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묻힐 뻔했던 우리들의 소중한 ‘모던 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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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7, 2021

글 고성연 |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 도움말 김인혜(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조영복(문학평론가, 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미술과 문학의 우정사


요즘 덕수궁의 한 미술 전시 공간에서는 자못 낯설고도 흥미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입구 쪽에서부터 옛날 신문을 뽑아놓은 듯한 종이 인쇄물이 놓인 선반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안쪽에는 역시 해묵은 서적이 든 우아한 유리 기둥들이 서 있는데, 은은한 불빛을 내는 독서등 덕분에 흡사 도서관을 방불케 한다. 시선을 잡아끄는 건 관람객들의 면모. 언뜻 봐도 2030세대가 적잖은데, 이들 중 상당수가 쓱쓱 지나치지 않고 조심스레, 그리고 꽤나 찬찬히 ‘문헌’을 들여다본다. 올 상반기 국립현대미술관이 야심 차게 내놓은 기획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제2전시실, ‘지상(紙上)의 미술관’ 현장이다. 주로 1920~40년대 신문소설의 삽화, 그리고 근대기의 책들을 모아놓은 곳. 고루하게 느껴질 법도 한 1세기 전 글·그림이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니, 어찌 된 일일까?




사실 꽤 오랫동안 우리의 20세기 전반부는 그저 어둡고 칙칙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찬란하진 않다고 여겼다. 변명 같지만 1910년 국권을 빼앗기고 35년의 일제강점기를 겪는 비통한 민족 수난의 근대 역사가 뇌리에 박혀 있으니, 암울한 나날이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여지는 충분했다. 그래서 ‘근대의 황금기’라고 하면 ‘빛의 도시’로 불리던 파리를 주로 들여다봤다. 문화 예술을 눈부시게 꽃피운 ‘벨 에포크’ 시대(1890~1914)를 누리고 이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동시대 예술가들이 모여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저마다의 창의성을 뿜어낸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 같은 연대가 펼쳐지는 등 애수가 어려 있으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넘쳐나던 도시 아닌가. 얼마 전 막을 내린 마이아트뮤지엄의 <마티스 특별전: 재즈와 연극>에서도 엿볼 수 있었듯, 당시 프랑스는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마르크 샤갈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다국적 예술가들이 파리와 남프랑스를 오가면서 앞다퉈 새로운 시도를 일삼고 문학, 미술, 영화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다채로운 협업을 펼친, 실로 역동적인 무대였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근대의 암흑기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이 고마운 사실을 깨닫거나 상기하기에 당시의 글과 그림이 함께 빚어내는 협주만큼 강한 매력을 뿜어내는 매개체가 있을까.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문예인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 국립현대미술관(MMCA) 덕수궁관의 기획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는 이런 맥락에서 가치가 남다른 콘텐츠다. 요새 전시장에 인파가 몰리는 현상은 단지 코로나19가 옥죄는 현실이 영 마뜩잖고 답답해서 미술 산책 나온 이들이 많아져서만은 아니다. 난관을 이겨낼 에너지가 절실할 때 문화 예술 콘텐츠가 주는 힘은 생각보다 클 수 있다. 더욱이 지금보다 훨씬 더 음울한 시대를 살아내면서도 오묘한 활기를 띠었던 근대 예술인들의 삶과 창조적 자취를 보노라면 사뭇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번 전시의 문학 부문 기획을 맡았던 조영복 교수는 ‘근대 문학 예술의 황금시대’라는 표현도 주저하지 않고 쓴다.



‘다방’ 문화와 전위, 그리고 예술인들의 창조적 어우러짐
“‘제비’는 이를테면 이제까지 있었던 가장 슬픈 찻집이요 또한 이상은 말하자면 우리의 가장 슬픈 동무이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지금은 영화감독 봉준호의 외조부로 더 잘 알려진 박태원(1909~1986)이 2년 전 세상을 뜬 친구 이상을 회상하면서 쓴 글의 한 대목이다(1939). 여기에 언급된 ‘제비’는 이상이 운영했던 다방 중 하나인데, 당시 다방은 단순히 차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살롱 문화가 그랬듯, 경성의 다방도 문예인들이 사색을 일삼고 시 낭송과 토론을 하고 미술 전시도 하면서 어우러지는 다목적 ‘문화 플랫폼’이자 예술 공동체의 성소 역할을 했다. 전시 도록에 실린 김인혜 학예연구관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대의 절망을 넘어,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예술가들의 ‘유토피아’적 갈망이 넘실대던 공간이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인식을 나누면서 1930~40년대에 활동의 나래를 펴기 시작한 문예인 목록에는 이상과 박태원을 위시해 정지용, 김기림, 김광균, 이태준 같은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구본웅, 김용준, 최재덕, 이중섭, 김환기 같은 화가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일본 등 해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이었는데, 개인적, 집단적 관계망 속에서 자연스레 얽히면서 ‘우정’과 ‘연대’를 쌓아나갔다. 또 문인이든 화가든 ‘예술’이라는 매개체로 의기투합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공동 작업을 남긴다. 이는 20세기 초반 ‘경계’를 허물고 혼합 현상이 나타난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어둡고 우울하다고 생각되던 그 시절에도, 우리의 예술가들은 놀고, 싸우고, 사랑하고, 일하면서 시대를 살아내고, 또 끌어안았던 것이다. “정치적 등화관제가 정신적 등화관제를 이끌지는 못하지요. 정치적으로 말하면 암흑기지만, 그걸 뚫고 일어나는 게 문학이고, 예술이니까요.” 조영복 교수는 우리가 근대에 대해 열패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면서 실제로는 문인과 화가가 만나 거대한 ‘판’을 벌였음을 거듭 강조한다.




근대기 문인과 미술인들의 찬란한 자취들

1933

박태원 신문 연재소설 <반년간>의 삽화
동아일보에 1933년 6월 15일부터 8월 20일까지 연재된 소설 <반년간>의 삽화. <반년간>과 더불어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적멸> 역시 구보 박태원이 직접 글을 쓰고 삽화도 그렸다. 박태원의 삽화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의 외손자가 영화감독 봉준호라는 점에서 ‘닮은 꼴’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1933

황정수, ‘모던 금강 만이천봉!’
1933년 7월, 개벽사에서 발행한 대중 잡지 <별건곤>의 표지 그림(제 8권 제 7호).
수많은 봉우리마다 영화관, 냉면집, 양국, 맥줏집 등 다채로운 상점이 쌓이고 쌓여 높은 산을 이루고 있다. 특히 문인, 예술가가 창작의 영감을 주고받던 카페, 다방이 즐비하다. 절벽 한곳에 마련되어 있는 ‘자살장’은 오늘날의 사회와도 닮은 요소다. 근대서지연구소 소장.

1934

<삼사문학> 제2호(표지 정현웅)
1934년 9월 창간한 문학 동인지 <삼사문학(三四文學)>의 주요 동인은 신백수, 이시우, 정현웅 등이었다. ‘34년’에 냈다고 해서 ‘삼사문학’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상(李箱)은 삼사문학의 동인들을 ‘20세기의 영웅’이라 칭하고 그들의 청년 정신과 전위성을 높이 샀다. 1934년 12월에 나온 제2호의 표지는 정현웅이 맡았다. 아단문고 제공.

1935

구본웅, ‘친구의 초상’
어린 시절 척추를 다쳐 단신에 등이 굽게 된, 그래서 ‘한국의 툴루즈 로트레크’라는 별명을 지닌 화가 구본웅이 ‘절친’인 작가 이상을 강렬하게 담은 초상화. 키가 껑충하게 큰 이상과 대조적으로 작은 구본웅이 함께 다니면 시선을 끌었다고 한다.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36

김기림, <기상도> 장정: 이상(李箱)
<중앙> 등에 연재한 장시를 모아 창문사에서 1936년 간행한 김기림의 첫 시집으로 두 번째 일본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보성고보 동문인 이상이 편집과 장정을 도맡아 자가본으로 2백 부 출판했다. 작중 화자가 세계 지도를 따라 여행을 하는데, 일종의 문명 비판을 의도했다고 한다. ‘기상도’라는 제목이 조금씩 커지도록 한 입체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화봉문고 소장.
1938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글, 정현웅 그림
조선일보에서 발행한 잡지 <여성> 제3권 제3호(1938. 3)에 실린 백석의 시와 정현웅의 그림. 조선일보 출판부 편집자로 일한 백석과 정현웅의 인연으로 탄생한 수작. 아단문고 제공.

1940년대

이쾌대, ‘이여성 초상’
열두 살 위 형으로 스승과도 같았던 화가이자 언론인, 학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여성의 초상을 그린 이쾌대(형제는 월북했다). 이여성은 조선일보 사회부장 시절 문인 기자 김기림과 각별한 연을 쌓고 한국 근대 문화사에 한 획을 긋는 계기를 마련한다. 캔버스에 유채, 90.8 X 72.8cm, 개인 소장.
1940년대

최재덕, ‘한강의 포플라 나무’
화가들의 친구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시인 겸 사업자 김광균이 한때 소장했던 작품. 1940년대 근대기 화단에서 가장 촉망받는 화가 중 하나였던 최재덕은 한국전쟁 중 월북하는 바람에 그가 남한에 남긴 작품은 몇 점 되지 않는다.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1942

김용준, ‘기명절지 10폭 병풍’
<근원수필>로 유명한 수필가이자 한국 근대 화단을 대표하는 미술사가이기도 한 김용준의 대표작.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귀국한 뒤 한국화로 전향했고, <문장>을 비롯한 여러 문예지에 표지화를 그렸다. 초대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지만 한국전쟁 중 월북했다. 개인 소장.
1943

이태준, <돌다리>(장정 김용준)
원래 미술학도를 꿈꿀 만큼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이태준의 주옥같은 책은 대부분 ‘내성의 친구’ 김용준의 장정으로 출판됐고, 이들은 일제강점기 말 문예 잡지 <문장>의 발간에도 헌신했다. 박문서관 제공.

1948

윤동주의 유고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생을 마감한 윤동주의 시집. 당대 최고의 시인 정지용이 서문을 썼으며, 1948년 정음사에서 출판됐다. 장정은 당시 정음사 직원이던 판화가 이정이 맡았다. 근대서지연구소 소장.
1951

김환기, ‘달밤’
최재덕, 이중섭 등 화가들과 잘 어울렸던 김광균이 부산 피란 시절에 김환기에게 구입한 그림. 하드보드에 유채, 50 X 50cm, 개인 소장. © (재) 환기재단·환기미술관

1955

이중섭, ‘시인 구상의 가족’
가족과의 재회를 꿈꾸던 이중섭이 그러한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게 됐을 당시 제작한 작품.
오래된 친구이자 신세를 지던 시인 구상이 자전거를 사서 이들을 태워주는 모습을 부러워하는 이중섭의 모습이 담겨 있다. 종이에 연필, 유채, 개인 소장.
1965

천경자, <‘아뜰리에의 여백’> 삽화
<여상(女像)>이란 잡지에 연재하던 ‘아뜰리에의 여백’이라는 고정란에 쓴 수필에 곁들었던 삽화. 종이에 수묵, 10.7 X 14.8cm, 개인 소장.


신문과 잡지를 축으로 한 근대의 예술판에서 핀 찬란한 꽃
실제로 그 대단한 ‘판’을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증거가 바로 이 글의 전문에서 2030세대가 흠뻑 빠진 전시장 풍경으로 묘사됐던 ‘지상의 미술관’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 전시된 ‘근대의 책’들은 그저 문자와 그림으로 이뤄진 인쇄물이 아니라 당시 문예인들이 영혼을 갈아 넣은 ‘예술’이었다. 수많은 삽화와 표지화를 그렸던 정현웅은 “서적의 장정, 그것만으로도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의 한 면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했는데, 수려하기 그지없는 화문(畵文), 삽화, 장정 등을 두루 살펴보자면 당시의 책들은 ‘인쇄 미술’의 미학을 여지없이 담아내고 있다. 또 그들의 작업은 21세기에 강력히 부르짖는 키워드들이 무색하게 다분히 융합적이고 혼종적이었다. 그건 이 시대 문인과 화가가 이미지와 활자를 동시에 ‘애정’했고 그것들을 함께 창의적으로 다룰 줄 알았으며,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들면서 ‘따로, 또 같이’ 작업을 해나간 덕분이다. 예컨대 시인 이상이 보성고보 동문이기도 했던 김림의 시집 <기상도>의 편집과 장정을 도맡아 하는 식으로 말이다.
더불어 신문소설의 삽화와 신문사 자매지로 발간된 잡지의 화문 역시 눈여겨볼 대상이다. 20세기 초반 지구상에는 문자와 이미지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지만, 조선 땅에 읽을 거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당대 최고의 문인이 글을 쓰고 삽화가가 그림을 그린 소설을 게재하고 자매지로 대중 ·문예 잡지를 내는 신문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했고 파급력도 컸다. 매체 종사자의 면면 역시 화려했다(주로 지식인층이었던 독자의 수준 역시 높았다).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폭이 극히 좁았던 터라 일간지와 잡지사에서 일한 경우가 많았고, 덕분에 이른바 ‘문인 기자’의 활약상이 돋보였다(이여성과 김기림, 백석과 정현웅의 만남이 신문사가 맺어준 대표적인 인연으로 꼽힌다). 시인 백석이 조선일보에서 펴내던 <여성>의 편집자로 일했을 때 이 잡지는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고 하는데, 그가 동료였던 정현웅과 함께 쓰고 그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둘의 환상적인 ‘궁합’을 잘 드러내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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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상의 미술관’ 전시장에서 근사한 장정을 입은 근대 서적뿐 아니라 화문이나 신문소설의 삽화가 젊은 세대까지 아우르는 관람객의 진지한 ‘감상’을 이끌어내는 풍경은 전시를 기획한 이들에게도 다소 놀랍고 흐뭇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벽에 내거는 ‘그림’ 없이 전부 문헌으로만 채우면 종이에 새겨진 문자를 기피하는 ‘이미지 세대’를 비롯해 도대체 누가 보러 오겠냐고 생각했고, 그럼에도 찬란했던 시기의 ‘책 문화’를 보여주고 자칫 잊힐 뻔한 빼어난 예술가들을 끄집어낸다는 중요성 때문에 과감히 밀어붙인 건데(심지어 제일 통 큰 투자를 했다고 한다), 전혀 기대치 못한 반전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도서관은 세계다’라고도 하고. 그런데 20대가 그런 고답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게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조 교수의 감탄에 김 연구관도 맞장구를 쳤다. 아마 그건 ‘자매 예술’이라고도 하는 문학과 미술, 다시 말해 글과 그림이 제대로 조화를 이룬 덕분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는 어이없을 정도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그러모으고 관련 미술 작품들을 애써 찾아내 ‘아카이빙’ 작업을 완성한 두 여성의 조우도 단단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방대한 전시의 밑작업을 함께 이끈 이들 중 한 사람이 살짝 수줍게 내뱉은 말처럼 어딘가에는 ‘김인혜와 조영복의 만남’이라는 작은 주석을 달아도 좋을 듯하다. 결국은 ‘사람’과 ‘사람’이 연결 고리가 되어 문화 예술도 꽃을 피우고 변주도 하는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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