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ge of Homo Ar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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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02, 2022

글 고성연


Brands & Artketing_8 공생의 역학
잘나가는 브랜드들, 혹은 차별화를 꾀하고 브랜드 파워를 키우기 위해 전략적 행보를 펼치는 브랜드들은 요즘 대부분 ‘아트 마케팅’을 한다. 메세나적 활동이든 차별화를 위한 전략적 마케팅이든 오늘날 소비사회의 상징인 브랜드에 있어 예술은 제1 외국어 정도가 아니라 거의 공용어로 귀결되는 듯하고, 문화 예술계의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아티스트와의 만남은 늘 호응을 이끌어내지는 않지만 화제로 부각되기에는 유리하므로 필수적인 동맹이자 조합으로 여겨진다. 전부 그렇지는 않더라도 예술도 엄연한 소비사회의 상품이기에 남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브랜드와 아티스트의 창조적 협업은 서로에게 때로는 엄청난 시너지를 선사할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각 분야의 아트 마케팅도 흡사 춘추전국시대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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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루이 비통이 6인의 현대미술가와 손잡고 펼치는 협업 프로젝트의 일환인 ‘아티카퓌신(ArtyCapucines)’ 컬렉션이 새롭게 공개됐다. 2019년 처음 선보인 이 컬렉션은 늘 세간의 주목을 받아왔지만 특히 올해는 한국 작가의 이름이 포함되어 눈길을 끌었다. 한국 단색조 추상을 일컫는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이 자신의 대표 연작 ‘묘법’ 시리즈 중 하나를 바탕으로 카퓌신 백을 디자인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하고 보니 문득 어떤 미술 서적에서 제기된 것과 비슷한 질문이 떠올랐다. 당대를 호령하는 걸출한 예술가의 영감 어린 손길이 닿아 탄생한 핸드백은 예술 작품으로 간주해야 할까? 아니면 그저 독특한 패션 디자인 아이템으로 여겨야 할까? 필자가 만난 현대미술 컬렉터는 이 같은 백을 가지고 있는데, 작품처럼 모셔놓고 주로 감상을 한다. 실제로 이런 핸드백들은 소더비, 크리스티 같은 미술품 경매에서 거래되기도 하고 아예 내로라하는 미술관에 전시되거나 소장되기도 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 디자인 작품으로도, 또는 미술 작품으로도 분류될 수 있다. 이는 전적으로 희소성과 미학적 가치를 꼼꼼히 따져보는 미술관의 시각과 성향에 따라 갈리겠지만, 어쨌거나 ‘패션의 예술화’가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리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비단 패션만이 아니다. 우리는 ‘예술성’이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되는 소비사회에 속해 있고, 장르를 막론하고 산업의 예술화 경향은 점점 짙어지고 있다. 일찍이 20세기의 문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산업이 없는 삶은 메마른 불모지이고, 예술이 결여된 산업은 야만’이라고 했듯이 말이다. 개인이나 조직 역시 마찬가지다. 문화와 취향이 현대인의 계급 구분에서 핵심적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그 유명한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주장은 이제 익숙하게 받아들여진다. 예술성은 일터에서도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는 기준이다. 창조적 능력=인적 자본으로 인식되면서 현대사회의 노동자들은 보다 심미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을 요구받는다. 저자 조정환이 설파했듯 ‘예술 인간(homo artis)’의 시대라 해도 과하지 않은 표현일 듯하다. 그러므로 브랜드 연금술을 위한 무기로 ‘예술’을 선호하는 작금의 현상은 더 강력하게 전개되기 마련이고, 특히 원래부터 뿌리를 예술에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럭셔리 브랜드들로서는 열정 어린 투자를 쏟아부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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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닮거나 그 자체가 되고 싶은 럭셔리 브랜드들
지난 9월 초 키아프(Kiaf Seoul)와의 동행으로 첫 단추를 꿴 글로벌 아트 페어 브랜드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의 등장은 여러모로 화제를 일으켰는데, 그중에는 럭셔리 브랜드들이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참여해온 그 어떤 행사에 비해 눈에 띄게 존재감을 드러났다는 점도 꼽힌다. 아트 페어가 열린 코엑스(COEX) 로비부터 대대적인 광고 공세를 단행했던 생 로랑은 국내 화단의 대표 작가 이배(Lee Bae) 전시를 위한 부스를 프리즈 서울 전시장 내에 차려 화제를 일으켰고, 샴페인 라운지에서는 LVMH 그룹에서 ‘아트 마케팅’을 전개하는 전통을 지켜온 브랜드인 루이나(Ruinart)가 한국의 스타 작가인 김종학 화백과의 협업을 펼쳐냈다. 그의 작품으로 라운지 곳곳을 수놓았을 뿐만 아니라 ‘아트 컬래버레이션’으로 탄생시킨 샴페인 보틀도 선보여 방문객들의 눈도장을 받았다. 자연과 생물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브랜드의 상징인 ‘블랑 드 블랑 세컨드 스킨 매그넘’ 15병에 표현해낸 샴페인 보틀로, 브랜드가 지향하는 친환경적 면모를 자연스럽게 내보였다. 스위스 워치메이킹 브랜드 브레게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아티스트 파블로 브론스타인(Pablo Bronstein)과의 협업을 전개한 라운지를, 그리고 명품 향수 브랜드 조 말론 런던 역시 ‘홈 프레이그런스’ 라인을 매력적인 연출 방식으로 소개한 라운지를 각각 꾸몄다. ‘장외’ 무대에서의 창조적 협업도 풍성했다. 샤넬 코리아는 한국의 기성 예술가 3인(박진아, 박경근, 정희승)과 떠오르는 신진 예술가 3인(유예림, 이유성, 김경태)이 짝을 지어 예술적 대화를 나누는 영상 시리즈 <나우 & 넥스트>를 선보였고, MCM은 최정화 작가와의 협업으로 서울 청담동 플래그십 매장을 수놓았는데, 매장 앞에 놓인 설치 작품 ‘인피니티’부터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당시 아트 주간에는 컬렉터와 문화 예술계 인사가 모여드는 ‘파티’도 봇물처럼 쏟아졌는데, 여기에도 럭셔리 브랜드의 자취가 강하게 묻어났다. 예컨대 하이 주얼리 브랜드 쇼메(Chaumet)가 가나아트와 손잡고 프라이빗 뷰잉룸에서 칵테일 리셉션을 진행한다든지 서울 도산대로에 자리한 아트 센터이자 세계적인 건축가 듀오 헤어초크 & 드 뫼론이 이끈 설계로 유명한 송은에서 주최한 파티의 후원을 명품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가 맡는다든지 하는 식이다. 특히 송은의 ‘부기부기 파티’는 주차장 공간을 멋지게 파티장으로 탈바꿈시킨 공간의 예술화가 돋보이는 사례이기도 했다. 브랜드를 상징하는 ‘보테가 그린’ 조명이 사이키델릭한 디자인 감성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렸고, 주류는 프리미엄 막걸리 브랜드 복순도가가 협찬했다. 이렇듯 앞다퉈 ‘아트’ 행사에 통 크게 투자하는 행보에는 그만큼의 가치가 보장되기 때문일 것이다. 럭셔리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 없지만, 예술만큼 럭셔리에 희소가치와 차별성을 부여하는 존재가 드물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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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적 감성과 영원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
사실 소수지만 어떤 브랜드들은 (흔히 말하는 럭셔리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이미 각자의 영역에서는 빼어난 경쟁 우위를 지니게끔 하는 역사성과 정통성을 품고 있다. 일례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연작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부쉐론(Boucheron) 목걸이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부쉐론이란 명품 브랜드의 오라로 감싸인 이 목걸이는 단순한 보석이 아니다. 이는 나탈리 베그살라의 해석을 빌리자면, 브랜드 자체가 사회 문화적 지표이자 (작중 상황에서) 동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동시대적인 신선한 감각까지 불어넣는 아트 컬래버레이션이 정교하게 더해지면 전통과 살아 있는 감성, 그리고 예술에서 비롯되는 영원성(timeless)에 어느 정도는 다가가는 복잡다단한 정수를 두루 갖추게 되면서 거의 ‘무적’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혹자는 동시대 아티스트들과의 좋은 협업은 브랜드로 하여금 전통에 입각한 영원한 빛을 발산하면서도 ‘현재’라는 유행의 흥분을 느끼게 하는 외줄타기의 묘미라고 표현하기도 했듯이 말이다. 현재 울산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예술과 산업>이라는 기획전에서는 이렇듯 예술을 브랜드를 고양시키는 하나의 추동력으로 삼은 사례를 전시 콘텐츠로 선보였다. 10개국 15팀의 글로벌 작가들이 참여한 전시로 자동차, 에너지 화학, IT, 음악, 패션, 영화, 식음료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 걸친 협업으로 탄생한 예술 작품들이 등장한다. 그중 보드카라는 카테고리의 럭셔리라고 할 수 있는 ‘앱솔루트’라는 브랜드가 있다. 원래는 스웨덴 브랜드로 다국적 기업 페르노리카가 2008년 인수했는데, ‘아트 컬래버레이션’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팝아트의 황제로 일컬어지는 앤디 워홀의 얼굴이나 디자인이 담긴 보드카 병을 비롯해 데이미언 허스트, 백남준, 키스 해링 등 여러 세대를 관통하는 아티스트들과의 제품 디자인 협업부터 이를 활용한 감각적인 광고 캠페인까지 ‘토털 패키지’로 예술을 활용했다. 오죽했으면 경영학계 구루들이 “앤디 워홀이 없었다면 앱솔루트 보드카는 어떻게 됐을까?”라는 얘기를 했을 정도다. 이번 울산시립미술관 전시에서는 2011년 프로젝트 ‘앱솔루트 블랭크(Absolut Blank)’의 작업 세계가 소개됐다. 당시 굿 와이브즈 앤드 워리어즈(Good Wives and Warriors)라는 영국 기반 듀오가 맡은 프로젝트로 ‘비어 있음’을 출발점으로 삼고 앱솔루트 보드카에 예술적 해석을 채워 넣는 작업도 포함됐는데, 이번에는 가로 2m, 세로 6m의 병 모양 대형 패널에 그림을 그린 작품이 새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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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융합’으로 이뤄지는 크로스오버 협업의 매력
뮤직비디오를 둘러싼 아티스트 협업도 인상적이다. 루이 비통과의 협업으로 명성 자자한 일본 현대미술가 무라카미 다카시가 미국 싱어송라이터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의 데뷔 앨범 에 수록된 곡 ‘You Should See Me in a Crown’ 뮤직비디오를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새롭게 해석한 작품(2019)인데, 도입 부분의 녹색 캐릭터는 빌리 아일리시가 직접 만들기도 했다. 이후 빌리 아일리시는 ‘My Future’(2020) 뮤직비디오 역시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발표했다. 이렇듯 시각 예술과 뮤지션의 만남이라는 계보에서 인상적인 사례는 얼터너티브 록 밴드 예세이어(Yeasayer)가 네 번째 앨범 <아멘 & 굿바이(Amen & Goodbye)>(2016) 커버 작업에서 펼친 캐나다 출신의 현대미술가 데이비드 알트메즈(David Altmejd)와의 협업이다. 음악 앨범의 정체성을 대표하고, 더 나아가서는 뮤지션의 색깔을 상징할 만한 중대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예세이어가 오랫동안 작가로서 좋아했던 알트메즈에게 요청해 이뤄진 이 협업에서 작가는 곡의 가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일련의 조각으로 제작했는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45대 대통령, 소설가 마크 트웨인, 그리고 예세이어 밴드 멤버들의 얼굴을 본뜬 조각들이 부식되거나 파손된 채 앨범 커버 사진 촬영 무대를 채우고 있는 기괴한 이미지들이 발산하는 강력한 오라를 이번 전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젠틀몬스터와 펜디의 만남을 보면 이종 간의 협업만이 아니라 넓게 보면 같은 패션계에 속한 두 브랜드 사이에서 일어나는 시너지도 흥미롭다. 우리나라 패션 아이웨어 브랜드이며 예술 작품으로 수놓은 공간 디자인이 돋보이는 쇼룸을 운영하는 등 창의적 마케팅에서 발군의 솜씨를 보여온 젠틀몬스터가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펜디와 ‘젠틀펜디’ 컬렉션을 내놓았는데, 러시아 아티스트 컬렉티브로 초현실주의 작품을 보는 듯 몽환적이고 세련된 감성을 지닌 AES+F가 영상과 포스터 등을 아우르는 캠페인(2019)을 맡으며 시너지를 이끌어냈다. 또 AES+F가 젠틀몬스터의 아이웨어 라인업인 ‘나노컬렉션’ 캠페인의 일환으로 진행한 <생명의 순환>(2021)이라는 짧지만 강렬한 영상 작업(싱글 채널 필름)도 이번 전시에서 상영되고 있다. 요즘 패션 브랜드들은 단순히 광고 캠페인으로 보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영화를 방불케 하는 스토리텔링과 미학을 곁들인 영상 작업을 앞다퉈 선보이고 있는데, 현대미술에 ‘진심’인 브랜드로 수십 년에 걸쳐 작가들을 후원하고 협업을 진행해온 프라다는 이 분야의 선구자 중 하나로 꼽힐 만하다. 이번 <예술과 산업> 전시에서도 중국 출신의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양푸동(Yang Fudong)과 협업해 완성한 ‘처음 맞는 봄’(2010)이 소개되고 있는데, 현대를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우연히 과거 중국 왕조시대 사람들을 만나는 내용을 1930년 상하이를 무대로 담아냈다. 프라다 제품들이 등장하지만 어색하지 않고 중국의 전통 인식에 대한 부재를 시각화하면서 생각할 거리까지 제시하는 등 상업과 예술 사이를 묘하게 오가면서 풀어내는 양푸동의 솜씨가 발군이다. 예술과 산업의 결합이 반드시 긍정적인 효과만 내지는 않겠지만, 상생의 시너지를 발산하는 창조적 지점이 궁금하다면 찾아볼 만한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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