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 미술’은 내용보다 외면을 중시하는 현대적 양상을 잘 보여주는 현대미술 분야 중 하나다. 부부 미술가 크리스토와 잔클로드(Christo and Jeanne-Claude)는 포장을 하나의 예술 형식으로 정립한 대표적인 작가 부부이고, 중국 작가 쩡판즈는 내면을 볼 수 없는 포장 조각을 만들었으며, 우리나라 작가 김수자는 ‘보따리’라는 용어를 현대미술계에 입력시켰다. 전광영은 또 다른 형태의 포장미술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다. 싱가포르 비엔날레 개막과 동시에 길먼 배럭스(Gillman Barracks)에 있는 순다람 타고르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본다.
1990년 중반부터 한지로 스티로폼을 싸는 독특한 작업인 ‘집합(Aggregation)’을 시작한 전광영은 그 독창성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2001)로 선정되었다. 그 후로 유럽, 미국, 아시아 등 여러 지역의 주요 미술관에서 꾸준히 전시를 가지면서 활약해왔다. 지난해에는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뜻깊은 개인전을 가지기도 했다(2018. 11~2019. 7). 이 전시는 미국 오리건의 조던 슈니처 미술관(Jordan Schnitzer Museum of Art)에서 순회전 형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또 현재 싱가포르의 순다람 타고르 갤러리(Sundaram Tagore Gallery)에서도 개인전이 진행 중이다(2월 1일까지).한마디로 세계 무대에서 그의 존재감이 부쩍 커진 느낌이다.
나의 뿌리, 나만의 정체성을 찾아서
지난해 11월 싱가포르 비엔날레(SB 2019) 개막 시기에 맞춰 열려 더 많은 관람객들의 발길을 불러모으고 있는 전광영의 전시에서는 그의 대표작 ‘집합’ 시리즈가 공간을 차지했다. ‘집합’은 힘겨웠던 13년간의 미국 유학 생활(1969~1982)에서 얻은 질문에 대한 대답의 연속이다. 필자와 나눈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에서 아무리 서양 그림과 비슷한 유형으로 작업해도 이는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1억 명이 넘는 전 세계 미술가들과 구별할 수 있는 나만의 독창성이 무엇인가?’라는 커다란 질문을 안게 됐고, 그 대답을 찾기 위해 한국으로 ‘역유학’을 왔다고. 그리고 작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나의 이야기, 나의 뿌리, 나의 조상을 찾아 전국의 민속박물관을 돌아다녔는데, 특히 온양민속박물관은 서른 번 이상 방문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방법론으로는 ‘보자기’를, 마티에르(재료)에서는 ‘한지’를, 철학적으로는 ‘파르마콘(‘약’과 ‘독’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의 중의성을 찾게 된다.
우선, 작가는 한국의 독특한 ‘래핑(wrapping) 문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서양은 ‘박스 문화’예요. 1백 온스 박스에 10온스 박스를 10개 넣어서 닫으면 모양 좋게 딱 닫히지요. 그런데 우리는 ‘보자기 문화’입니다. 시집간 딸이 친정 왔다가 다시 시댁으로 갈 때, 친정어머니는 10온스짜리 오브제 10개를 넣어 딱 보기 좋게 만들었다가도, 애타고 아쉬운 마음에 10온스짜리를 하나 더 넣고, 뒤돌아가는 딸을 쫓아가 다시 하나를 넣어서 보자기 모양이 찌그러지고 이상해집니다.” 그는 이것이 바로 한국의 개념이고 ‘정’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으로 그는 ‘약재와 약첩 봉지’를 통해, 마티에르인 ‘한지’와 ‘미술 철학’인 ‘파르마콘’의 중의성을 찾게 된 과정을 얘기한다. “나는 강원도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큰할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셨는데, 갖가지 약재를 담은 봉지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어요. 이 약봉지에서 약초를 꺼내 제조한 약을 정성껏 한지로 싼 뒤 약첩 봉지 뒷면에 알아보지도 못할 초서로 글을 씁니다. 이를 5개 정도 모아서 끈으로 묶어주면, 아낙네들이 아주 정성을 다해 받아가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았지요.” 그는 큰할아버지가 한지로 약재를 싸듯 삼각형 스티로폼을 한지로 싸고, 큰할아버지가 약첩 뒤에 글씨를 쓰고 이를 다시 끈으로 묶어놓듯 이미 글씨가 있는 고서를 한지 끈으로 정성껏 묶는다. 이를 특별히 제작한 캔버스에 수천 개에서 수만 개를 섬세하게 붙인 뒤, 큰할아버지가 아낙네들에게 전달하듯 관람객들에게 제시한다.
‘집합’ 시리즈와 포장 미술의 중의성
그렇다면 왜 ‘집합’이라는 작품명을 붙인 것일까? “작업에 사용된 한지는 1백여 년 된 고서에서 나온 것들로, 거기에는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고서들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나에게 도달할 때까지, 이 책이 거쳐간 수많은 사람의 손때와 지문이 묻어 있지요. 그 집합체인 내 작업 앞에 서면 관람객들은 (작품과)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고서가 거쳐간 남녀노소의 애환, 생활 등 모든 것을 모아놓았다는 의미와 한국의 ‘얼’을 한지로 싼다는 의미에서 ‘집합’이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설명이다. 그렇게 ‘집합’은 ‘보자기’나 ‘한약재 봉지’ 혹은 ‘한약첩 포장’의 재현을 넘어 실험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창의적 조형물이 되었다. 관람객들은 작품 앞에서 수많은 바위산을 담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하기도 하고, 광물체나 우주의 낯선 행성을 연상하기도 한다. 작가의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의 ‘포장 문화’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보따리(혹은 보자기)’는 고전적 의미에서 여성적(감성적)인 것으로 1백 온스를 담아야 할 것에 10온스짜리를 하나 더 넣으며, 형태와 관계없이 최대의 ‘정’을 담는다. 하지만 그의 작업 ‘집합’은 가까이에서 보면 보자기보다는 내용물이 정확하게 측정되고 담겨야 하는 남성적(이성적)인 ‘약봉지’다. 보자기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적혀 있지 않아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이나, ‘약봉지’는 무엇이 안에 들어가 있고, 어떤 용도(질환)에 쓰여야 하는지 명료한 물건이다. 반면 멀리서 보면 불규칙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카오스적인 ‘보자기’ 형태가 된다. 한국 미술에 원색적이고 다양한 ‘다색화(단청, 불화 등)’와 모든 색을 다 품은 검은 먹으로 표현되는 ‘단색화(문인화, 산수화)’가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문인화/민화’, ‘단색화/다색화’, ‘약봉지/보따리’ 등처럼 한국 문화와 예술은 2개의 축을 오가고 있다. 하지만 서구의 이원론처럼 전자가 후자를 억압하는 대립 관계나 종속 관계의 존재론이 아니라, ‘음과 양’처럼 시공간적 조건에 따라 때로는 멀어지고 때로는 가까워지는 관계론이다. ‘집합’이 보자기와 약봉지의 특징을 다 지니고 있듯이 말이다. ‘포장’ 혹은 ‘포장 미술’의 특징은 그 안에 상반되는 여러 가지를 담을 수 있다는 ‘다의성’을 품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광영은 포장 안에 있는 알 수 없는 내면(‘보자기’)을 외면으로 확장한다는 점(‘약봉지’)에서, 즉 ‘내면의 외면화’라는 점에서 다른 포장 미술가들과 구별되는 것 같다. 글 심은록(미술비평·기획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