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탄생 1백40주년
Irresistible Charms
먼지 봉투 없는 청소기로 유명세를 얻은 제임스 다이슨은 ‘다이슨(Dyson)’이라는 브랜드명이 ‘청소하다’는 뜻의 일반 동사처럼 쓰이는 게 꿈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미술계에서 ‘피카소’라는 이름은 그런 상징성을 지닌다. 20세기를 통틀어, 아니 오늘날까지도 가장 성공한 예술가의 표본을 꼽으라면 ‘피카소’가 반사적으로 나올 테니까. 흔히 말하는 ‘고유명사가 보통명사화된’ 사례랄까. 주말이면 똬리를 몇 겹 튼 대기 줄이 늘어설 만큼 인파가 몰리는 예술의전당 <Picasso, Into the Myth> 전시 풍경은 새삼 그 이름값을 실감케 한다. 비채아트뮤지엄의 주관으로 피카소 탄생 1백40주년을 기념해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에서 온 선물 같은 전시를 계기로 거장의 눈부신 예술 여정을 되새겨본다.
팬데믹 시대에 대다수가 가장 그리워하는 활동인 ‘여행’. 운 좋게 지구촌을 바삐 누비고 다닌 ‘호모 비아토르’ 유형의 인간인지라 그리움의 장소도 많지만 그중에서도 필자의 ‘최애’ 여행지는 우리말로 흔히 ‘남프랑스’라고 하는 프로방스(Provence) 지역이다. 지중해의 매혹적인 풍광이 늘 영감 돋게 하는 남프랑스에 여러 차례 갔는데, ‘마티스 여행’과 ‘세잔 여행’, ‘고흐 여행’ 등으로 나눌 수도 있겠다. 딱히 피카소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파리, 바르셀로나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을 비롯해 세계 유수 도시에서 그의 작품을 접해왔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얄미울 만큼 거의 커리어 내내 빛났던 찬란한 이력과 화려한 여성 편력 탓에 왠지 정이 가지 않았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결국은 ‘피카소 여행’을 했다. 그가 곳곳에 남긴 자취가 워낙 풍부했고, 또 인상적이니 별 도리가 없었다.
솜씨 좋은 화가는 많다. 걸출한 예술가도 많다. 그런데 어쩌면 당연한 얘기지만 ‘역사’를 바꾼 화가는 극소수다. 조르주 브라크와 더불어 사물에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사실을 파격적으로 일깨워준 ‘입체주의(cubism)’의 시대를 연 창시자라는 점에서 그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창작열을 불태우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갔다. 미술사가 존 핀레이는 천재, 보헤미안, 고전주의자, 원시주의자, 샤먼, 이단자, 시인, 공산주의자, 모방자, 그리고 심지어 자기 미술의 혼성 모방자 등 끝없이 이어지는 수식어가 피카소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예라고 분석했다. 예술적 규범에 도전하고 다시 자신의 초기 발명을 참조하는 식의 역설적으로 보이는 피카소의 방식은 언뜻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주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불세출의 팔방미인’ 피카소의 면면을 한 번의 전시로 모두 파악하기 어렵고, 그의 걸작들이 한데 모아지지도 않지만, 이번 피카소 탄생 1백40주년 기념전은 연대기별로 꽤 폭넓은 시기를 다양하게 아우른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세잔의 영향을 받은 ‘분석적 입체주의’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만돌린을 든 남자’(1911)를 위시해 입체주의 부조 형태로 현대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작품 ‘기타와 배스병’(1913), 신고전주의풍의 구상 회화 ‘피에로 복장의 폴’(1925) 등 비교적 초기 작품부터 1930년부터 1937년까지 제작한 판화 작업 ‘볼라르 연작’, 그리고 1948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피카소가 이주해 살았던 남프랑스 발로리스에서 만든 도자기 등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인 관람객에게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여겨질 ‘한국에서의 학살’도 바로 이 도자기로 유명한 발로리스의 작업실에서 탄생했다.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다룬 1937년 작 ‘게르니카’ 등에 이은 피카소의 전쟁 3부작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삼았다(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고발하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특정 사건을 묘사한 건 아니라고 해석된다).
그런데 전시장에서 인기가 제일 많은 공간은 ‘피카소와 여인들’ 방이다. ‘사랑은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치유제’라고 했던 피카소의 애정사를 둘러싼 호오(好惡)는 차치하고 그의 연인들이 뮤즈 역할을 하면서 많은 명작이 탄생한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앞서 필자에게 감각적 희열을 선사한 예로 들었던 페르낭드 올리비에부터 젊은 나이에 병사한 에바 구엘, 첫 부인 올가 코클로바, 청순하고 어린 마리 테레즈 발테르, ‘게르니카’의 산증인 도라 마르, 피카소의 두 자녀를 낳고 그를 떠난 프랑수아즈 질로,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함께한 자클린 로크에 이르기까지…. 피카소에게 엄청난 창조적 영감을 불어넣은 그의 뮤즈들은 결과적으로 20세기 미술사의 중요한 페이지를 수놓는 데 기여했고, 그가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다작을 하는 데도 큰 동력을 제공했다(피카소가 남긴 회화 작품만도 1만3천5백 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스로 뮤즈가 되기를 거부한 여인도 있다. 바람기에 넌덜머리가 나 피카소를 먼저 떠난 유일한 연인인 프랑수아즈 질로. 원래 화가로 피카소를 만났던 그녀는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예술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당당하게 성공해 현재까지 백수를 누리고 있다. 질로와 함께한 시절 피카소는 남프랑스의 우아한 항구도시 앙티브에 머물기도 했는데, 요새로 지은 그리말디 성(城)을 아틀리에 삼아 작업했다. 훗날 그가 앙티브에서 명예 시민 칭호를 받자 이곳은 한해 1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는 또 다른 피카소미술관으로 변신했다.
피카소를 둘러싼 여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기에는 그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다방면에서 빛을 뿜어낸다. 평생에 걸쳐 드로잉, 회화, 판화, 조각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 그는 연극과 발레에도 관심이 많았고 정치, 철학 등 여러 방면으로 해박했으며, 세태를 고발하는 ‘게르니카’ 같은 대작에서도 엿볼 수 있듯 시대정신과 호흡하는 행동가이기도 했다. <Picasso, Into the Myth>를 성사시키는 데 다리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 서순주 전시 커미셔너가 이번 전시의 도록 서문에 썼듯 피카소는 모더니즘의 선구자였을 뿐 아니라 탐미적 감상 도구이던 예술이 동시대의 아픔과 고민을 대변하는 정신적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서양미술사에서 피카소만큼 ‘이미지의 힘’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작가는 없었다고 강조했는데,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작품을 소통 도구로 쓰는 데 일가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남달랐다.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하다가 ‘벨 에포크’ 시대가 펼쳐지고 있던 20세기 초 파리를 찾은 청년 피카소는 당시엔 가진 것이 없었지만 특유의 재능과 매력으로 꽤 빠른 속도로 나래를 펼쳐나갔다. 상류층 인사뿐 아니라 동시대의 화가, 시인, 화상 등과 폭넓은 유대 관계를 다져나가며 만든 ‘인맥’이 꽤 긍정적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자신이 머물렀던 여러 도시에서도 늘 친근한 영웅 대접을 받았으며, 주민들과 잘 어울리기도 했다. “예술가도 성공할 필요가 있다.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뿐 아니라, 작품을 지속적으로 창작해나가기 위해서 말이다.” 피카소가 직접 남긴 이 말은 그가 영민한 전략가로서 ‘인맥’은 물론이고 혁신적인 예술가로서 자신의 이미지까지 조율할 수 있는 능력자임을 알게 한다. 신화라는 건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다.
2 피카소의 유화 ‘편지 읽기’(1921)를 감상하는 한 관람객의 모습.
3 파블로 피카소, ‘만돌린은 든 남자’(1911), 캔버스에 유화.
4 파블로 피카소, ‘피에로 복장의 폴’(1925), 캔버스에 유화.
5 파블로 피카소, ‘마리 테레즈의 초상’(1937), 캔버스에 유화.
6 남프랑스 곳곳의 도시와 마을에서 거주하면서 다수의 명작을 남긴 피카소가 실제로 작업한 성이자 박물관을 개조해 만든 앙티브 피카소 미술관. Photo by Jon Jay
7 피카소가 앙티브와 인근 도시에서 머물렀을 때 그의 연인이자 뮤즈이던 프랑수아즈 질로(Franc¸oise Gilot)가 쓴 책 <피카소와의 나날들(Life With Picasso)> 표지. 1921년생인 질로는 피카소를 스스로 떠난 유일한 연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굴곡도 많았지만 백수를 누리며 성공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8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전시장에서 파블로 피카소의 1951년 작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을 감상하고 있는 남녀 커플. 합판에 유화. 작품이 발표된 지 70년 만에 한국 땅을 처음 밟았기에 많은 관람객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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