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에도 지치지 않고 길동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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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 2015

글 강수미(미학자, 동덕여자대학교 회화과 교수)

이국적이고 신비한 작품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술가로 추앙받던 천경자의 갑작스러운 부고가 전해졌다. 미술 평론가 강수미가 추억해본 미술가 천경자의 작품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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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자신의 삶은 고달프고 외로웠는데, 정작 대중에게는 오히려 그 점이 예술가의 신화로 재탄생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가족과 생이별한 채 찢어질 만큼 궁핍한 말년을 보내야 했던 화가 이중섭. 그가 고독한 심정에 담뱃갑 은박지를 도화지 삼아 그린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이상향은 화가를 더욱 드라마틱한 인물로 만든다. 동생 테오의 후원으로 겨우 연명하면서도 결코 붓을 놓지 않았고, 고갱과의 갈등은 물론 정신 질환으로 내내 고통받았던 반 고흐. 그가 광기 어린 생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화폭 위에 황홀한 색채와 붓질의 향연을 펼쳐냈다는 사실은 위대한 예술가를 향한 우리의 동경을 부채질한다. 하지만 예술가 당사자에게 그 인생의 순간순간은 얼마나 쓰디쓴 현실이었겠는가!
천경자. 1924년 11월 11일 전남 고흥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유족이 알린 바로는 2015년 8월 6일 미국 뉴욕의 맏딸 집에서 숨을 거둔 대한민국 화단의 대표 여성 화가. 일제강점기인 1940년 유학 길에 올라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일본화를 전공하고 스무 살도 채 안 된 나이에 연거푸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며 초기부터 예술적 역량을 세상에 뽐낸 미술가. 1952년 한국전쟁 중 피란지 부산에서 열린 개인전에 내놓은 극히 독창적이고 도발적인 그림 한 점(‘생태’)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래, 20여 년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예술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78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 이만하면 이 화가가 누군지 자세히 알든 모르든 사람들은 그녀가 멋진 삶을 살았다고, 커다란 성공과 대단한 명예를 누렸다고, 평범한 인생에는 없는 화려함과 풍요가 넘쳤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삶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천재적인 재능과 시대를 앞서가는 감각, 세파에 꺾이지 않는 자존감과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을 것이다.
실제로 천경자의 개인사는 물론 이 화가가 남긴 다수의 작품에서 우리는 그런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그녀의 생전 사진이 말해주듯 천경자는 매력적인 외모에 두드러지는 패션 감각과 화려하고 다채로운 취향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작품 범주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자화상 연작은 신비로워 보이는 눈 화장, 이국적인 꽃을 엮어 만든 화관, 황금빛에 가까운 노란색이나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색 배경, 우아함과 쓸쓸함이 동시에 엿보이는 여인 형상의 조합을 통해 그 같은 사실을 미학적으로 알려준다. 또 서른다섯 마리 뱀이 우글거리며 뭉쳐 있거나, 교미하거나, 제 꼬리를 물려고 몸을 비트는 역동적 순간을 그린 작품 ‘생태’가 웅변하듯 천경자의 창작 세계는 환상에 힘입어 과감하고 강렬했다. 그래서 가령 고인의 작품 93점을 소장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천경자의 혼>이라는 전시로 처음 이 예술가를 접하는 이라면, 일단 그 풍부한 시각성에 흥미로워하고 거침없이 비약하는 표현력에 감탄할 것이다.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 미술사와 미학에서 이 화가의 의미는 가늠하기 어려운 무게를 지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천경자 작가를 둘러싼 이야기에는 작품에 대한 미적 관심과 의미 있는 비평을 압도해버리는 스캔들이 둘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스캔들이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고, 또 다른 작품을 영원히 기대할 수 없는 한 예술가의 미학을 조명해야 할 시점에 발목을 잡고 있다. 생전에 작가를 심히 괴롭혔고 절필로까지 몰아댄 과거 사건이 작가의 죽음을 알리는 비보가 날아든 이때 다시 언론과 일부 선정적 논자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는 실정이 그 스캔들 중 하나다. 그리고 고인의 마지막 삶과 죽음과 관련해서 세상에 밝혀지지 않고 있는 비밀이 다른 하나다.
1991년 소위 ‘미인도 사건’으로 알려진 일이 터진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의 주범 김재규에게서 환수한 재산 중 일부로 소장하게 된 천경자의 ‘미인도’에 대해 다른 누구도 아닌 작가 자신의 판단 아래 ‘위작’이라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이경성 관장 체제하의 미술관은 창작 주체인 작가의 주장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또 미술 평론가들과 한국화랑협회까지 나서서 ‘진품’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 과정에서 천경자는 “어미가 자기 자식을 몰라볼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기 자식도 몰라보는 어미’라거나 젊었을 때부터 환상만 좇더니 혼이 안 들어간 채로 그린 제 그림을 몰라보고, 나이 들어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원색적 비난을 들은 뒤 창작까지 중단하는 지경의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그 상처가 기실 천경자 작가의 말년에 찾아온 비극의 단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사건 후 작가 활동은 물론 국내에 머물지도 못하고 20여 년 넘게 고독한 이방의 은둔자가 된 그녀가 불현듯 지난 8월 맏딸의 손에 유골로 들려 서울시립미술관의 자기 방을 마지막으로 돌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 그 생애의 마지막 순간들이 맏딸을 제외한 직계 유족들에게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채로 끝나서다. 그 와중에 일부 언론은 새삼 ‘미인도’의 진위 여부를 재탕하거나,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 온갖 루머를 끼워 넣어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다.
작가의 미술을 아끼는 이들에게는, 그래서 작가의 별세 뉴스가 전해진 뒤 서울시립미술관 ‘천경자 전시실’을 찾는 대중이 급증했다는 소식이 그리 기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예술가가 온전히 그녀 자신으로, 그 그림들이 과장이나 폄하 없이 충실히 천경자의 예술혼으로 감상자에게 수용되고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천경자 작가는 생전에 수필집을 통해 “나는 어떠한 비극에도 지치지 않고 살고 싶어질 것이다. 내 삶의 그림과 함께. 인생의 고달픈 길동무처럼 이어갈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우리는 그녀의 생애 중 어쩌면 가장 고달팠을 마지막 20여 년을 모른다. 그러니 작가의 당당한 선언처럼 그림이 그녀 인생의 길동무로 끝까지 함께했는지 여부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그 자체로 존중하자. 그녀가 세상에 내놓은 그림들만으로도 매우 가치 높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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