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곰리와 ‘동물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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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7, 2025

글 심은록(미술비평가, AI 영화감독)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의 조각 세계에서는 ‘신체의 공간화’가 세 단계로 전개된다. 몸을 석고로 캐스팅하며 ‘완전한 몸의 구현’을 시도하고, 몸을 블록 단위로 분해해 쌓아 올리면서 ‘물리적 픽셀’로 추상화하며, 나중에는 철제 띠로 몸 외곽만 남기고 내부를 비워 신체가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열리고 흩어지는 관계적 구조로 변모시킨다. 그는 신체를 단순히 인간적 자율성의 표지로만 보지 않고, 우주적 질서와 연결된 ‘동물적 매개체’로 이해한다.
그의 신체 조각은 대지와 맞닿고, 하늘과 대화하며, 비와 바람을 받아내는 자리에서 작동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도시 문명에서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는 실험인 동시에, 몸을 통해 다시금 자연과 우주의 균형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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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동물적 본성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 상황에서 그것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국 조각가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는 지난 8월 말 주한 영국 대사관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이렇듯 ‘동물적 본성’을 강조했다.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그의 첫 서울 개인전 <불가분적 관계(Inextricable)>가 세계적인 두 갤러리인 타데우스 로팍(2025. 9. 2~11. 8)과 화이트 큐브(2025. 9. 2~10. 18) 서울 지점에서 공동 기획으로 개최되고 있다. 한편 강원도 원주의 뮤지엄 산에서는 〈Drawing on Space〉(2025. 6. 20~11. 30)가 열리고 있으며, 전남 신안군 비금도 해변에서 ‘예술 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 중인 대형 작품 ‘엘리멘탈(Elemental)’은 내년 상반기에 완성될 예정이다.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인 ‘인간과 공간의 관계’와 관련해 곰리의 작업은 크게 세 단계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동물적 본성’과 관련해서는 그의 최근 작업보다 이전 작품인 ‘Birth’(iron, 0.8×2.3×0.7m, 통영 남망산 조각공원, 1997)에서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이 작품은 ‘보디 케이스(Body Case)’라고도 불리는데, 작가가 자신의 몸을 석고로 캐스팅해 만든 조각이다. 주물 석고에 갇히는 숨 막힘, 세상과의 단절, 산 채로 미라가 되는 듯한 공포가 동물적 감각을 극대화한다. 그는 이 공포를 인도에서 배운 명상으로 극복했으며, 이는 외부와의 관계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두 번째, ‘Block Works’ 작업에서는 곰리가 ‘물리적 픽셀’이라 부르는 ‘블록(block)’이 주 구성 요소다. 이는 단순한 조형 단위가 아니라, 문명의 기초 단위인 벽돌을 연상시키며, 몸과 건축, 도시를 잇는 개체로 작동한다. 블록으로 구축된 신체는 곡선적 유기체가 아니라 적층된 구조물로 드러나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도시와 건축에서 어떻게 해체되고 재구성되는지 보여준다. 곰리는 인류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는 오늘날, 도시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자유와 제약을 동시에 시각화한다. 세 번째는 ‘Extended Strapworks’ 연작이다. 철제 띠로 구축된 신체는 내부가 비워지고 외부와 투과적으로 연결된다. 고정된 육체가 아니라 공간적 궤적처럼 제시되며, 몸은 건축적, 도시적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이는 신체가 실체라기보다 관계와 흐름으로 이뤄진 열린 구조임을 드러낸다. 곰리의 작업은 점차 신체가 공간화, 공(空)화되는 과정을 통해 변화된 인간 조건을 탐구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곰리는 “우리는 외부의 날씨에 반응해야만 내면의 날씨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의 본질이 자연과의 교류 속에서 드러난다는 통찰이다. 따라서 그의 미학에서 동물성의 회복은 단순한 퇴행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균형을 되찾는 행위다. 이때 균형은 단순히 자연과 도시, 안과 밖, 인간과 환경의 조화가 아니라, 끊임없이 기울어지고 다시 맞춰야 하는 동적 균형을 의미한다. 서울 전시는 이처럼 ‘도시에 사는 동물’로서의 인간상을 드러내며, 도시를 단순한 배경이 아닌 살아 있는 구조로 인식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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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리는 AI 시대에 부각된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로 “예술이 인간의 가치를 지켜낼 방법은 신체성과 동물성의 회복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AI로부터 주어진 정보는 경험이 아니며, 데이터의 축적은 감각의 현존을 대신할 수 없다”고 단언하며, “직접적 경험은 기술로 대체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에게 몸은 단순한 뼈대가 아니라 살아 있는 구조이며, 우리 몸과 환경이 서로를 형성하는 ‘공동 구성(co-constitution)’의 주체다. 이를 통해 인간은 동물적 본성을 되찾고, 다시금 세계와 우주를 인식할 수 있다. 곰리는 몸을 우주만큼이나 알려지지 않은 자율적 존재로 여기며, 조각을 통해 몸과 서식지가 어떻게 서로를 구성하는지 보여준다. 따라서 조각은 인간을 다시 세계와 이어주고, 인간만이 지닌 동물적 리듬과 감각을 회복시켜 AI 시대에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켜내는 마지막 보루로 기능한다.
그가 거듭 강조했듯 ‘조각은 우리를 다시 직접적인 물리적 경험으로 되돌려주는 도구’다. AI가 이미지를 합성하고 정보를 재구성할 수는 있지만, 차가운 철을 만지는 감각, 바닷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체험, 비 속에 서 있는 조각을 마주하는 순간은 결코 기계가 대신할 수 없다. 바로 그때 우리는 살아 있는 몸으로 세계와 연결됨을 느끼며, AI의 추상적 정보 세계에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담론은 ‘동물의 신화’로 귀결된다. 그는 “시간이 다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엔 동물성의 회복이 끝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신화란 단순한 회귀의 약속이 아니라, 오히려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불가능성과 가능성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하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다. 곰리의 작품은 신화적 갈망과 균형의 실험 속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몸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마지막 가능성을 제안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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