있는데, 페기 구겐하임(1898~1979)과 세르게이 시추킨(1854~1936)이다.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의 설립자 솔로몬 구겐하임의 조카딸로 잭슨 폴록 등을 무명 시절부터 후원하며 미국의 현대미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는 페기 구겐하임은 “나는 컬렉터가 아니다. 미술관이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사후 구겐하임 미술관에 기증된 그녀의 아름다운 컬렉션은 이탈리아 베니스의 자택이던 공간에서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데,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운하 쪽을 향한 야외 공간에 두 팔을 경쾌하고 벌리고 있는 마리오 마리니의 ‘도시 천사’를 비롯해 그녀의 소장품을 보노라면 상당수가 위대한 예술 작품을 마주하면 흥분 상태에 빠지거나 현기증까지 느끼는 ‘스탕달 신드롬’까지는 아니더라도 한참을 홀리듯 스스로에게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결코 오판하지 않는 눈’을 가졌다는 세르게이 시추킨은 러시아의 대부호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인물로, 자신과 동시대에 호흡했던 대가들의 작품을 대거 수집했다. 피카소, 모네, 세잔, 고갱, 마티스 등 그야말로 20세기 서양미술 거장들의 컬렉션이다. 하지만 아내와 아들이 잇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개인적 비극에 더해 러시아 정치사의 격변기까지 겪으면서 시름에 빠진 그는 결국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의 막대한 컬렉션은 전부 국가 소유가 됐고, 급기야 ‘소멸’ 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결국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푸시킨 미술관에 남게 됐다. 지난 2016년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는 <현대미술의 아이콘: 시추킨 컬렉션(Icons of Modern Art: The Shchukin Collection)>이라는 전시를 열었는데, 사연 많은 그의 컬렉션이 제대로 된 규모와 구성을 갖춰 러시아 밖에서 전시된 건 처음인지라 반향이 엄청났다. 시추킨의 굴곡진 스토리까지 더해진 명작의 향연에 당시 관람객 수가 1백30만 명에 이르렀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의 설립자이자 세계적인 컬렉터이기도 한 LVMH 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공개적으로 전시장을 찾아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이례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도 있다). 오는 가을,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는 ‘2탄’ 격인 <현대미술의 아이콘: 모로조프 컬렉션(Icons of Modern Art: The Morozov Collection)>을 개최한다. 20세기 초 모스크바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미술 애호가 모로조프 형제의 컬렉션을 소개하는 전시로 프랑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모더니즘 사조를 대표하는 컬렉션, 러시아 아방가르드 흐름까지 아우르는 걸작들의 퍼레이드가 예정되어 있다.
요즘 ‘이건희 컬렉션 열풍’이 아니더라도 사실 미술계는 ‘핫’하다. 세계적인 갤러리들이 줄줄이 한국 시장에 입성하고 있고 글로벌 아트 페어 브랜드인 프리즈(Frieze)도 KIAF와 손잡고 서울에서 아트 페어를 연다. 그래서 미술품 컬렉팅에 대한 관심도 점점 더 고조되고 있다. 시장이 이처럼 들떠 있을 때는 신중한 접근이 요구되지만, 대부호 수준이어야 좋은 작품을 소장할 수 있다는 이른 낙담이나 실망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가난한 컬렉터가 훌륭한 작품을 사는 법>이라는 책에서 주는 메시지처럼 ‘유명 작품도 한때는 모두 합리적인 가격이었다’는 점, 그리고 눈을 조금만 돌리면 우리 주변에 덜 비싸면서도 더 급진적인 미술 작품이 많다는 점을 잊지 말자(그 작가군이 반드시 어린 작가일 필요는 없다는 충고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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